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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01 20:23
7.삼위일체설에 대하여
 글쓴이 : 레종프렌치
조회 : 386  

삼위일체설에 대하여     


1) 삼위일체설의 역사적 실체


삼위일체설...그것에 대해 고찰해 보기 위해서, 우선 그 역사적인 상황에 대해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생전의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지 않았으며, 초기 교회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를 동일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설이란 종교를 정치에 이용해 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날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때엔 당시 로마에서 스스로 황제라 지칭하는 사람이 6명이나 되었다고하는,혼란의 시기 였다고 한다.


로마의 황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식의 강력한 황제가 아니라, 황제는 프리켑스(princeps=1의시민)또는 가이사(caesar)이라 불렸으며, 민주주의와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인의 자유로운 사상때문에 시이저마저도 황제가 되려다가 공화파에게 로마시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암살 당하는기까지 했으며, 그의 양아들 옥타비우스는 황제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프리켑스라는 명칭을 썼다.[옥타비우스는 그 명칭보다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존엄한자)라는 명칭을 들었음]


그후 폭군으로 알려진 칼리귤라(=가이우스)와 네로황제가 암살당한후,군인황제시대 서기69년에는 한해동안 무려4명의 황제가 등장하기도 했었을 만큼 황제의 권위와 권력세습체계가 미약했으며, 누구든 힘있는 자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6명의 황제 중에 프랑스와 브리튼의 로마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부제는 마지막 라이벌인 막센티우스를 쓰러 뜨린 후 유일한 황제가 되긴 했지만 ,언젠가는 또 다른 경쟁자가 나올 것을 막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던 것이다.


우선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의 자유로운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그 동안 핍박했던 크리스트교를 서기312년 공인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후임황제에게 유언으로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명했고 392년에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한편 크리스트교는 박해를 받았던 서기 320년무렵까지는 예수의 신성을 제한적으로만 인정하고 인성을 위주로 예수를 파악하는 초대교회가 아리우스와 그의 제자 세쿰을 중심으로 지하에서 로마제국에 투쟁했었다.


삼위일체설은 크리스트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확립하기위해 서기325년 콘스탄티누스가 개최한 [니케아]종교회의(=니케아 공의회) 1)에서 아타나시우스라는 자가 최초로 주장하였는데, 그는 콘스탄티누스황제에게 아첨하여 그를 신과 인간의 사이를 중개하는 교황이라 추대하여 아첨을 떨었던 것이다.


신성을 여호와만이 가질 수 있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등장한 이 이론은, 교황으로서의 로마황제는 신의 대리인으로 추앙받고 무오류(로마황제의 행동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별의별 아첨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의 법칙도 이때 확립되었다.


삼위일체설은 당시 정통의 아리우스파들조차도 부정했는데, 이유는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늘 말했으며,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와 하나님이 일치한다는 말이 없었다. , 예수=하나님=성령이라는 공식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 당시 그들의 반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아타나시우스파는 그들의 삼위일체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는 극소수 예수제자들의 이론을 마치 예수 자신의 입장인 것처럼 떠벌렸다. 결국 삼위일체설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투표'로 결정났다. 기독교의 진리는 결국 '투표'로 정해진 것이다. 종교란 승자의 정신적 먹이이다.


그 로마황제에 대한 아첨꾼들이 두 번 다시 아리우스의 정통파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는 적그리스도파라고 못을 박아버렸고 이는 아리우스파를 결국 박해와 순교에 소멸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크리스트교 공인과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나온 삼위일체설, 그것은 종교를 정치에 이용해 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고도의 정치전략 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정통 사회주의와 동떨어진, 김일성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북한의[우리식 사회주의]처럼, [삼위일체설]도 당시의 기독교인들로부터도 외면받은 정치적인 논리였던 것이다.

 

2) 삼위일체 교리의 기원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위일체라는 말도 그에 해당하는 명백한 교리도 신약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도 구약에 나오는 쉬마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주이시니라'(신명 6:4)는 말과 모순되는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 그 교리는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논쟁을 거치면서 점차 발전된 것이다. ... 4세기 말에 이르러 ... 삼위일체 교리가 구체적으로 정립되었으며 그 후 그대로 유지되었다." - (1976년판), 마이크로패디아, 10, 126.

 

신 가톨릭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세 위 속의 한 하느님'이란 교리는 제 4세기 말 이전에는 완전히 체계화되지 않았으며, 확실히 온전하게 그리스도인 생활과 신앙 고백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체계화된 바로 이 교리가 처음으로 삼위일체 교리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사도 교부들 간에는 그러한 경향이나 사조에 조금이라도 닮은 것조차 전혀 없었다." - (1967년 판), 14, 299.

