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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1-09 20:30
기원 원년은 어떻게 정해졌는가?
 글쓴이 : 지청수
조회 : 1,302  

1. 예수가 기원 원년에 태어났다는 주장은 유세비우스의 주장에 근거를 둡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에 일어났다던 자연현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그럼 33년 경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1. 탈루스
탈루스는 1세기 로마인 혹은 사마리아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52년 이후 세권의 역사책을 썼으나 소실되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탈루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비문에 자주 언급되고 있으며 요세푸스가 "유대고대사"에서 언급한 티베리우스 황제(재임기간14-37)에게 사면받은 부자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저서는 지금 없지만 221년 기독교인인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170-240)가 그의 저서를 반박하는 자료에 의해 당초 탈루스가 적었을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역사책 제3권에서 탈루스는 이 어둠을 일식이라고 부른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불합리한 것 같다."
(이후 율리우스는 예수가 파스카 축제, 즉 만월이었을 때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보름달일 때는 일식이 일어나지 않음을 주장한다.)

당초 탈루스가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때 닥친 그 거대한 어두워짐에 대해 자연현상인 일식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1세기 역사학자인 탈루스도 기독교인들과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을 두고 일련의 논쟁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플레곤
그리스 작가 플레곤(2세기초)의 기록에 의하면 202회 올림피아드의 4년째 해 즉 A.D.33년(일부학자들에 의하면 A.D.29년) '가장 큰 일식 현상'이 발생했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하루중 6시경 즉 정오에 밤이 되어서 심지어 하늘에 별이 나타날 정도로 어두워졌다"라고 되어 있다.


https://namu.wiki/w/%EC%98%88%EC%88%98/%EC%97%AD%EC%82%AC#toc


유세비우스의 계산은 간단합니다. 우리 예수느님은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시어 33세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으니, 그 때가 니케아에서 화산이 폭발한 그 때이다!


그래서 화산폭발에서 33년을 앞으로 땡긴 그 때가 기원 원년이 된 겁니다.


여담으로 유세비우스란 사람의 악행을 하나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가  유대고대사란 책을 남겼는데, 그 책에 예수에 대한 구절이 나옵니다.


'한편 바로 이때 예수라는 지햬로운 사람 - 너무나 신기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면 -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 들일 수 있게 만드는 선생이었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의 곁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유대인의 유력 인사들의 청에 의해 그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으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하던 자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해 예언한 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뿐 아니라 그에 관해서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었다. 

그의 이름을 본따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주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유세비우스의 가필이었다는 게 밝혀집니다.-_-

유명한 역사가의 이름을 빌리기 위해 없는 내용을 삽입한 겁니다.



예수의 탄생년도에 대한 주장은 이 외에도 다양합니다.


2. 가장 대표적인 것이 BC6~BC4년 설입니다.

이 주장은 헤롯 대왕의 사망년도를 기준으로 잡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헤롯 대왕이 죽은 연도는 어떻게 아는 것일까?

여기서도 요세푸스가 나옵니다.


요세푸스가 살던 당시에는 기원전, 기원후의 개념이 없었고, 집정관 연대 산정법을 사용해서 기록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 28년에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에서는 'A와 B가 집정관이었던 해' 이런 식으로 연도를 계산했지요. 요세푸스는 이런 식으로 헤롯대왕이 기원전 40년에 로마 황제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헤롯대왕이 예루살렘을 장악한 때는 기원전 37년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헤롯대왕이 죽은 때는 왕으로 임명된 때로부터 37년, 예루살렘을 장악한 때로부터 34년이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헤롯대왕은 기원전 4년 경에 죽었고,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바로 그 전에 태어났다가 이집트로 도망을 가서 유아기를 보내고 귀국했으니, BC6~BC4년 경에 태어났다는 주장이 나오게 됩니다.


3. 그 다음은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한 주장입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누가복음 3장 1~2절


여기서 디베료 황제는 티베리우스 황제입니다. 그는 14년에 제위를 물려받았으니, 디베료 황제 15년은 28년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는 서른살 즈음에 세례를 받고,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후,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누가복음 3장 23절


이 두 기록을 합해서 BC 2년에 예수가 태어났을 거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 근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구레뇨가 시리아 장관이었던 시절에 행한 인구조사 때 예수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레뇨가 시리아 장관이 된 것은 6년 이후입니다. 이 이야기를 덧대면 위의 세 주장이 다 말이 안됩니다.ㅋㅋㅋㅋㅋㅋ


밑에서 구레뇨가 기원전에도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거라는 '추측'을 정설처럼 주장하는 댓글들이 올라왔는데, 역사적 기록을 보면 사실 무근. 구레뇨는 기원전에 실리시아(길리기아)와 갈라티아에서 열심히 전쟁 중이었습니다.



예수 어쩔... 생일도 미상인데, 생년도 미상이야...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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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bat69 18-01-09 20:52
 
태어난 날자는 고사하고
년도도 못맞추는거네요
이거 역사적인 실존인물 맞나요?
     
지청수 18-01-09 21:51
 
설마요.

세상에 정자 없이 난자 혼자 감수분열해서 남자아이가 태어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맨발로 물 위를 걸어다니며, 떡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n빵해서 수천명을 배불리 먹이고, 침을 흙과 섞어서 눈병 치료제로 만들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날개나 선녀옷도 없이 하늘로 날라가는...

그런 사람이 존재하겠습니까?
          
베이컨칩 18-01-10 00:21
 
'우연히' 빅뱅이 일어난 것을 믿으십니까?
카시니호가 우주 여행을 했다고 정말 믿으십니까?
스파이더맨이 실존한다고 믿으십니까?
               
아날로그 18-01-10 01:13
 
우리집 화단에 '요술나무' 가 한 그루 있어요....

저녁에 다 마신 빈 소주병을 메달아 놓고...다음 날이되면...
소주가 꽉 차있는 신비로운 기적이 매일 일어나고 있답니다.
베이컨칩 18-01-09 23:34
 
some이 consider 했다는 것 하나로 크게 고집하고 계시네요. unknown은 뭐 하나 증거도 없이 확증편향으로 인해 한쪽으로만 굳은 믿음을 가지고 강한 주장을 하시구요. 시리아가 당시 이인 통치 체제를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인 통치를 했을 가능성이 100% 확실해보이나 지청수님이 올리신 위키 표에는 모두 정식총독의 이름만 기술되어 있으며 구레뇨가 당시 시리아의 임시 총독이었다 라는 것을 추측케 하는 고고학적인 발견도 모두 무시하고 계시구요. 실리시아, 갈라티아는 현재 터키 지역을 말하는데 터키와 시리아는 영토가 바로 맞닿아있는 인접지역입니다.


"From 12 – 1 BC, he led a campaign against the Homonadenses, a tribe based in the mountainous region of Galatia and Cilicia, around 5 – 3 BC, probably as legate of Galatia."

즉 터키 지역에서 homonadenses라는 부족과 전쟁을 하기 위해 이 곳에 군사령관으로써 파견되었다는 뜻일 뿐입니다. 이것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와 인접하여 붙어있는 터키 지역에 군사령관으로 파견됨으로써 동시에 시리아의 임시 총독으로 부임했다는 큰 증거가 될 수 있는 아주 고마운 선물 같은 것입니다.


자 여기를 참조해봅시다.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2369233&cid=50762&categoryId=51340

"1764년 Tivoli 근처에서 무명 무제(無名無題)의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발견되었다. “legatus... iterum Syriam... obtinuit(그 사절은 다시금 시리아에 파견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사람을 Quirinus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귀리노는 그 이전에 시리아에 있었다는 견해를 뒷받침했다. W. Ramsay는 귀리노가 첫 번째 사절로 있었던 것은 그의 군사령관으로서의 일이고, Homonadenses인들과의 전쟁 수행을 위해 이곳에 왔으며, 이때 루까복음서가 말하는 호구조사령(루까 2, 2)을 내렸던 것으로 추정한다(전 8).
이 견해는 Tertullianus의 말과도 일치하는 것인데 떼르뚤리아누스는 그리스도 탄생 당시의 호구조사령은 Saturnius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였다고 했다(Adv. Marc., 4, 19). 그러므로 첫 번째 호구조사령이 내려졌을 때에는 Saturnius와 Quirinus가 다 같이 시리아에서 권력을 잡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예수님 탄생 당시 BC 6년경 Saturnius와 Quirinius가 함께 시리아에서 이인 체제로 총독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는 지청수님이 근거로 제시하신 위키피디아 기록과도 일치하구요.

 확증편향으로 굳은 결사항전을 하고 계시나 이번에도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 크게 미혹 당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자 이것도 읽어봅시다.


