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마나식 그리고 알라야식을 얘기한다.
일반적으로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 오식(五識)이다.
안식(眼識)은 눈으로 보고 아는 것이고,
이식(耳識)은 귀로 들어 아는 것,
비식(鼻識)은 코로 냄새 맡아서 아는 것,
설식(舌識)은 혓바닥으로 맛을 봐서 아는 것,
신식(身識)은 온몸으로 느껴서 아는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는 것이 첫 번째 안식(眼識)이다. 눈으로 강력한 게 들어오면, 그것이 장애물이 되어 끊임없이 괴롭힌다.
수행을 할 때 집중을 못 하고 자꾸 딴 생각으로 빠져버린다.
오식(五識) 다음에 의식(意識)이 있고, 일곱 번째 마나식이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연결해주는 중간 고리가 마나식이다.
그리고 제8식이 인간의식의 바탕, 생명 의식의 창고 역할을 하는 알라야식이다. 그걸 장식(藏識)이라고도 하는데, 장藏이란 저장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전과정이 의식의 바다인 장식(藏識), 무의식에 전부 그대로 기록돼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수행을 하다보면 어릴 때 생각이 그대로 다 난다.
비록 어려서 말은 못해도,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문득 자연과 하나가 됐었다면, 그 때의 장면이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는다. 사진이 찍히듯 순수의식에 기록되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어릴 때 일이 모두 떠오른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첫째 사물에 대한 인식 능력을 높이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몸의 기운이 수승화강(水昇火降)의 과정을 거쳐 정화된다. 생리학적으로 우리 몸의 기능은 삼초(三焦)로 나누어진다.
폐, 심장, 머리가 상초(上焦)이고, 비위 중심의 소화기관이 중초(中焦),
방광, 신장 등 배설, 생식하는 기관이 하초(下焦)다. 즉 상초(上焦)에는 신神이 작용하고,
중초(中焦)에는 기(氣)기 작용하고,
하초(下焦)에는 내 몸이 생명활동을 하는 에너지의 근원인 정精이 자리잡고 있다.
정기신(精氣神)을 촛불에 비유하면
초는 정精에 불꽃은 기氣에 빛(광명)은 신神에 비유할 수 있다.
정기신精氣神에서 신神이 생성되는 힘의 근원이 정精이다.
인간의 정신(精神)에서 정精과 신神이 내 몸 속의 천지(天地)다.
정精은 곧 땅이요, 신神은 곧 하늘이다. 인간은 몸 속에 하늘과 땅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우리 몸의 천지 기운이 밝아지면, 사람을 바르게 보고, 사물의 내면과 본성을 보기 시작한다.
둘째, 수행을 하면 모든 생명의 본성인 신성(divinity)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마음은 체(體)와 용(用)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체體란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하는 등, 주변의 사물과 관계를 맺고 마음이 작용하기 전 단계, 근원 마음이다. 그것을 성性, 본성이라고 한다.
“야~, 그래도 걔는 바탕은 착해. 본래 마음은 그런 애가 아니야. 본성은 착해.” 이런 말에서처럼, 본성이란 ‘본래 성품’이다. 그런데 모든 생명의 본래 성품은 같은 경계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늘이나, 땅이나, 사람이나, 짐승들이나, 돌멩이나, 흙덩어리나, 흐르는 물이나, 타오르는 불이나, 저 태양과 달, 은하계 별들이나, 그 본성은 모두 똑같다는 말이다.
본성은 열려있는 우주생명 의식이다.
대우주와 완전히 하나가 돼 있는 환한 불덩어리, 광명(光明), 빛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시원하고 의식이 평온해지는 대광명의 경계다. 거기 보면 우주 만유가 다 살아 있다.
천지만물과 하나가 된 일심(一心) 경계, 그런 절대 평등의 경계, 절대 순수 의식에 돌아가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마음 닦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의 후천적인 성품 그걸 기질이라고 하든, 성격이라고 하든, 환경적인 요인 등 여러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형성된 지금의 ‘나’라는 독립된 개체가 갖고 있는 것 가운데 문제되는 것을 정화해서, 천지율려(律呂)의 조화 속에 일체를 이루는 본래의 자기 생명의 모습, 즉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불가에서는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그 다음, 하나의 개체로서 구체적인 의식활동을 하는 것,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것을 정(情, emotion)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동(動)하기 전의 본래의 근원 모습인 본성과, 구체적으로 사물에 동화되어 작용할 때의 감정 둘 다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심통성정心統性情”, 즉 “마음은 성性과 정情을 통섭한다.”고 말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불가의 유식설에서 말하는 인간의 감정활동에는 오식五識과 의식, 그 다음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해주는 통로로서 제7식 마나식, 그리고 내 생명 의식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은 바탕인 장식藏識, 알라야식이 있다.
나무로 얘기하면, 잔가지들이 오식(안이비설신)이고, 잔가지들 아래로 뻗은 줄기가 의식, 의식의 줄기와 뿌리를 연결하는 가운데 큰 줄기가 마나식, 그 다음 뿌리가 알라야식이다.
뿌리에서 모든 게 뻗어나가는 것처럼, 인간의 말이나 행동, 습관들은 그 사람이 과거에 행해 온 모든 것이 바탕이 되어, 저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닦으려면 실제로 수행을 통해 내 몸 자체를 정화해서 의식의 경계를 넓혀야 하는 것이다.
수행하려고 눈을 감으면,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안식(眼識)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또 몇 미터 이상만 떨어져 있어도 소리를 듣지 못한다.
냄새도 일정한 거리 이상이 되면 맡지 못한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몸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수승화강(水昇火降)이 되면서, 내 몸의 혼탁한 음양 기운이 순수음양으로 정화된다. 그렇게 되면, 눈을 감아도 다른차원의 경계가 환히 보인다.
또 깊은 밤 수행을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귀에서 뚝 소리가 난다.
귓밥이 스스로 파헤쳐져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주 먼 곳에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산에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춤추면서 자기들끼리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내 의식의 경계가 천지의 대광명, 대생명과 하나가 되어, 내 생명이 온 천지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체득하게 되는 경계가 있다.
정신이 확 깨져서 수행을 잘 하면, 어느 순간 내 몸이 없어진다.
내 몸뚱아리가 온 우주 생명 자체라는 열려있는 의식의 경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첫 경험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수행을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