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종교는 종교(宗敎)가 아니라 종교(從敎)이다.
인류는 종교(宗敎)를 잃어 버렸다.
예수나 석가모니등을 따르는 것은 종(從)이지 종(宗)이 아니다.
종교의 의미가 오랜시간동안 너무나 왜곡되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였음으로
이에 종(宗)이란 무엇이고 교(敎)란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본래의 종교의 의미를 되찾아보고자 한다.
*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하늘의 명령을 일컫어 성(性)이라 한다."
(성(性)에대해서는 기존에 설명한 바가 있으니 이 글에서는 가볍게 다루고 넘어가고자 한다.)
성을 하늘의 입장에서 살피면 창조의 이유가 되고, 인간의 입장에서 살피면 존재의 이유가된다.
존재의 이유는 전제적 존재의 이유와 궁극적 존재의 이유로 나누어 살펴야 한다.
전제적 존재의 이유 또는 순리로서의 존재의 이유는
"존재하라(살아가라)"라고 하였다.
궁극적 존재의 이유 또는 역리로서의 존재의 이유는
"하늘과 하나되라" 또는 "창조주와 하나되라" 또는 "자신이 신이었음을 기억함으로서 신과 하나되라"
또는 신과 통하라 또는 성통하라 또는 견성하라 등등으로 말 할 수 있고 그것을 무엇이라 말하던 이를 이룬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
(글쓴이의 글을 꾸준히 따라오면서 읽었던 사람이라면 성이 무엇인지 어느정도 감을 잡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전제로 하여 글을 쓰고자 한다.)
*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뭇인간들이 성을 따르도록 이끄는 것을 일컫어 도라 한다."
도(道)란
뭇인간들을 이끄는 것인데
뭇인간들을 어떻게 이끄는 것인가 하면 뭇인간들이 성(性)을 따르도록 이끄는 것이다.
성이란 존재의 이유라 하였고
존재의 이유는 전제적 존재의 이유와 궁극적 존재의 이유로 나뉜다고 하였으며
전재적 존재의 이유는 "존재하라(살아가라)"라고 하였다.
계절이 봄,여름,가을,겨울로 순환하고 하루가 아침,낮,저녘,밤으로 순환하며 대기가 순환하여 바람이 불고 비가오는 등등 모든 현상들은 인간(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기위한 것이다.
인간(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게 이끔으로서 인간들이 전제적 존재의 이유를 달성할 수 있게 또는 따를 수 있게 이끌고 있는 것이 도(道)이다.
우리가 순리의 현상들에서 벗어나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오면 또는 역리로 들어오면 도(道)는 우리가 궁극적 존재의 이유를 달성할 수 있게 우리를 이끌 것이다.
우리가 가끔 "나는 무엇인가"와 같은 궁극적 의문들을 떠올리는 것은 성(性)을 따르도록 도(道)가 우리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아를 가장 좋은 것 또는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가장 좋은 것 또는 가장 완벽한 상태의 것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 도(道)이다.
*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교(敎)란 도(道)를 닦는 것이다.
도란 우리가 존재의 이유를 달성할 수 있게 이끄는 것이다.
순리로서의 도는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이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리로서의 교는 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다져나가는 것을 순리로서의 교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 학생들 등은 모두 교인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역리로서의 교(敎)이다.
역리는 궁극적 깨달음을 얻는 이치라 하였으니
이 궁극적 깨달음을 얻는 방법을 배우고 다져나가는 것이 역리로서의 교(敎)이다.
이 궁극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종(宗)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종(從)이다.
석가모니를 따르는 것도 종(從)이다.
하지만
예수나 석가모니가 따랐던 것은 종(宗)이다.
여러분은 예수나 석가모니가 행했던 대로 똑같이 할 수 없다.
여러분은 예수나 석가모니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와 같이 할 수 있는 자는 예수 밖에 없는 것이요 석가모니와 같이 할 수 있는 자는 석가모니 밖에 없다.
하지만
여러분도 예수나 석가모니와 같이 깨달음을 얻을 수는 있다.
그 방법은 예수나 석가모니가 따랐던 종(宗)을 따르는 것에 있다.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 예수나 석가모니처럼 똑같이 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깨달음을 얻는 것인가?
각자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불교는 신(神)을 경시하는 듯 하다.
불도자들은 신(神)너머의 경지를 추구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으며 이에 대하여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석가모니는 고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수행에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늘의 명령을 받고 수행을 멈췄다.
석가모니는 수행도중 인도의 최고신을 보았고 그 신은 석가모니에게 설법을 명하였다.
신과 통하는 것이 견성 또는 성통이므로 이때 석가모니는 견성을 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 하늘의 명령을 받고 바로 수행을 멈추고 대중들을 위한 설법에 임하게 된다.
불도자들이 설혹 궁극적인 경지 너머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궁극적인 경지 너머를 추궁하기 위해서는 일단 궁극적인 경지에 올라서야 한다.
궁극적인 경지를 무시하고 그 너머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는 그 종착점이 잘 못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
또한 불교는 그 시작점도 잘못 설정되어 있다.