E Schurers 는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국세조사가 AD6년에 있었다고 기록되어있으며 예수 탄생 당시(BC6~4) 구레뇨는 수리아 총독(proconsul)이 아니었다라는 근거로 위 기록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리 바르다만이라는 고고학자는 이른바 '가는 글씨의' 글자라 불리우는 매우 작은 글씨체로 구레뇨라는 이름이 적힌 동전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그가 BC12년 부터 헤롯왕이 죽을 때(BC4년)까지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총독(governer)으로 지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governer 누가복음 2:2 헤게몬 -- 감사관, 임시총독
hJgemwvn(헤게몬): 일반적으로 헬라어에서 지도자, 지휘관, 우두머리

proconsul 사도행전 13:7 안튀파토르 -- 정식총독
ajnquvpato(안튀파토르): 지방총독 proconsul (비문들과 파피루스 문서에 종종 나옴)

 

아마도 구레뇨는 BC4년 이전에 정식 총독(proconsul)이 아닌 로마 황제의 사절로서 총독서리 혹은 감사관(governer)로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때에 누가복음 2장에 기록되어있는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AD6년 그가 정식으로 총독(proconsul)으로 임명되었을 수 있다.

 

램지(W.M. Ramsay) 박사는 비명의 기록을 조사한 결과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된 것이 두 번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구레뇨가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군사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로마 황제의 특별사절로 활동했으며, 이때 민정장관은 Sentius Saturninus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관심있게 연구한 몇 분의 학자들 역시 구레뇨가 AD6년 이전에도 수리아의 공직자의 자격으로 대리업무(governer)를 보고 있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램지 박사는  누가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governer)으로 있을 때에 첫 번째 한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첫 번째 조사와 두 번째 조사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둘째 호구조사에 관한 기록은 어디 있을까? 램지 박사는 그것을 (행5:37)에서 찾고 있다.

" 그 후 호적할 때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사도행전 5:37)

누가는 여기서 호구조사때  갈릴리 유다가 민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AD6년의 호구조사때 민란이 일어났다는 요세푸스의 기록과 일치한다.

결과적으로 AD6년의 호구조사는 구레뇨의 두 번째 호구조사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서 램지 박사는 예수께서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governer)으로 있었을 때 탄생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로마의 역사를 밝히는 기독교 백과사전에 의하면 구레뇨라는 인물은 BC12년 로마제국의 집정관이 되었으며 AD6년 수리아 지역을 총괄하는 총독이 된 것으로 나오고 있다.

 

또한 최근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된 고대 파피루스와 다른 증거들이 발견되어, 구레뇨는 2회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것이 알려졌다.

 

구레뇨는 BC12년경 로마에서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동방지역에서 특별한 임무(governer)를 감당하며 약 1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때 수리아의 총독(proconsul)은 바루스였지만 그는 로마제국의 신임을 얻지 못했으며 반란을 두려워하여 소극적으로 활동한 반면 구레뇨는 이곳에서 적극적 활동으로 인해 신임을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BC2년 바루스는 수리아 총독 직위에서 해임되고 구레뇨는 AD6년 수리아 지역의 총독(proconsul)으로 임명된 것이다.


라피스 티부르티누스로 알려지게 된 한 비문이 1764년에 로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비문에 그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퀴리니우스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라틴어 비문 전집」 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 H. 데사우 편, 베를린, 1887년, 14권, 397면, 3613호)
https://en.m.wikipedia.org/wiki/Corpus_Inscriptionum_Latinarum


지청수님은 some에 근거하셨고 저는 대부분(most of)의 학자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근거로 보아 퀴리니우스는 Saturnius, 바루스와 함께 시리아에서 이인 총독 체제였었고 그 후 바루스는 총독에서 잘리고 연이어 unknown 기간에도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을 했을 가능성 또한 아주 아주 짙기 때문에 이를 배제할 수는 없게 되겠습니다.
     
제로니모 18-01-10 07:21
 
참 질겨요.
밑에선 계속 처발리다가 죙일 연구한척 여기저기 별시덥지도않은 애들 주장 복불해서 길게 썼다만은...

이 긴 똥글은 밑에 지청수님이 말한 티부르티누스 비문에서 시리아총독으로 두번 임명된 사람이 바로
칼푸르니우스 피소라는 사실하나만으로 끝난거아닌가?
네가 여기에대한 반론을 제시하지못하면 긴똥글 의미가 없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용추가) 또 헛소리할까봐 너님은 안하는 근거 제시를 하고 가겠음

Some consider that Lucius Calpurnius Piso "the Pontifex" was here the governor of Syria. This is based on an inscription called the Lapis Tiburtinus.
혹자는 루시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대사제"가 여기의 시리아 총독이었다고 여긴다. 이것은 라피스 티부르티누스라고 불리는 비문에 근거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Roman_governors_of_Syria#cite_note-1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지청수 18-01-10 07:37
 
1.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2369233&cid=50762&categoryId=51340
1764년 Tivoli 근처에서 무명 무제(無名無題)의 다음과 같은 묘비명


2.
램지(W.M. Ramsay) 박사는 비명의 기록을 조사한 결과


3.
라피스 티부르티누스로 알려지게 된 한 비문이 1764년에 로마에서 발견되었는데

-> 1~3번은 모두 라티스 티부르티누스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것은 19세기에 이미 비명의 주인공이 퀴리니우스가 아니라, 칼푸르니우스 피소임이 밝혀짐.
역사가들은 비명의 주인공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비명 하나만으로는 역사적 근거가 빈약하다고 생각하여 정식 기제를 안하고 미상(unknown)으로 처리한 것.
(기독교인들은 라티스 티부르티누스의 비명이 퀴리니우스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때, 그것만 가지고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을 '두번'했다고 단정지은 것과 비교될 수 있는 장면. 캬~ 역시 진짜 역사가들 클라스 오지고요~)

이미 종결된 이야기를 길게 쓴 이유는 무엇인가?



4.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2369233&cid=50762&categoryId=51340
이 견해는 Tertullianus의 말과도 일치하는 것인데 떼르뚤리아누스는 그리스도 탄생 당시의 호구조사령은 Saturnius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였다고 했다(Adv. Marc., 4, 19).

떼르뚤리아누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5966&cid=43671&categoryId=43671
출생 - 사망  60년 ~ 220년
직업  기독교 연구가

고대 로마의 종교가. 카르타고 출생. 그는 처음에는 법률가였지만 뒤에 기독교 연구가로 바꾸었다. 그는 열렬한 믿음과 엄격한 도덕을 가지고 온타누스 파에 들어가 이단과 싸우고 특히 노스틱파와 맞섰다. 변증론과 말시온 배격의 글이 가장 유명한 저술이고, 그밖에 30여 종의 논문이 있다. '신약'ㆍ'삼일(三一)'이라는 말은 그가 처음 썼다. 그가 신학상에 끼친 공로는 죄악론이다. 그는 라틴 신학의 조상이며, 키폴리안의 스승ㆍ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구자였다. 《3위 1체설》ㆍ《원죄설》의 근거를 만들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2794&cid=40942&categoryId=34271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생. 문학·철학, 특히 법률에 넓은 교양을 가졌으며, 저명한 법률가로서 활약하였으나, 로마의 그리스도교 박해에서 신자의 영웅적 순교에 감동되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아내가 있었음에도 사제(司祭)가 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2678&cid=50766&categoryId=50794
서방교회의 최초의 교부, 호교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변론술과 법률학을 공부한 후에 로마로 가서 법률가로서 일했는데, 195년경 회심해서 귀국하여 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


예수와 동시대인물도 아니며, 당신이 어렸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했던 유세푸스보다 100년 더 후대 사람이고, 역사가나 고고학자가 아니라 기독교 교부, 혹은 사제.



5.
그러나 제리 바르다만이라는 고고학자는 이른바 '가는 글씨의' 글자라 불리우는 매우 작은 글씨체로 구레뇨라는 이름이 적힌 동전을 발견했는데
->
a) https://badarchaeology.wordpress.com/2012/12/29/jerry-vardamans-microletters-on-roman-coins/
본문 중간에 Rex Jusus라고 적힌 동전과 구레뇨라는 글씨에 대해 나옴.ㅋㅋㅋㅋㅋ
제리 바르다만의 주장대로라면 예수가 로마의 황제가 된 적이 있어야 하는데...
저게 구레뇨가 총독이었다는 증거라고?ㅋㅋㅋㅋㅋㅋ

b) Biblical archaeologist “Jerry” Vardaman – an unprincipled lawbreaker
성서고고학자 제리 바르드만 - 부도덕한 범법자
http://www.mythicistpapers.com/2013/08/25/vardaman-6/


c) The problem is that Jerry Vardaman is not an “eminent archaeologist.” He’s a complete and utter crackpot — described by other professionals as “insane” — who fabricated a story beyond all reasonable belief. Go ahead; click the link, or you can read my summary below.

Vardaman claims to have found coins from the Roman empire with teeny-tiny letters inscribed upon them that are otherwise invisible to the naked eye. In these ‘microletters’ — seen only by Vardaman — we find the reference to the second Quirinius (and all sorts of other crackpot claims).

Now, there are a few obvious problems with Vardaman’s claims:

1. Vardaman has never published any of his accounts in any peer-reviewed journal, or ever subjected his work on ‘microletters’ to any critical review of any kind by any other party.

2. Vardaman has never produced any of the coins that he claims contain micrographic letters! Nor has he produced, say, photo enlargements of the coins. Instead, he’s produced hand-written drawings of what he says the coins look like!