 

아메리카나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유대교에서 나온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엄격히 (하느님은 한분의 인격체라고 믿는) 유일신파였다. 예루살렘에서 니케아에 이른 길은 거의 곧은 길이 아니었다. 4세기의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본성에 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 가르침에서 이탈한 것이었다." - (1956년 판)), 27, 294면 좌단.

 

신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플라톤의 삼위일체는, 그 자체가 좀 더 고대 사람들의 시대에 속하는 더 오래된 삼위일체 사상들을 정립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합리적인 철학적 삼위일체로서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가르치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 희랍 철학자[플라톤, 기원전 4세기]의 개념을 ... 고대의 모든 [이교] 종교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M. 라샤트르 편, (파리, 1865-1870), 2, 1467.

 

예수회의 죤 L. 맥킨지는 그의 편저 성서 사전(dictionary of the Bible)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위격들의 본성이 하나인 삼위일체는 희랍 철학 용어인 '''본성'이란 용어로 정의된다. 사실상 그 용어들은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삼위일체의 정의는 일부 신학자들이 그러한 용어들과 '본질' '품성'과 같은 다른 용어들을 하느님께 그릇되게 적용한 오랜 논쟁의 결과로 생겨났다." - (뉴욕, 1965년 판), 899.

 

삼위일체론자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삼위일체"라는 말이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설명이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 교리에 들어있는 개념을 성서의 말씀으로부터 끄집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예수는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보다 능력이나 위격에서 낮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말씀이 한 두 개 있다면 삼위일체에 반대되는 말씀은 백 개쯤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주------------------------------

1) 니케아 종교회의

니케아에서의 제1차 범 종교회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소집.


속셈은 한창 번창중에 있는 그리스도교를 업고 로마제국을 굳혀놓기 위해서였다. 콘스탄티누스가 318명의 주교들을 선발, 소집했던 배후에는 이빨을 드러낸 파워폴리틱스(Power Politics)에서였고, 종교야 어찌되건 관심밖의 일이었다.


이 점에 대해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던 주교들도 짐작 못한 바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황제는 회의를 사회했고 내 뜻은 바로 교회의 법률이라는 성명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주교들은 세례도 받지 않은 황제를 <세계의 주교>격으로 영입시켜 속세의 왕으로서 교리에 관한 투표에 참가시켰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가르침이니 뭐니 전혀 아는 바 없었다. 그는 미트라의 태양숭배를 받들었었고 기독교세상이 된 뒤에도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미트라의 초상을 조각,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써놓고 있다.


희랍에 옛날부터 있어 오는 비잔틴에 자기 이름을 붙여 330년 콘스탄티노플로 고쳤는가 하면, 여기를 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했을 때에도 역시 기독교적인 겸허따위는 오불관언, 기념축전에서는 거대한 기둥탑을 세워, 미트라신과 자신의 모습을 조각케 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노예를 폐지하려는 생각은 커녕 오히려 음식물을 도둑질한 노예의 입에 납을 녹여 붓는 형벌과 가난한 자는 자식을 팔아도 된다는 법을 정하기까지 하였다.


그럼, 이 폭군은 교회정책의 어떤 결정에 참여했던 것일까?


당시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하다고 하는 아타나시우스의 설신은 오직 하나뿐이므로 그리스도는 신을 닮아 있을 뿐이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의 설이 대립되어 있었다


이것이 많은 사제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파급되어 대립이 심각해지자,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 고문관인 오시우스를 보내어 진상을 조사케 했다. 오시우스는 돌아가서 황제에게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라고 했다. 그는 만일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기독교 교리가 허물어지고 믿음에 혼돈이 생겨 교회의 권위가 파괴되어 분열을 일으킬 것이며, 결국 로마제국까지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당시는 유럽, 이집트, 서남아시아의 전지역에 퍼져있던 미트라 신앙이 쇠퇴하고 그 대신 기독교가 국교(313)화된 시점이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 교리의 절대적인 힘을 빌리지 않고는 로마제국을 강력하게 통치할 수 없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세속적, 정치적 속셈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친히 회의를 주도하고 토론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 대부분은 극단의 양 견해를 피하고 중간자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채택되도록 주교들에게 압력을 가해 아버지격이 되는 하느님과 예수그리스도는 동등하다고 결의케 했다. 결국 단 두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참석자가 아타나시우스에게 표를 던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니케아회의의 결정이 신의 감화에 의한 것이라고 자랑했고, 대부분의 순진한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본래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를 섬기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세례를 받은, 신학적 논리에는 어두운 인물이었다. (이러한 황제의 영향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신앙의 의식이나 제도,관습,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미트라 신앙이 기독교에 미친 지대한 영향은 따로 후술할 것임)


그러나 그 후 황제의 입법으로서 손질을 한, 이 변경은 교회의 핵심<도그마>가 되어 버렸다.


