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는 대승불교이다.
이 대승이라는 말 자체에 구원사상이 들어가있다.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이 얻은 깨달음으로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중생들을 구원하겠다는 것이다.
얼핏들으면 매우 훌륭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서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불제자들은 불교에 입문 하게 되면서 이 구원사상이 마음 깊은곳에 자리하게 되는데 이것이 문제이다.
불제자들과 중생과의 관계가 가르침을 주는 존재와 가르침을 받아야하는 존재로 나뉘게 된다.
이 명예욕이 마음깊은곳에 자리하고 있는한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은이가 나올수가 없다.
불제자들이 아무리 겸손하다 하더라도 구조적으로 이 구원사상이 스며들 수 밖에 없다.
예수나 석가모니 같은 경우는 시대적 소명을 받은 특별한 경우이다.
예수나 석가모니는 궁극적 깨달음을 얻기위해 수행에 든 사람들이지 교주가 되기위해서 수행에 든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분들이 궁극적 깨달음을 코 앞에 두고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설교니 설법이니 같은 것을 하게된 것일까?
하늘의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와 예수는 지혜를 얻은 사람이지 신과 하나됨을 이룬 사람들은 아니다.
지(知)자이지 각(覺)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혜를 얻으면 반드시 신과 하나되는 과정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격물치지라는 열차에 오르게 되면
그 열차가 직행열차이든 순환열차이든 급행열차이든 완행열차이든 그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한다.
예수나 석가모니도 마찮가지이다.
이치상 지혜를 얻고서 궁극적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데
지혜를 얻은 예수나 석가모니가 중간에 길을 바꿔 세상으로 나온 것은 그들에게 시대적 소명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만 지혜를 얻은이가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것인데
한국불교에서는 세상에 나와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을 먼저 상정하고 수행을 하니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수행이라는 것도 그렇다.
일반인들이 회사생활하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 말다툼을 하는 것, 등등 삶 자체가 모두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수행이라 한다면 궁극적인 수행을 말한다.
이 궁극적인 수행은 지혜를 얻은 후 마지막 순간에만 필요하다.
지혜를 얻기까지 또는 격물치지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수행이라 한다면 일반인들의 삶 자체를 수행이라 하듯이 이것도 수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가 말하는 수행이라는 것은 궁극적인 수행
즉 자신의 모든 것은 걸고 하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수행은 지혜를 얻은 후 가장 마지막 순간에만 적용된다.
지혜를 얻은 웅녀가 태백산정 신단수하로 나아가 환웅과 하나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 그것을 궁극적 수행이라 한다.
불제자들이 불문에 입문한 목적은 무엇일런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불가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석가모니 역시 자신의 제자들이 오랜 세월 흐르는 동안 왜곡되어진 자신의 말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을 원하지 않겠는가?
청줄어람한다면 스승은 당연히 기뻐하지 않겠는가?
불교를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마음깊은 곳에 스며들어 있는 명예욕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야만 불가에서도 깨달은이가 나올수 있다.
한국 불교는 이 구원사상에서 우선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하여 동남아의 소승불교가 옳다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아무리 명상의 기술을 발굴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기술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