3. Comically, those drawings of coins dating back to the first century CE contain the letter ‘J’ — even though the ‘J’ was not invented for another nine centuries! This is like finding a painting said to be a Rembrandt but noticing that the subject is wearing a digital watch and eating a bag of Doritos!
https://evaluatingchristianity.wordpress.com/2009/05/28/the-case-against-lee-strobel/

d) 심지어 위키피디아에서마저도 제리바르다만은 검색이 안됨. 일명 '듣보잡'

e) 동전이란 건 유통을 위해 만든 거임. 제리 바르다만의 실존과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동전에 구레뇨의 임기와 임지가 같이 써져있지 않다면 '아이고 의미 없다.'
실제로 로마의 동전은 인도에서도 발굴됨.^^ 이 글의 논리대로라면 로마의 황제는 인도까지 점령한 적이 있다는 결론도 내릴 수 있음.

또하나 진정한 역사가들이라면 라티스 티부르티누스처럼 교차검증이 불가능한 사료는 미상으로 표시하고, 하나의 가설로 치부한 다음에 다른 자료를 찾봐야지, 여기서 제리 바르다만처럼 근거도 없는 주장만 가지고 확언을 하지 않음. 동전도 보여주지 않아, 사진도 보여주지 않아, 논문도 검증도 하지 않아... 근데 뭘 보고 확신을 할까?


6.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총독(governer)으로 지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5번의 제리 바르다만의 주장의 결론인데, 그 주장이 허무맹랑한 것은 5번에서 다뤘으니 패스.

덤으로 머리에 지식 좀 채워줄께. 잘 들어. 제정 로마는 일반인에게 총독씩이나 되는 큰 자리를 한 사람에게 일임한 적이 없음. 예외적으로 카이사르가 여러 권리를 독점하며 종국엔 종신독재관이 된 적이 있고, 이후에도 황제들이 여러 자리에 동시에 오르며 군사지휘관으로 활약한 적은 있지만, 황제마저도 총독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고(당연한 것이 황제속주의 경우, 황제가 총독의 상관, 원로원 속주는 황제가 건드릴 수 없음), 황제나 황태자를 제외하고는 고위직을 두 개 이상 독점한 인물이 없었음. 왜냐하면 카이사르가 그런식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제국의 길을 열었거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법적으로 방지한 거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단장이라는 직책 하나만으로도 제국을 뒤집을만한 권력이 있고, 실제로도 혼란기에는 군단장들이 황제를 해먹은 적도 많음.
가끔 역알못들이 집정관은 군사사령관도 겸임했다! 는 개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집정관의 임무 중 하나가 영토수호와 이민족 격퇴여서 군사령관이 집정관의 직책에 포함되는 개념. 이건 공화정부터 계속 내려오는 제도임.


7.
로마의 역사를 밝히는 기독교 백과사전에 의하면 구레뇨라는 인물은 BC12년 로마제국의 집정관이 되었으며 AD6년 수리아 지역을 총괄하는 총독이 된 것으로 나오고 있다.
-> 근거는?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5세기부터 3세기까지 시리아가 아니라 터키 지역의 총독이 된 것으로 나옴. 심지어 댁이 맨 위에 가져온 링크에서조차 터키에서 싸웠다는 부분만 있고, 기원전에 시리아 총독을 했다는 글은 없음.
또 짚고 넘어갈 것은 그 링크에서 'Gajus Caesar 황제의 고문관이 되었다'라고 나오는데, 실은 황제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황태자격인 인물이었고, 퀴리니우스에게 터키 지역에서 현장교육을 받았으나 젊어서 요절. 퀴리니우스는 뒤에 티베리우스에게 붙어서 그가 황제가 되는데 조력자가 됨.


8.
또한 최근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된 고대 파피루스와 다른 증거들이 발견되어, 구레뇨는 2회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것이 알려졌다.
-> 그 파피루스의 이름과 발견지는? 창조가학회에서 증명되 안된 거짓 자료로 구라를 어마무시하게 쳐서 공신력 있는 단체에서 인정한 근거가 아니면 믿지 않음.
대표적인 것이 창조가학회의 어머니인 론 와이어트의 '아카바만 이집트 병거 발견'
라티스 티부르티누스에서 퀴리니우스로 '추정'되는 인물이 나온 것만 가지고도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게 기독교계인데, 왜 그 파피루스에 대해서는 조용할까?



마지막으로 블로그의 글 퍼오지 마라. 쪽팔리지 않냐?
블로그가 무슨 학술적 권위가 있다고 퍼와서, 아까운 내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게 만드니?

나도 너처럼 블로그 자료 인용해볼까?

"제리 바르다만이란 저명한 고고학자가 이 점에 관해 많은 연구를 했다. 그는 소위 '가는 글씨의' 글자라고 부르는 매우 작은 글씨체로 구레뇨라는 이름이 적힌 동전을 발견했다. 이것은 그가 BC11년부터 헤롯 왕이 죽은 후까지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총독으로 지냈다는 사실을 보여주다. 구레뇨란 사람이 분명 두 명이었다는 뜻이다.
추가로 연구를 해보았을 때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었던 故 윌리엄람세이가 유사한 이론을 제안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다양한 비문을 살펴본 결과, 구레뇨라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는데 시간적으로 별도의 두 차례에 걸쳐 수리아를 통치했으며 그 기간에 더 이른 인구 조사 기간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학자들은 누가의 본문이 "이 인구 조사가 구레뇨가 수리아를 통치하기 전에 행해졌다."라고 번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 문제는 원하는 만큼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맥레이와 다른 사람들이 몇 가지 가능한 설명을 제시했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예수 출생 기간 동안 인구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사람들이 고향에 정말로 돌아가야만 했다고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리 스트로벨은 몇 명의 학자들의 주장을 예로 들며 누가복음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고 따라서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여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구레뇨가 두 명이었다, 한 명의 구레뇨가 두 번 통치를 했다. 성경을 구레뇨가 수리아를 통치하기 전에 행해졌다고 번역해야 한다하는 주장들이 모두 다를뿐더러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도 겨우 '아주 작은' 글씨로 구레뇨라고 적혀 있는 동전을 하나 발견했다는 것 뿐입니다. 누구나 하나쯤 만들어 낼 수 있는, 주먹구구식 주장입니다. 이 책 스스로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라는 모순되고 자신감 없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https://jaharangk.blog.me/80057654370





내용추가) " "안의 글을 쓴 리 스트로벨이 누군지 찾아봤더니
Lee Patrick Strobel (born January 25, 1952) is an American Christian author and a former investigative journalist
(중략)
Strobel was a teaching pastor of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 in South Barrington, Illinois, from 1987 to 2000, before shifting his focus to writing and producing his TV show.[11] He continues to speak periodically at churches and has been a board member of the Willow Creek Association. In 2007, Strobel was awarded an honorary doctoral degree by Southern Evangelical Seminary in recognition of his contributions to Christian apologetics.
https://en.wikipedia.org/wiki/Lee_Strobel

아내와 함께 일리노이 주 사우스배링턴에 있는 윌로우크릭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가 회심하고 윌로우크릭교회와 새들백교회에서 교육 담당 목사로 구도자 사역에 헌신했다. 2년 가까이 PAX TV 토론 프로그램 <페이스 언더 파이어(Faith Under Fire)>를 진행한 경험이 있으며, 2007년에는 기독교 변증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던 복음주의 신학교(Southern Evangelical Seminary)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윌로우크릭과 새들백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하며 저술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7981&cid=44546&categoryId=44546

역시나 기독교 목사.ㅋㅋㅋㅋㅋ
          
제로니모 18-01-10 09:03
 
이런 수준 애한테 넘 과잉 친절이심. 에너지낭비 ㅎ
               
지청수 18-01-10 09:46
 
https://blog.naver.com/svid/20101510824

글을 딱 보는 순간, 퍼왔다는 게 한눈에 보이더라구요.
예전에 이 주제에 대해 알아봤을 때, 봤던 글 중 하나였거든요.ㅋㅋㅋ
그래서 큰 고생 없이 쉽게쉽게 글 써내려갔습니다.
이미 아는 내용이고, 다 반박된 내용이니 어려울 것도 없지요.


그리고, 베이컨이는 지 생각도 아닌 블로그 글을 통째로 긁어왔으니 무슨 생각이란 게 있겠습니까?
지야 말로 확증편향에 빠져서 여러 반론과 역사적 증거들을 무시하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주제에

게다가 이미 19세기에 논파당한 주장을 계속 반복하는 것 자체가 이 논쟁 자체를 이해를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어디서 긁어온 글이란 게

라피스 티부르티누스로 알려지게 된 한 비문이 1764년에 로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비문에 그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퀴리니우스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라틴어 비문 전집」 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 H. 데사우 편, 베를린, 1887년, 14권, 397면, 3613호)


....1887년....

분명히 19세기에 다른 이론으로 대체됐다고 했는데, 21세기에 19세기의 글을 가져와서 주장하는 꼴이라니...
지금 뇌가 과부하 상태여서 자기가 퍼오는 글도 무슨 뜻인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될 겁니다.