비기독교인인 콘스탄티누스는 또 그 이상의 공적도 교회에 기여했다. 예수의 무덤을 사상 처음 발견하여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그 해에 그는 근친 몇몇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들 그리스프스, 처 파우스타를 끓는 열탕 속에 처넣어 죽였고, 장인 마키시미안을 체포하여 자결시켰다.


<니케아의 신앙 선언>을 주재하여 회의를 끝낸 뒤, 318명 주교들의 합의야말로 하느님의 결정이라는 것을 기독교 교단에 회람을 돌린 인물은 대주교격인 황제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르메니아, 그리이스, 러시아 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받기까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미트라(Mithras) 신앙과 기독교

흔히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미트라 신앙을 고대의 잡신 신앙이나 원시신앙으로 매도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미트라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뿌리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태양신으로 널리 알려진 미트라에 대한 신앙은 약 사천년 전,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다. 미트라 신앙은 동으로는 인도에서 중국까지 서로는 로마국경의 전 범위, 즉 스코틀랜드에서 사하라 사막, 스페인에서 흑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미트라를 숭배했던 장소들이 영국,이태리,루마니아,독일,헝가리,불가리아,터기,페르시아,아르메니아,시리아,이스라엘,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된다.


미트라 신앙은 로마제국에서 로마 군인들의 종교가 되었고, 제국 전역에 사원과 성전이 세워진다. 그들은 미트라에움이라는 자연적인 동굴모양을 모방해서 만든 사원에서 의식을 행했는데,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


"미트라" 동굴에서 꼭 발견되는 하나의 그림이 있는데, 한 인물이 황소의 목을 따는 그림이다. 그림에서 황소를 제압하는 인물이 "미트라"로써 태양신의 아들이다. "세상의 빛"으로 불리워졌고, 예수와 마찬가지로 "미트라" 성 삼위 일체의 두 번째, 즉 아들의 존재로써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생일은 12 25 일로 경축되었다. 만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었다가 3 일만에 부활하였다. 그의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절 주기와 일치하며 12제자를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 신앙의 의식이나,제도,관습,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 "미트라" 숭배자들이 믿었던 천국과 지옥, 죽은 자가 부활하는 심판의 마지막날,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를 위해 현존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최후의 전쟁, 구세주의 고통과 형벌이 신자를 구원하게 되리라는 교리, 영을 통해 거듭 태어난다는 것, 구원, 부활, 재림 등의 교리, 최후의 만찬 이야기 등등 너무도 흡사하다.


또 미트라신은 처녀한테서 태어났는데 예수도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또 미트라의 탄생을 경축하는 축제가 1225일에 열렸는데 이를 기독교에서 그대로 차용하여 예수의 생일로 쓰게 되었다. 그리고 두 종교 모두 세례의식과 피와 포도주에 의한 성화의례가 있다. 기독교 사제의 명칭인 파더(Father)는 미트라교 사제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며 미트라교의 주교는 자신들 직책의 상징으로 미트라 또는 미테르(주교관)을 썼는데 기독교의 주교들 또한 이러한 미테르를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의 성직자 계급 제도나 예배 형식 및 예배 시 쓰이는 도구들 즉 향불, 예배 의복 등등 모두 미트라와 흡사하다. 십자가 목걸이, 염주알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와같은 연유로 라즈니쉬는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라고 선언한 것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기독교의 창시자는 콘스탄틴 황제이다. 기독교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대중들이 그 사실을 알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 니케아 종교회의를 주도했던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인으로 죽었지만, 임종직전에 세례만 받았을 뿐이다. 그는 평생동안 태양신 종교의 고위성직자로 있었다. 바로 이런 관계로 예수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일요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다. 예수 역시 토요일을 안식일로 믿고 평생 살았다.


태양의 숭배자들은 항상 태양의 날이 신성한 날이라고 믿어왔다. 실제 기독교의 창시자는 콘스탄틴이다.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로마의 황제였기 때문에 그의 압력하에 성직자들은 예수의 신성에 찬성하게 된 것이다. 바로 콘스탄틴이 예수를 신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신격화는 콘스탄틴의 착안이다.


