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불자가 생각하는 무아는
무아라고 집착하는 자에게는 진아가 있습니다.
고정불변하는 자아가 없다는 자에게는
자아는 영속하는 자아로 존재합니다.
방안에 공기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을뿐이지 방안에 공기가 존재 하지 않는게 아닙니다.
그게 참 무아입니다.
내가 없는게 무아가 아니고,
나는 존재하지만, 내가 아닌 공기같은 존재가
참 무아입니다.
나는 나지만 나 아닌 여래같은 존재로서의 나
진아, 무아, 참나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어렵다는것입니다.
윤회라고 집착하는 자에게는 윤회는 없습니다.
사실 윤회한다고 믿을뿐이지 실제로 윤회 하지 않습니다.
윤회 같이 보일뿐이지 윤회 하지 않습니다.
여래가 죽은후에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서까래 기둥까지 다 부수고, 깨달음을 얻어다고 해 놓구선
오도송까지 줄줄이 외우구선
윤회를 끊어다면서 모를수가 있습니까?
깨달음과 윤회를 동시에 증명할수 있는 기회데
오히려 모른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천상계에 존재 한다든지...
이런말 조차도 안합니다.
윤회를 끊어다면 말하는게 이치에 맞습니다.
말을 안할거면 윤회를 끊어다는 말을 안해야 맞지요.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은 없다는것입니다.
무아와 윤회를 동시에 주장하게 되면
물 없는 물레방아가 되는 것이며,
공기 없는 바람하고 똑같습니다.
물이 없는데 물레방아가 있을수 있습니까?
설령 있다 한들 의미가 있겠습니까?
공기도 없는데 바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없으면 내 공과사도 없어져야 합니다.
내가 없다면서 왜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축생이
내 공와 사를 받어야합니까? 이거 자체도 모순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공과사를 말할때는
내가 없다고 했놓고선 또 나를 끄집어냅니다.
무아라고 하면서 필요할때만 나를 끄집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