참고로 칼푸르니우스 피소 말고 제3의 유력한 인물이 라피스 티부르티누스의 주인공이라는 영문 사이트들이 몇 개 보이네요. 글들을 읽어보니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베이컨칩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덕분에 새로운 자료와 지식을 쌓게 됐네요^^
                    
베이컨칩 18-01-10 12:26
 
지청수님 19세기 언제 다른 이론으로 대체됬는지 궁금합니다. 19세기는 1801년부터 1900년까지의 기간인데 저는 1887년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퀴리니우스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지청수 18-01-10 12:43
 
이젠 귀찮아서 잘 정리된 사이트 하나 던져줄테니, 알아서 이해해먹든 말든

Some have tried to appeal to a headless (and thus nameless) inscription as proving that Quirinius held the governorship of Syria twice, but the inscription neither says that, nor can it belong to Quirinius. The inscription in question is a fragment of a funeral stone discovered in Tivoli (near Rome) in 1764, and is now displayed (complete with an inventive reconstruction of the missing parts) in the Vatican Museum.[5.1] We know only that it was set up after the death of Augustus in 14 A.D., since it refers to him as "divine." The actual content of the inscription is as follows:

...KING BROUGHT INTO THE POWER OF...
AUGUSTUS AND THE ROMAN PEOPLE AND SENATE...
FOR THIS HONORED WITH TWO VICTORY CELEBRATIONS...
FOR THE SAME THING THE TRIUMPHAL DECORATION...
OBTAINED THE PROCONSULATE OF THE PROVINCE OF ASIA...
AGAIN OF THE DEIFIED AUGUSTUS SYRIA AND PH[OENICIA]...

The most obvious problem with this piece of "evidence" is that it doesn't even mention Quirinius! No one knows who this is. Numerous possible candidates have been proposed and debated, but the notion that it could be Quirinius was only supported by the wishful thinking of a few 18th and 19th century scholars (esp. Sanclemente, Mommsen, and Ramsay). But it is unlikely to be his. We know of no second defeat of a king in the career of Quirinius, though Tacitus writes his obituary in Annals 3.48, where surely such a double honor would have been mentioned, especially since a "victory celebration" was a big deal--involving several festal days of public thanksgiving at the command of the emperor. We also have no evidence that Quirinius governed Asia. Though that isn't improbable, we do know of another man, Lucius Calpurnius Piso, who did govern Asia and who defeated the kings of Thrace twice, and received at least one "victory celebration" for doing so, as well as the Triumphal Decoration, and who may also have governed Syria.[5.2] Though it cannot be proved that this is Piso's epitaph, it is clear that it would sooner belong to him than Quirinius. Thus, to ignore him and choose Quirinius would go against probability. Yet even if we lacked such a candidate as Piso, to declare this an epitaph of Quirinius is still pure speculation.

Even more importantly, this inscription does not really say that the governorship of Syria was held twice, only that a second legateship was held, and that the second post happened to be in Syria.[5.3] From what remains of the stone, it seems fairly obvious that the first post was the proconsulate of Asia. This means that even if this is the career of Quirinius, all it proves is that he was once the governor of Syria.

https://infidels.org/library/modern/richard_carrier/quirinius.html

타키투스의 기록이 피소의 일대기와 일치하며, 라피스 티부르티누스의 기록과 그의 행적이 일치함.
but, 퀴리니우스는 전혀 일치하지 않음.

연대는 내가 헷갈렸는데, 피소 지지설은 Ronald Syme이 1973년에 쓴 Roman Papers III에 근거를 둠.
                         
베이컨칩 18-01-10 13:09
 
연대는 중요치 않으며 학자들의 개인적인 책이나 논문은 많습니다.
각자 자신들이 연구한 결론으로 논쟁이 일 뿐입니다.
다른 이론으로 대체된 증거도 전혀 없구요.
확증편향은 좋지 않습니다.
                         
지청수 18-01-10 13:18
 
많으면 리스트를 나열해보라고!
피소설은 증거는 없지만, 타키투스의 '역사'와 연계하여 개연성은 충분함.
퀴리니우스는 그것마저도 없음.
                         
베이컨칩 18-01-10 13:20
 
저기 밑에 논문이랑 책 나열한 것만 네가지입니다.

https://www.google.co.kr/search?dcr=0&q=%EC%9C%8C%EB%A6%AC%EC%97%84+%EB%AF%B8%EC%B2%BC+%EB%9E%A8%EC%A7%80+%EC%A0%80%EC%84%9C&stick=H4sIAAAAAAAAAONgFuLUz9U3MEwzyctWQjC1pLKTrfST8vOz9RNLSzLyi6xA7GKF_LycSgDVxvmvNAAAAA&sa=X&ved=0ahUKEwid-qW9xszYAhXGsJQKHTkeCF4QzToIqwEoATAR&biw=1865&bih=947

좀 더 보시고 싶으시면 여기도 있습니다.
참고로 이 분은 빅토리아 메달을 수상하신 지리학에 저명하신 분입니다.
                         
지청수 18-01-10 13:24
 
책엔 니가 말한 파피루스는 언급도 안되어 있고, 저자는 일반 목사.

논문? 네 눈엔 저게 논문으로 보이냐?

https://badarchaeology.files.wordpress.com/2012/12/vardamanlecture1.pdf

Hong Kong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Interpreter : Dr. Joe P.L. Sun
Time : 10:00a.am - 12:00
Delivery of Lecture -- 1hour
Tea break -- 10 minutes
Question & Answer -- 50 minutes

Registration Fee : HK$50



세미나 안내문이 논문이냐? 응?

나머지 두개는 위에 언급했지만, 동료들과의 교차검증을 안한 찌라시일 뿐임.
검증 절차도 안 거친 논문은 가치가 없다. 대학교 학사과정이라도 밟았다면, 졸업논문 쓰면서 최소한 이 정도는 알텐데.
                         
베이컨칩 18-01-10 13:29
 
세미나용 자료이지만 그가 연구한 물증들과 방대한 설명을 보면 논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7775400
논문: 어떤 문제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 결과를 체계적으로 적은 글.
                         
지청수 18-01-10 13:39
 
이 사람, 진짜 논문이 뭔지 모르나보네.
혹시 논문심사가 뭔지는 알까...

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리 바르다만의 세 논문을 다 봐도 그가 주장한 '마이크로 레터'가 써있는 동전의 사진도 하나도 없고, 그림만 있음.
그렇다고 그가 동전을 실제로 공개했냐? 그것도 아님.
근데 뭘 믿고 논문이라고 당당히 이야기 하는 거지?

형식만 서론,본론,결론으로 나눠서 장황하게 글을 쓰고, 미주, 각주, 레퍼런스만 달면 다 논문이 되는 줄 아나?
                         
베이컨칩 18-01-10 14:38
 
지청수님께서 올리신 사이트도 결국 검증되지 않은 미완성 에쎄이에 불과합니다. 아직 연구 중이니 뭔가 알고 있는 분 있으면 연락 달라고 하네요.

If you are aware of any arguments or evidence bearing on this topic that are not addressed here, please contact me through Secular Web Feedback and I will do the necessary research and expand this essay accordingly.
                         
지청수 18-01-10 20:10
 
http://endic.naver.com/enkrIdiom.nhn?sLn=kr&idiomId=48573df685b0403daab46accb1b92882

에세이를 수필이라고만 아는 듯

그리고 칼푸르니우스 피소설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설일 뿐임. 하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가설. 가설이기 때문에 새로운 자료가 있다면 피드백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당연한 것임.

저 사이트의 글도 학술 논문은 아니니, 저 사이트에서 제시한 근거와 논리만 보면 됨.

내가 제리 바르다만의 논문을 언급한 이유는... 아마도 모르겠지?
글의 흐름을 보면 한눈에 이유를 알 수 있겠지만, 넌 아마도 모를 거야.ㅎㅎ
                         
헬로가생 18-01-10 21:14
 
"세미나용 자료이지만 그가 연구한 물증들과 방대한 설명을 보면 논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

아하하하하하하하핰ㅋㅋㅋㅋㅋ
그럼 니가 여기 갈긴 글들도 논문이겠네?
아 아니다 . 니가 연구한 게 아니지?
                         
베이컨칩 18-01-11 00:05
 
즉 지청수님이 링크거신 사이트의 글들은 검증되지 않은 미완성 에쎄이라는겁니다. 그 에쎄이가 논문인지도 불분명하구요. 은근슬쩍 expository를 붙여넣으셨으나 전혀 설득력이 없구요.
일단 논문 심사가 통과한 자료를 들고 오셔서 주장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겠지만요.
또한 가설은 가설일 뿐이지 유력한 가설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환상일 뿐입니다.
지금으로써는 확증편향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겠습니다.
          
베이컨칩 18-01-10 12:23
 
지청수님 반갑습니다.
글을 많이 올리셨네요.


1.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2369233&cid=50762&categoryId=51340
1764년 Tivoli 근처에서 무명 무제(無名無題)의 다음과 같은 묘비명

A: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네요.