또 콘스탄틴은 예수의 생일을 16일에서 태양의 재생일인 1225일로 바꾸었다. 1225일은 예수 탄생 이전부터 전세계적으로 경축해온 태양신의 날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발상 전체는 꾸며진 것이다예수는 1월 6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영향력에 의해 예수의 생일은 태양의 재생일인 12월 25일로 둔갑된 것이다. 태양숭배자들은, 태양이 12월 25일에 탄생했다고 생각해 왔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완전한 무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크리스마스가 가짜라는 것을 모르는 채..... 교회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중들에게 철저히 감추고 있다. 이것이 진리의 수호인가? 거짓의 방어일 뿐이다. 

콘스탄틴은 예수를 실패한 메시아로 보고, 그 자신을 진정한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의 이런 견해는 유명한 주교인 케자리아의 유세비우스의 다음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마침내 예수가 아닌 콘스탄틴에게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콘스탄틴은 그 자신을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마지막 예언자로 만들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로마의 황제를 십자가에 매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왕권의 원조를 원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곳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있었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보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전히 협상,비지니스에 불과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실패한 메시아이고 콘스탄틴이 참메시아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런 사실은 대중들에게 공표된 바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 크리스마스 

  12월 25일(크리스마스)은 예수가 태어난 날로서 기독교 최대의 명절이며 이제는 전 세계 인류가 함께 축하하는 날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그날에 예수가 탄생한 것인가? 

실상은 정확한 예수의 탄생은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12월25일은 조로아스터교와 로마인들의 태양신을 맞이하는 축제일이며, 유대인들의 참다운 메시아를 기다리는 염원을 담은 날로 크리스마스 즉 메시아절은 구약성서 시대부터 지켜 오던 유대인의 절기인 것이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Christ(그리스도)와 Mas(미사,축제일)의 두 단어가 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Christ는 Christos(크리스토스)에 그 어원을 두고 있으며 이 그리스어 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의 메시아(Messiah)와 같은 것이다. 어원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메시아 제전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크리스마스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 의해 크게 왜곡되어 있다. 

메시아의 날이 예수의 생일날로 둔갑해 있는 것이다.  과연 그가 메시아인가? 

이에 우리는 메시아절의 참 의미를 밝힐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메시아절의 주인공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경축해온 메시아절, 이날은 일년 중 낮의 길이가 짧아지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에 속한다. 

농경 생활을 하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태양은 곧 절대자의 상징이었고 태양이 다시 그 힘을 회복하여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이날은 춘일의 도래와 함께 생명의 소생을 예고하는 날로서 고대인들이 메시아 신앙으로 미래를 소망하던 날이었으며,12월 25일은 바로 조로아스터교 태양신의 생일이며, 동시에 로마에서는 동지에 태양신(미트라)의 복귀를 축하하면서 새로운 태양을 맞이하는 축제로서 로마의 농민제(사트르날리아 축제)라고도 불렸으며, 기독교인들은 이 날을 예수 탄생일로 결정함으로써 손쉽게 이방인들을 교화시킬 수가 있었다.  

즉, 이방인의 축제일과 그리스도의 성탄일을 오버랩시켜 기독교적 색채를 가미함으로써 이방인들이 그 축제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권위나 친화감을 그대로 물려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교묘한 문화 제국주의적 전략이다. 기독교의 복음을 유지한 채 그 민족의 풍습을 무시하지 않고 자연히 기독교의 문화가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가 태어난 날은 복음서에 기록이 없어 초기 교회에서는 성탄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동방교회에서는 1월 6일로 사용하여 왔으나 서방교회에 서는 4세기에 와서 주리안 달력으로 12월 25일이 동지(冬至, 양력 12월 22일)였기 때문에 태양 탄생일인 동지일을 예수탄생일로 정하여 동서교회가 함께 12월25일로 일치되었다.  

예수가 태어난 날은 사실 1월6일로 알려져 있었으나 335년 로마 교회는 12월 25일을 성탄절, 곧 예수의 생일로 결정함으로써 이후 기독교에서는 12월 25일을 예수가 태어난 날이라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가 태어나기 전 이 땅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지고 있던 한겨울의 축제들은 이 세상을 화평의 세상으로 건설할 메시아와 그의 날을 기리는 인간들의 마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보편적으로 메시아 상징으로 간주되었던 태양이 쇠잔해지다가 다시 그 빛을 회복하는 기간에 대대적으로 축제를 벌였던 것이다. 


이상의 본문 및 댓글 출처 : 이승훈 편역, 바이블의 진실 -성서의 모순과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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