그 시작점은 고가 아니라 존재의 이유에서 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삼일신고에서 자성구자(自性求子라 하지 않았던가
즉 자신의 성(性)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라 하지 않았던가
달을 보라는데 그 손가락만 보고있다.
달을 보기위해서는 그 손가락을 먼저 보아야 한다.
그 손가락 끝에 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손가락이 엉뚱한 방향을 가르키고 있으면 어찌되는 것인가?
그 손가락 끝을 쫒아갔는데 그 곳에 달은 없고 공허한 어둠만 있다면 어찌하여야 하는가?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가를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불도자들을 너무 몰아부쳐 미안함이 있다.
글쓴이는 그럼에도 불도자들을 존중한다.
불도자들은 수행을 전제로 하고 많은 고승들께서는 평생을 수행하시며 말년에 이르러서 그 수행의 과정과 결과를 인류에 보고하신다.
천주교의 신부님들도 금욕과 수행을 겸하시니 그분들도 고승들과 마찮가지로 존중한다.
(물론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땡중들과 신부들은 예외이다)
자 이제 이정도에서 멈추고 종(宗)에대해서 살펴보자.
종(宗)자는 마루 종(宗)자 이다.
이 마루라는 뜻은 산 정상에 있는 평평한 부분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산정상에 간혹 평평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없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종(宗)자가 산마루를 의미하는 것인가?
본디 종(宗)자는 뿌리에서 나온 본 줄기를 의미한다.
종가집이나 종손등은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조종신료들 이라고 할 때
조(祖)는 조상의 뿌리를 의미하고 종(宗)은 본 줄기를 의미한다.
태조는 뿌리이므로 조자를 태종은 뿌리에서 나온 본 줄기들중 하나이므로 종자를 붙인다.
그런데
본 줄기가 바뀔 때에는 새로운 뿌리라는 의미에서 조(祖)자를 붙여준다.
세조는 문종의 줄기가 아니므로 이정표의 의미를 가지는 새로운 뿌리이다 라는 의미로 조(祖)자를 붙여준 것이다.
이씨왕조들은 종보다는 조를 보다 높게 여겼던 것같다.
어느순간부터 조와 종의 사용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혼란스러워 졌다.
본디 조(祖)자는 태조 이성계에게만 붙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종(宗)자는 뿌리에서나온 본 줄기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뿌리에서나온 본 줄기와 산마루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수메르 문명의 피라미드인 지구라트의 꼭대기에는 제단이 있다.
종(宗)자가 산정상의 평평한 부분을 의미하는 것은 지구라트 꼭대기에 있는 제단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도 같다.
또한
종(宗)자가 뿌리에서 나온 본 줄기라는 의미를 가질 때 그 뿌리는 하늘을 의미한다.
종(宗)자가 교(敎)자와 함께 쓰일 때에는 하늘에서 직접 내려준 이치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태백산정 신단수하에서 하늘(환웅)이 직접내려준 천부삼인의 이치(천부의 이치)가 종(宗)이다.
따라서
천부의 이치를 배우고 닦아나가는 것이 본래의 종교(宗敎)의 의미이다.
수 천년전 천부의 이치가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이념에 따라 세계로 퍼져 나갔고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천부의 이치가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 변질되어 현재의 종교가 되었다.
그러하므로
현재의 종교는 종교(宗敎)라 할 수 없다.
현재의 종교는 종교(從敎)일 뿐이다.
우리민족은 오랬동안 종교(從敎)가 아닌 종교(宗敎)를 유지하여 왔다.
우리민족의 종교는 무속신앙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민족의 고유의 종교는 딱히 특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히 일제시대까지도 존재하였다.
그 종교의 신도는 선비들이다.
선비들에게서 자신들이 어떠한 종교의 신도라는 의식은 희미하였거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선비들이 신도가 되어가는 과정을 살펴보자면
선비들은 어린시절부터 학문을 배운다.
장성하면서 학문을 배우는 것을 멈추게되면 스스로 이치를 추궁한다.
때가 되면 세상에 나가아 벼슬을 하기도 하지만 때가 이르지 않으면 조용한 곳에 은둔하듯 살면서 이치를 추궁하고 자신이 깨우친 이치를 실천하면서 살아간다.
선비들은 나무아비타불을 외치거나 믿습니다를 외치지 않는다.
또한 선비들은 보시나 십일조 등을 구걸하지 않는다.
선비들은 자신의 노동력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은둔 선비들이 행하고 있는 것은 격물치지이고 격물치지를 이룬 소수의 선비들은 조용히 산속으로 들어가 행적을 감춘다.
그들이 깨우친 것은 천부의 이치요 그들이 산속으로 숨어든 것은 천부의 이치를 자신의 몸에 직접 적용시켜보기 위함이다.
그들이 닦고 따랐던 길이 진정한 종교(宗敎)이다.
최치원 선생이 그러하였고 북창 정염 선생이 그러하였다.
선생(先生)이라는 뜻도 그러하다.
앞선 삶을 살아가는 사람, 앞선 이치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서양에 기사도가 있었다면 우리민족에게는 선비정신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민족의 진정한 종교(宗敎)이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들은 신선이 되었다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