2.
램지(W.M. Ramsay) 박사는 비명의 기록을 조사한 결과

A: 이것도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3.
라피스 티부르티누스로 알려지게 된 한 비문이 1764년에 로마에서 발견되었는데

-> 1~3번은 모두 라티스 티부르티누스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것은 19세기에 이미 비명의 주인공이 퀴리니우스가 아니라, 칼푸르니우스 피소임이 밝혀짐.
역사가들은 비명의 주인공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비명 하나만으로는 역사적 근거가 빈약하다고 생각하여 정식 기제를 안하고 미상(unknown)으로 처리한 것.
(기독교인들은 라티스 티부르티누스의 비명이 퀴리니우스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때, 그것만 가지고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을 '두번'했다고 단정지은 것과 비교될 수 있는 장면. 캬~ 역시 진짜 역사가들 클라스 오지고요~)

이미 종결된 이야기를 길게 쓴 이유는 무엇인가?

A: 대체 무엇이 종결되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1887년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퀴리니우스라고 인정했다고 말해드려도 그냥 넘어가시네요
some consider에 의지하는 확증편향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4.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2369233&cid=50762&categoryId=51340
이 견해는 Tertullianus의 말과도 일치하는 것인데 떼르뚤리아누스는 그리스도 탄생 당시의 호구조사령은 Saturnius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였다고 했다(Adv. Marc., 4, 19).

떼르뚤리아누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5966&cid=43671&categoryId=43671
출생 - 사망  60년 ~ 220년
직업  기독교 연구가

고대 로마의 종교가. 카르타고 출생. 그는 처음에는 법률가였지만 뒤에 기독교 연구가로 바꾸었다. 그는 열렬한 믿음과 엄격한 도덕을 가지고 온타누스 파에 들어가 이단과 싸우고 특히 노스틱파와 맞섰다. 변증론과 말시온 배격의 글이 가장 유명한 저술이고, 그밖에 30여 종의 논문이 있다. '신약'ㆍ'삼일(三一)'이라는 말은 그가 처음 썼다. 그가 신학상에 끼친 공로는 죄악론이다. 그는 라틴 신학의 조상이며, 키폴리안의 스승ㆍ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구자였다. 《3위 1체설》ㆍ《원죄설》의 근거를 만들었다.

A: 이것은 주제와 전혀 관련 없으므로 패스하겠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2794&cid=40942&categoryId=34271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생. 문학·철학, 특히 법률에 넓은 교양을 가졌으며, 저명한 법률가로서 활약하였으나, 로마의 그리스도교 박해에서 신자의 영웅적 순교에 감동되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아내가 있었음에도 사제(司祭)가 되었다.

A: 이것도 문제 없지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2678&cid=50766&categoryId=50794
서방교회의 최초의 교부, 호교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변론술과 법률학을 공부한 후에 로마로 가서 법률가로서 일했는데, 195년경 회심해서 귀국하여 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

A: 그렇습니다


예수와 동시대인물도 아니며, 당신이 어렸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했던 유세푸스보다 100년 더 후대 사람이고, 역사가나 고고학자가 아니라 기독교 교부, 혹은 사제.

A: 글을 잘 읽어보셔야죠.
"많은 학자들은 이 사람을 Quirinus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귀리노는 그 이전에 시리아에 있었다는 견해를 뒷받침했다. W. Ramsay는 귀리노가 첫 번째 사절로 있었던 것은 그의 군사령관으로서의 일이고, Homonadenses인들과의 전쟁 수행을 위해 이곳에 왔으며, 이때 루까복음서가 말하는 호구조사령(루까 2, 2)을 내렸던 것으로 추정한다(전 8)."

"이 견해는 Tertullianus의 말과도 일치하는 것인데.."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Mitchell_Ramsay

"Sir William Mitchell Ramsay, FBA (15 March 1851 – 20 April 1939) was a Scottish archaeologist and New Testament scholar."

archaeologist = 고고학자



5.
그러나 제리 바르다만이라는 고고학자는 이른바 '가는 글씨의' 글자라 불리우는 매우 작은 글씨체로 구레뇨라는 이름이 적힌 동전을 발견했는데
->
a) https://badarchaeology.wordpress.com/2012/12/29/jerry-vardamans-microletters-on-roman-coins/
본문 중간에 Rex Jusus라고 적힌 동전과 구레뇨라는 글씨에 대해 나옴.ㅋㅋㅋㅋㅋ
제리 바르다만의 주장대로라면 예수가 로마의 황제가 된 적이 있어야 하는데...
저게 구레뇨가 총독이었다는 증거라고?ㅋㅋㅋㅋㅋㅋ

A: Rex Jusus가 아니라 REX JESVS라고 적혀있습니다.
상당히 글을 성급하게 읽는 습관이 있으시나 봅니다.
"예수가 로마의 황제가 된 적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b) Biblical archaeologist “Jerry” Vardaman – an unprincipled lawbreaker
성서고고학자 제리 바르드만 - 부도덕한 범법자
http://www.mythicistpapers.com/2013/08/25/vardaman-6/


c) The problem is that Jerry Vardaman is not an “eminent archaeologist.” He’s a complete and utter crackpot — described by other professionals as “insane” — who fabricated a story beyond all reasonable belief. Go ahead; click the link, or you can read my summary below.

Vardaman claims to have found coins from the Roman empire with teeny-tiny letters inscribed upon them that are otherwise invisible to the naked eye. In these ‘microletters’ — seen only by Vardaman — we find the reference to the second Quirinius (and all sorts of other crackpot claims).

Now, there are a few obvious problems with Vardaman’s claims:

1. Vardaman has never published any of his accounts in any peer-reviewed journal, or ever subjected his work on ‘microletters’ to any critical review of any kind by any other party.

2. Vardaman has never produced any of the coins that he claims contain micrographic letters! Nor has he produced, say, photo enlargements of the coins. Instead, he’s produced hand-written drawings of what he says the coins look like!

3. Comically, those drawings of coins dating back to the first century CE contain the letter ‘J’ — even though the ‘J’ was not invented for another nine centuries! This is like finding a painting said to be a Rembrandt but noticing that the subject is wearing a digital watch and eating a bag of Doritos!
https://evaluatingchristianity.wordpress.com/2009/05/28/the-case-against-lee-strobel/



d) 심지어 위키피디아에서마저도 제리바르다만은 검색이 안됨. 일명 '듣보잡'

e) 동전이란 건 유통을 위해 만든 거임. 제리 바르다만의 실존과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동전에 구레뇨의 임기와 임지가 같이 써져있지 않다면 '아이고 의미 없다.'
실제로 로마의 동전은 인도에서도 발굴됨.^^ 이 글의 논리대로라면 로마의 황제는 인도까지 점령한 적이 있다는 결론도 내릴 수 있음.

A: 구글 사이트에서 아무거나 퍼오셔서 편협한 시각으로 보지 마시고 그가 실제로 틀렸는지 맞는지 직접 연구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제리 바르다만의 논문 드립니다.
https://badarchaeology.files.wordpress.com/2012/12/vardamanlecture1.pdf
https://badarchaeology.files.wordpress.com/2012/12/vardamanlecture2.pdf
https://badarchaeology.files.wordpress.com/2012/12/vardamanlecture3.pdf


또하나 진정한 역사가들이라면 라티스 티부르티누스처럼 교차검증이 불가능한 사료는 미상으로 표시하고, 하나의 가설로 치부한 다음에 다른 자료를 찾봐야지

A: 중요한 단서가 들어있는 라티스 티부르티누스를 하나의 가설로 치부하는 것은 광개토대왕비를 하나의 가설로 치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증거물들은 하나의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 여기서 제리 바르다만처럼 근거도 없는 주장만 가지고 확언을 하지 않음. 동전도 보여주지 않아, 사진도 보여주지 않아, 논문도 검증도 하지 않아... 근데 뭘 보고 확신을 할까?

A: 여러 학자들이 구레뇨가 총독을 두번했다고 주장하는 만큼 그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임시 총독 리스트까지 모두 기록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반쪽짜리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총독(governer)으로 지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5번의 제리 바르다만의 주장의 결론인데, 그 주장이 허무맹랑한 것은 5번에서 다뤘으니 패스.

덤으로 머리에 지식 좀 채워줄께. 잘 들어. 제정 로마는 일반인에게 총독씩이나 되는 큰 자리를 한 사람에게 일임한 적이 없음. 예외적으로 카이사르가 여러 권리를 독점하며 종국엔 종신독재관이 된 적이 있고, 이후에도 황제들이 여러 자리에 동시에 오르며 군사지휘관으로 활약한 적은 있지만, 황제마저도 총독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고(당연한 것이 황제속주의 경우, 황제가 총독의 상관, 원로원 속주는 황제가 건드릴 수 없음), 황제나 황태자를 제외하고는 고위직을 두 개 이상 독점한 인물이 없었음. 왜냐하면 카이사르가 그런식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제국의 길을 열었거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법적으로 방지한 거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단장이라는 직책 하나만으로도 제국을 뒤집을만한 권력이 있고, 실제로도 혼란기에는 군단장들이 황제를 해먹은 적도 많음.
가끔 역알못들이 집정관은 군사사령관도 겸임했다! 는 개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집정관의 임무 중 하나가 영토수호와 이민족 격퇴여서 군사령관이 집정관의 직책에 포함되는 개념. 이건 공화정부터 계속 내려오는 제도임.

A: 5번에 지청수님의 개인적인 주장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6번도 개인적으로 습득한 상식 말고는 건질게 없네요.


7.
로마의 역사를 밝히는 기독교 백과사전에 의하면 구레뇨라는 인물은 BC12년 로마제국의 집정관이 되었으며 AD6년 수리아 지역을 총괄하는 총독이 된 것으로 나오고 있다.
-> 근거는?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5세기부터 3세기까지 시리아가 아니라 터키 지역의 총독이 된 것으로 나옴. 심지어 댁이 맨 위에 가져온 링크에서조차 터키에서 싸웠다는 부분만 있고, 기원전에 시리아 총독을 했다는 글은 없음.

A: BC 12년에 로마 집정관이 되었고 그 후 전직 집정관이 되고 속주 총독으로 파견나가서 BC 5~3에 터키 지역의 총독이 된겁니다. 기원 전에 시리아 총독이 아닌 시리아에 파견된 임시 총독입니다.
"램지(W.M. Ramsay) 박사는 비명의 기록을 조사한 결과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된 것이 두 번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구레뇨가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군사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로마 황제의 특별사절로 활동했으며, 이때 민정장관은 Sentius Saturninus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관심있게 연구한 몇 분의 학자들 역시 구레뇨가 AD6년 이전에도 수리아의 공직자의 자격으로 대리업무(governer)를 보고 있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또 짚고 넘어갈 것은 그 링크에서 'Gajus Caesar 황제의 고문관이 되었다'라고 나오는데, 실은 황제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황태자격인 인물이었고, 퀴리니우스에게 터키 지역에서 현장교육을 받았으나 젊어서 요절. 퀴리니우스는 뒤에 티베리우스에게 붙어서 그가 황제가 되는데 조력자가 됨.

A: 주제와는 관련없습니다.



8.
또한 최근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된 고대 파피루스와 다른 증거들이 발견되어, 구레뇨는 2회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것이 알려졌다.
-> 그 파피루스의 이름과 발견지는? 창조가학회에서 증명되 안된 거짓 자료로 구라를 어마무시하게 쳐서 공신력 있는 단체에서 인정한 근거가 아니면 믿지 않음.
대표적인 것이 창조가학회의 어머니인 론 와이어트의 '아카바만 이집트 병거 발견'

라티스 티부르티누스에서 퀴리니우스로 '추정'되는 인물이 나온 것만 가지고도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게 기독교계인데, 왜 그 파피루스에 대해서는 조용할까?

A: 지청수님께서 Some(소수의 사람들)이 라티스 티부르티누스에서 칼푸르니우스 피소라고 추정한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3번에서 상당히 흥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파피루스의 이름과 발견지를 알고 싶으시다면 이 책을 주문하시기 바랍니다.
가격은 $6.95 입니다.
http://www.powells.com/book/halleys-bible-handbook-revised-edition-9780310257202/2-19



마지막으로 블로그의 글 퍼오지 마라. 쪽팔리지 않냐?
블로그가 무슨 학술적 권위가 있다고 퍼와서, 아까운 내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게 만드니?

A: 블로그에 SF 공상만화 스토리가 쓰여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을 담은 글이 적혀있는데 상당히 경시하시네요. 지청수님이 신뢰하시는 위키피디아 또한 지청수님의 입장에서 본다 하더라도 학술적 권위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Jesus
Jesus[e] (c. 4 BC – c. 30 / 33 AD), also referred to as Jesus of Nazareth and Jesus Christ,[f] was a Jewish preacher and religious leader.

위키피디아는 대놓고 예수님의 탄생시기를 BC 4년으로 못박고 있습니다. 학술적 권위가 지청수님 입장에서 보면 꽤 결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너처럼 블로그 자료 인용해볼까?

A: 네

"제리 바르다만이란 저명한 고고학자가 이 점에 관해 많은 연구를 했다. 그는 소위 '가는 글씨의' 글자라고 부르는 매우 작은 글씨체로 구레뇨라는 이름이 적힌 동전을 발견했다. 이것은 그가 BC11년부터 헤롯 왕이 죽은 후까지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총독으로 지냈다는 사실을 보여주다. 구레뇨란 사람이 분명 두 명이었다는 뜻이다.
추가로 연구를 해보았을 때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었던 故 윌리엄람세이가 유사한 이론을 제안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다양한 비문을 살펴본 결과, 구레뇨라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는데 시간적으로 별도의 두 차례에 걸쳐 수리아를 통치했으며 그 기간에 더 이른 인구 조사 기간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학자들은 누가의 본문이 "이 인구 조사가 구레뇨가 수리아를 통치하기 전에 행해졌다."라고 번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 문제는 원하는 만큼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맥레이와 다른 사람들이 몇 가지 가능한 설명을 제시했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예수 출생 기간 동안 인구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사람들이 고향에 정말로 돌아가야만 했다고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리 스트로벨은 몇 명의 학자들의 주장을 예로 들며 누가복음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고 따라서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여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구레뇨가 두 명이었다, 한 명의 구레뇨가 두 번 통치를 했다. 성경을 구레뇨가 수리아를 통치하기 전에 행해졌다고 번역해야 한다하는 주장들이 모두 다를뿐더러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도 겨우 '아주 작은' 글씨로 구레뇨라고 적혀 있는 동전을 하나 발견했다는 것 뿐입니다. 누구나 하나쯤 만들어 낼 수 있는, 주먹구구식 주장입니다. 이 책 스스로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라는 모순되고 자신감 없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https://jaharangk.blog.me/80057654370





내용추가) " "안의 글을 쓴 리 스트로벨이 누군지 찾아봤더니
Lee Patrick Strobel (born January 25, 1952) is an American Christian author and a former investigative journalist
(중략)
Strobel was a teaching pastor of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 in South Barrington, Illinois, from 1987 to 2000, before shifting his focus to writing and producing his TV show.[11] He continues to speak periodically at churches and has been a board member of the Willow Creek Association. In 2007, Strobel was awarded an honorary doctoral degree by Southern Evangelical Seminary in recognition of his contributions to Christian apologetics.
https://en.wikipedia.org/wiki/Lee_Strobel

아내와 함께 일리노이 주 사우스배링턴에 있는 윌로우크릭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가 회심하고 윌로우크릭교회와 새들백교회에서 교육 담당 목사로 구도자 사역에 헌신했다. 2년 가까이 PAX TV 토론 프로그램 <페이스 언더 파이어(Faith Under Fire)>를 진행한 경험이 있으며, 2007년에는 기독교 변증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던 복음주의 신학교(Southern Evangelical Seminary)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윌로우크릭과 새들백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하며 저술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7981&cid=44546&categoryId=44546

역시나 기독교 목사.ㅋㅋㅋㅋㅋ

A: "램지(W. M. Ramsay)와 같은 사람들은 비명의 기록을 조사한 결과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된 것이 두 번이었다고 주장합니다(램지의 책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가?" (Was Christ Born at Bethlehem?), "의사 누가"(Luke the Physician), "신약성서의 신빙성에 관한 최근 발견의 의미"(The Bearing of Recent Discovery on the Trustworthiness of New Testment") 참고). 램지는 A.D. 20년에 쓰여진 파피루스를 연구하여 로마의 정기적인 호구 조사가 14년마다 이집트에서 있었다는 것을 밝혀 냈습니다. 그는 A.D. 6년에 호구 조사를 한 공식 기록이 있으며, 따라서 그보다 14년 전인 B.C. 8년 경에도 호구 조사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는 헤롯이 당시에 자기 아내와 두 아들마저 죽일 정도로 나라 상황이 급박했기 때무에 호구조사가 지연되다가 B.C. 6-4경에 실시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구조사가 대개 1년(길면 2년) 정도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이 호구 조사 때에 주님께서 탄생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합니다.

  램지(Ramsey) 교수는 구레뇨가 A. D. 6년 뿐 아니라, B. C. 10년-7년 사이에도 수리아 총독으로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구레뇨가 이때에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로마 황제의 특별 사절로 활동했으며, 이때 민정장관은 Sentius Saturninus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몇 분의 다른 학자들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레뇨가 A.D. 6년 이전에도 수리아의 공직자의 자격으로 대리 업무를 보고 있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Mayor 박사는 "The Mission and Message of Jesus(p. 267)란 책에서 "비평적인 조사 결과 구레뇨가 (6년)보다 이른 시기에 수리아에서 공직을 갖고 있었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고 했으며, W. M. Calder교수도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직을 두 번 가졌던 증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터툴리안도 구레뇨의 재임기간에 (B.C. 8 - 6)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들의 주장이 옳을 경우에 이 호구 조사는(팔레스타인에서) 구레뇨가 총독직을 대행하여 로마 교황 사절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헤롯 대왕이 살아 있을 당시에 국세 조사가 시작되었고, 그 조사중에 (B.C. 4년) 헤롯이 죽었으며, B .C. 3년에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그의 재임기간 중에 호구 조사가 완성되었다고 말합니다. 램지는 구레뇨와 관계된 호구 조사가 두 번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첫 번째 조사가 B.C. 6-4년경에 있었고, 둘째 조사는 A.D. 6년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램지는 누가가 (눅 2:2)에서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첫 번째 한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첫 번째 조사와 두 번째 조사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둘째 호구 조사에 대한 기록은 어디 있을까요? 램지는 그것을 (행 5:37)에서 찾고 있습니다. 누가는 (행 5:37절)에서 호구 조사 때에 갈릴리 유다가 민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A. D. 6년의 호구조사 때에 민란이 일어났던 일과 일치합니다. 이러한 이유들을 들어 램지 교수는 예수께서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었을 때에 탄생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불과 한 세기 후에 살았던 저스틴 마터 역시 이렇게 3번이나 언급했습니다. "예수가 구레뇨가 총독으로 있을 때에 태어났다"("누가복음(1), "Luke", J. C. Ryle .p. 60)) "
               
제로니모 18-01-10 12:59
 
겨우 남 쓴 글 그대로  복불해서 끄적거린게 답변이냐? ㅋㅋㅋㅋㅋ 에라이 매너도 성의도 없는 인간아.
               
지청수 18-01-10 13:18
 
1~3.

ㅇㅇ 영문 자료를 줘도 무시하고 some, unknown 같은 지엽적인 것에 목매달고, 핵심은 보지 못하니 내가 더 이상 설명해줄 이유가 없다. 간략하게 위에 설명은 해놨으니 그걸 참고하든가, 링크를 참고하든가 하고,

https://infidels.org/library/modern/richard_carrier/quirinius.html

이 링크에 네가 원하는 답이 다 있으니 알아먹든 말든 알아서 하시오

4.
1) 유세푸스는 저명한 역사학자인데도, 나이 때문에 안믿는다며? 근데 역사학자도 아니고, 훨씬 후대 사람인 테르툴리아누스의 발언은 의심 없이 잘 믿네?^^
이중잣대 쩌는 인간아!
(물론 테르툴리아누스의 발언 자체는 역사적으로 부합하다만, 네가 그걸 검증했을까?)

2) 많은 학자들은 이 사람을 Quirinus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귀리노는 그 이전에 시리아에 있었다는 견해를 뒷받침했다. W. Ramsay는 귀리노가 첫 번째 사절로 있었던 것은 그의 군사령관으로서의 일이고, Homonadenses인들과의 전쟁 수행을 위해 이곳에 왔으며, 이때 루까복음서가 말하는 호구조사령(루까 2, 2)을 내렸던 것으로 추정한다(전 8).

->그 문장 자체가 피소 이야기 나오면서 껌같이 씹다 버려진 이야기임.

3) "Sir William Mitchell Ramsay, FBA (15 March 1851 – 20 April 1939) was a Scottish archaeologist and New Testament scholar."

-> New Testament scholar 신약학자

자고로 신학과 기타 학문은 양립할 수가 없음.
신학은 주장을 먼저 하고, 근거를 짜맞추지만, 다른 학문들은 가설을 세우고, 근거를 모아서 주장을 완성하기 때문.
종교에 눈이 먼 사람이 잘도 역사학을 하겠다.



5.
1) 제리 바르다만의 주장은 구레뇨란 이름이 적혀있으니, 그가 총독이었을 거란 주장임.
똑같은 논리로 황제 예수라고 적혀있으니, 예수가 황제였을 거란 주장도 할 수 있음.

2) 논문은 볼 필요도 없음. 왜냐? 저 동전에 J라는 알파벳들이 써져있는데, 알파벳 J는 서기 9세기에 만들어진 것임. 즉, 저 동전이 조작이거나, 후대에 가필된 것.
이것도 저 위 링크에 다 설명되어 있음.

3) 중요한 건 라티스 티부르티누스에 주어가 없다는 거지. 주어가 없어서 유추밖에 못하고, 교차검증할 수도 없기 때문에 퀴리니우스설은 기각됨. 피소설은 타키투스의 기록과 인물 설명이 거의 다 일치하기 때문에 인정받고 있음.

4) 그 여러 학자가 누구임? 그리고 기독교계에서 퀴리니우스가 2번 역임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오로지 교차검증도 안되는 라티스 티부르티누스에 의존하고 있고, 그것도 이미 깨짐.

6. 상기 설명 끝

7.
1) 램지 역시 라피스 티부르티누스를 가지고 그 주장을 했으니, 라피스 티부르티누스의 인물이 퀴리니우스란 증거도 없고, 가설도 깨져서 기각됨.

2) 퀴리니우스가 계속 소아시아에서 군사활동을 했단 증거인데, 관련이 없긴 개뿔.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결국 아르메니아 원정에서 부상당하고 죽음. 그리고 죽기 전까지 퀴리니우스가 옆에서 보좌했고. 황태자의 죽음이어서 정확한 기록인데, 뭐가 관련이 없음?

8.
1) Henry Hampton Halley (April 10, 1874 – May 23, 1965) was an American 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 minister and religious writer. He was best known as author of Halley's Bible

저자도 역사가가 아니고, 목사.
그리고 파피루스에 적혀있다는 내용과 근거는 어디?
네가 제시한 링크에서는 파피루스의 pap도 검색이 안됨.

2) 흥분한 거 맞아. 말도 안통하는 머저리 상대하느라 홧병이 도지시겠다. 예수도 널 보면 성전에서 채찍질할 때처럼 흥분하고 화를 낼 거다.


9.
1) 종교/철학 게시판 규정
2.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 이론을 잣대로 다른 특정 종교를 비방하는 정보나 링크 금지.
*팩트에 한정해 뉴스 링크나 정보는 허용(그러나 블로그 등 개인 사견 링크는 금지)

너가 가져온 블로그는 근거랍시고는 폐기된 100년 전 자료만 있고, 나머지는 다 주장뿐임.
가져오려면 공신력 있는 자료를 가져오든가.

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93912&cid=42192&categoryId=42211

첫째, 중립적인 시각이다. 위키피디아의 본문과 백과사전적인 콘텐츠는 모두 중립적인 시각을 따라야 하고 신뢰할 만한 출처에 의해 공정하고 치우침 없이 표현되어야 한다.

둘째, 확인 또는 검증 가능성이다. 위키피디아의 모든 저작물은 신뢰할 만한 출처에 의해 (인터넷이나 책의 형태로) 공표되어 있으며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독자연구(original research)의 금지다. 독자연구는 위키피디아에서 사용되는 용어로서 공개·발표되지 않은 사실, 주장, 개념, 진술 또는 이론을 의미한다.


위키피디아가 한국 위키처럼 반달리즘이 판치는 찌라시로 아나...
이러니까 평평지구니 뭐니 하는 주장만 하지.


3) 램지는 A.D. 20년에 쓰여진 파피루스를 연구하여 로마의 정기적인 호구 조사가 14년마다 이집트에서 있었다는 것을 밝혀 냈습니다.

-> 어디서 근거도 없는 개구라를.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 업적록이란 글을 써서 남겼으며, 거기서는 자기 치세 동안 총 세 차례의 인구조사가 있었음을 기록해둠.

Patriciorum numerum auxi consul quintum iussu populi et senatus. Senatum ter legi. Et in consulatu sexto censum populi conlega M. Agrippa egi. Lustrum post annum alterum et quadragensimum fec[i]. Quo lustro civium Romanorum censa sunt capita quadragiens centum millia et sexag[i]inta tria millia. ~ Tum [iteru]m consulari com imperio lustrum [s]olus feci C. Censorin[o et C.] Asinio cos. Quo lustro censa sunt civium Romanorum [capita] quadragiens centum millia et ducenta triginta tria mi[llia. Et tertiu]m consulari cum imperio lustrum conlega Tib. Cae[sare filio] m[eo feci,] Sex. Pompeio et Sex. Appuleio cos. Quo lustro ce[nsa sunt]civ[ium Ro]manorum capitum quadragiens centum mill[ia et n]onge[nta tr]iginta et septem millia. Legibus novi[s] m[e auctore l]atis m[ulta e]xempla maiorum exolescentia iam ex nostro [saecul]o red[uxi et ipse] multarum rer[um exe]mpla imitanda pos[teris tradidi.]

문장을 뗘서 구글링해봐라.

4) 그런데 그는 헤롯이 당시에 자기 아내와 두 아들마저 죽일 정도로 나라 상황이 급박했기 때무에 호구조사가 지연되다가 B.C. 6-4경에 실시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 호구조사 주체는 로마황제인데, 감히 속국 왕이 자기 맘대로 호구조사를 연기시켜?
그리고 이 사람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또' 없네?
나하고 말장난 하냐?

5) 언급한 학자들이 지지한다, 증거가 있다 하는 주장들의 근거는?
내가 이래서 블로그 퍼오지 말라는 거다.

6) 만일 이들의 주장이 옳을 경우에 이 호구 조사는(팔레스타인에서) 구레뇨가 총독직을 대행하여 로마 교황 사절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너가 써놓고도 문장이 이상하지 않냐? 로마 교황 사절?

7) 이하 문장도 근거가 전혀 없음.
베이컨칩 18-01-09 23:42
 
답글이 26개까지만 허용되서 여기에 올렸습니다 지청수님
모세의 무덤은 하나님만 아시고 예수님의 정확한 탄생연도 또한 하나님만 아십니다. 허나 여러가지 고고학적인 증거물, 비문에 쓰인 기록, 정황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탄생은 BC 6으로 추정할 수 있겠구요. BC 6년이 탄생일이라면 26+6=32가 됩니다. 즉 탄생연도를 BC6년으로 잡았을 때 다니엘의 예언으로 그리스도는 31살에 성령을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여 33살에 십자가형을 당하셨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어쨌든 믿음입니다. 모세를 믿는 자 그리스도를 믿을지어다.
이사야는 믿음으로 톱에 썰려 몸이 반쪽이 되어 순교했으며 예레미야는 믿음으로 돌로 쳐죽임 당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오직 믿음으로 담대하게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마르소 18-01-10 11:18
 
집주소 불러봐 전화번호랑
          
제로니모 18-01-10 12:57
 
졸리 패삼. . 명치로....ㅋㅋ
지청수 18-01-10 13:46
 
더 이상의 근거 제시는 불필요하기 때문에 전 이만 들어가봅니다.

세상도 감당치 못할 자를, 한 개인이 감당해보려고 한 게 큰 패착이었습니다.
그렇게 근거를 제시해서 평평지구의 허구성을 알려줘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내가 괜한 짓을 했구나...
     
베이컨칩 18-01-10 14:05
 
‘354년의 연대기 편자’(Chronographus Anni CCCLIIII)의 로마 집정관 명단에는 퀴리니우스의 이름이 기원전 12년에 해당하는 부분에 메살라의 이름과 함께 나온다. (「소(小)연대기」 Chronica Minora, T. 몸젠 편, 뮌헨, 1981년, 1권, 56면)
http://www.dmgh.de/de/fs1/object/display/bsb00000798_00025.html?sortIndex=010:010:0009:010:00:00&zoom=0.75
https://archive.org/details/chronicaminor11momm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퀴리니우스의 경력에 관하여 간단히 이렇게 기술한다. “[그는] 자치 도시인 라누비움 출신이었다. 연줄은 없었지만, 신격화된 아우구스투스 아래서 용맹한 병사이자 활동적으로 일하는 종으로서 집정관의 지위를 얻었으며, 얼마 후에는 길리기아의 변경 너머에 있는 호모나덴시안족의 요새를 함락시킴으로 승리의 훈장을 얻었다. ···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르메니아에서 지휘를 하던 기간에는 그의 고문이었다.” (「연대기」 The Annals, III, XLVIII) 퀴리니우스는 기원 21년에 사망하였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인 퀴리니우스는 온갖 행정 장관직을 두루 거쳐 집정관 지위에 올랐고 다른 면으로도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카이사르에 의해 시리아의 총독으로 시리아 사람들의 자산을 평가하도록 파견되어 시리아에 도착했다. 기사 계급의 인물인 코포니우스는 전권을 가지고 유대인을 다스리도록 그와 함께 파견되었다.”

요세푸스의 이어지는 말에 따르면, 퀴리니우스는 자신의 확대된 권한 범위에 들게 된 유대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징세를 명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매우 분개하였으며, “가울라니티스 사람인 유다”가 이끄는 반란이 시도되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유대 고대사」 Jewish Antiquities, XVIII, 1, 2, 3, 4 [i, 1])
http://penelope.uchicago.edu/josephus/ant-18.html

그러나 라피스 티부르티누스로 알려지게 된 한 비문이 1764년에 로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비문에 그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퀴리니우스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라틴어 비문 전집」 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 H. 데사우 편, 베를린, 1887년, 14권, 397면, 3613호)
http://cil.bbaw.de/cil_en/dateien/konkordanz.html

 
그 비문에는 그가 시리아로 가서 ‘두 번째’로 총독(레가투스)이 되었다는 말이 들어 있다. 안티오크에서 발견된 비문들에는 퀴리니우스의 이름이 들어 있는데, 그 비문들을 근거로 많은 역사가들은 퀴리니우스가 기원전의 기간에도 시리아의 총독이었음을 인정한다. (The Bearing of Recent Discovery on the Trustworthiness of the New Testament, W. 램지, 1979년, 285, 291면)
https://archive.org/stream/bearingofrecentd00ramsuoft/bearingofrecentd00ramsuoft_djvu.txt

이와 관련하여, 크랑퐁의 프랑스어 성서의 「신약 사전」(Dictionnaire du Nouveau Testament, 1939년판, 360면)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http://www.seuil.com/ouvrage/dictionnaire-du-nouveau-testament-xavier-leon-dufour/9782020042970

“줌트(「주해, 금석문」 Commentat. epigraph., II, 86-104; 「로마 속주 시리아에 관하여」 De Syria romana provincia, 97-98)와 몸젠(「신격 아우구스투스 업적록」 Res gestæ divi Augusti)의 학술적 조사에 의하면
http://www.thelatinlibrary.com/resgestae.html
 퀴리니우스는 두 차례 시리아 총독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많은 학자들은 퀴리니우스의 첫 번째 총독 재임 기간을 기원전 4년에서 1년 사이의 어느 기간, 아마도 기원전 3년에서 2년까지로 잡는다. 그러나 이런 연대를 산출한 그들의 방법은 근거가 확실하지 않으며, 이 경우의 실제 총독 재임 기간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요세푸스가 상세하게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두 번째 총독 임기에는 기원 6년이 포함되었다고 한다.—「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XVIII, 26 (ii, 1).
http://penelope.uchicago.edu/josephus/ant-18.html


몇몇 부분은 라틴어로 적혀 있기 때문에 직접 찾아드릴 수는 없지만 이것들도 좀 참고해 보시고
          
지청수 18-01-10 15:52
 
ㅋㅋㅋㅋ 또 남의 글 퍼왔네.

근데, 남의 글 퍼오기 전에 검토란 걸 해보는 건 어떨까?

검토하는 것도 능력이 모자라서 불가능하면, 최소한 링크라도 한번씩 들어가보기라도 하는 성의를 보여야지?

도대체 뭔 글인가? 하고 링크 들어가봤다가 빵 터짐.ㅋㅋㅋㅋ

너와는 논쟁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서, 더 이상의 강의는 안해준다.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살고 싶은 대로 살길...
               
베이컨칩 18-01-11 00:07
 
즉 한쪽으로 치우친 믿음이 지청수님의 눈을 멀게 하고 있습니다.
적혀있는 쪽수와 페이지에 찾아들어가시면 됩니다.
에스프리 18-01-10 15:32
 
이분 지구평평설 믿는분인데

뭘알아먹겠슴 ㅡㅡ 노답
     
지청수 18-01-10 20:16
 
제가 참... 왜 그랬는지 계속 후회되네요.
대화도 말이 통하는 사람하고 해야 하는데, 아까운 시간만 버리고, 도대체 뭘 한 건지...
          
베이컨칩 18-01-11 00:10
 
Unknown으로 기록된 이상 확증편향자들의 지속적인 논쟁거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가설만으로 억지주장하는 진화론과 같은 것입니다.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IwlJ&articleno=8728848

자 여기 읽어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확증편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청수님 또한 어떠한 증거도 없이 검증되지 않은 에쎄이를 보고 스스로 가장 유력한 가설이라고 마음이 한쪽으로 기우는 주장을 한다던지 어떠한 확실한 증명도 없이 카시니호의 사진이 cg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등 커다란 확증편향의 사례를 많이 보여왔습니다. 좀 스스로 내면을 성찰하고 솔직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특히 카시니호의 사진이 실물사진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속적이고 꾸준한 확증편향으로 인한 자기만의 견고한 매트릭스를 지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 저보고 확증편향에 대한 검증된 논문을 가져오라고 우기시면 할 말은 없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지청수 18-01-11 00:45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고 사세요. 쭈욱~

대화란 수준이 맞는 사람끼리 해야 하는데,
내가 잘못했네!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했어!

그리고 수준이 안맞는다는 게 여기서 또 보이는 게, 뜬금없는 논문 타령. 이 사람은 논문 이야기가 왜 나왔고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듯.

역시 말을 섞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진짜 아주 큰 잘못을 했네...
                    
베이컨칩 18-01-11 00:53
 
http://m.endic.naver.com/enkrEntry.nhn?sLn=kr&entryId=685995ad5da5454086301fed8107c132

논문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논쟁된 것 같습니다

어쨌든 누구나 확증편향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제로니모 18-01-11 02:12
 
유 로스트. 스튜핏.
                         
지청수 18-01-11 09:22
 
역시나...
예상을 빗나가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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