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정신적으로 나약해지거나, 원하는 목적에 도달치 못할 때
노산님 말씀대로 종종 신을 찾았죠.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이것이 딱히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반증은 절대 아닙니다.
일단은, 불특정하고 막연한 조력자를 찾는다가 더 정확한 표현임.
그 조력자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월자일 수, 대자연일 수도
있고, 하물며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간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러한 인간의 행동양식은 미개하거나 원시적인 사회에서
더 보여지는 습성의 하나이기도 하죠. 토테미즘, 샤머니즘 같은..
인간이 영생을 하도록 창조되었단 주장에 대한 근거도 없을진데
또 "그 부류"들 특징인 과정, 근거 없는 주장하기 시전을 하시네.
왜 항상 과정 없이 도출된 결론이나 주장을 전제로 깔고 주창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오해 없도록 "성경에 의하면" 이나,
"성경을 근거로" 라는 전제라도 좀 붙여주셨으면 합니다.
세기마다 수많은 종교가 탄생되는 부분만 언급하시고,
그 종교들의 쇠퇴나 몰락에 대해선 왜 말씀 안하시죠?
그 수많은 종교들 중 상당수가 완전히 몰락을 한 사례는 그럼 뭐,
노산님 문법을 그대로 인용하면 신이 없다는 반증인가요?
내 종교만이 진리고 사실이란 그 오만함과 배타성을 보이면서도
소통하고, 사랑하고, 이해하는 인류 보편적 선 을 지향한다 감히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향해 말할 자격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대로부터 인간들은 영생을 갈구하고 염원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욕망이 종교로 귀결되진 않았어요.
때로는 종교로 나타났고, 때로는 그저 열망에서 멈췄고,
때로는 학살로, 과학의 발달로 이어지기도 했었습니다.
노산님 말씀처럼 종교라는 단 하나의 결말로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자꾸 이 부분에서 억지를 쓰지는 마세요.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바로 사람의 욕망이다.
인간이 나고, 지는 삶에 대한 고찰을 하는 것도 신이 있단
반증이다. 라는 주장은 대단히 허무맹랑한 주장이십니다.
다시 말해, 노산님이 지금 주장하는 모든 것이 죄다 이래요.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를 이미 결론짓고서 모든 현상을
억지로 대입해 완성하는 사후정당화 오류에 가까운 주장임.
그런식이면 세상 모든 현상들에 정반대의 주장에 끼워 맞출
수도 있습니다.
신이 없다는 증거. 이 결론으로 제가 노산님이 하신 것처럼
그대로 문장을 짜 맞춰 볼까요? 아주 흡사히게 나올 것 같지
않으세요??
그리고 사용하셨던 그 "예증" 이라는 이 단어의 뜻 자체도
"어떤 사실에 대하여 실례를 들어 증명하다" 란 뜻입니다.
실례를 드신 것은 맞지만, 사실에 대해 증명 하셨다곤 못 할
상황이 명백한데 자꾸 단어의 뜻을 오남용 하지 말아주세요.
고아들이 자신의 뿌리인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궁금해 하는
일련의 현상들은 다양한 감정과 궁금증들의 집합체인것이지
이것 또한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그 어떤 증거도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밝히고 있다" 는 근거를 기입하신 건 고무적이네요.
네. 앞으로도 그렇게 정확한 출처를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
허나, 성경 속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내에서만 통용되는
진리일 뿐인고로, 객관적 사실이나 증거로는 불충분 하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고, 때때로 몇몇 신학자와 목사님들도 언급한 적
있습니다. 물론 직설적으로 말씀하진 않았지만 말이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정교한 물건들은 다 인간들의 작품이죠.
스위스의 시계 속에 들어가는 정밀한 부품들의 숫자와 크기가
얼마나 세밀한지 아세요? 그것들을 죄다 신이 만들었습니까??
인용하신, 이웃이 가는 길의 끝에 낭떠러지가 있다는 걸 알고
도움을 위한다고는 하시지만, 이 논리는 보험설계사들이 항상
펼치는 그것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보험은 앞으로 "일어날 지도 모를 일" 에 대한 대비일 뿐이지,
"무조건 일어나는 일" 에 대한 방비가 아닙니다.
노산님도 이 부분은 분명히 알고 계실텐데 말이죠.
자꾸 왜곡해서 민심을 호도하지는 맙시다. 이건 진짜 아닙니다.
거리의 "예수천국 불신지옥" 의 개차반 짓거리와 뭐가 다릅니까?
이웃의 행보 앞에 낭떠러지만이 존재한다는 건 어떤 근거로써
결론내린 것이며,
이웃이 설사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 하여도, 그 길이 외길인지
다른 길. 즉, 다른 방도가 있는지는 왜 고려하지 않는 것이며,
구원을 왜 진리로 포장하시는지, 필멸의 존재에게 자꾸 영생을
담보지어 속삭이시는지, 타협 여부를 왜 노산님이 결정지으시는지..
이 모든 것들을 종합 해 보면, 결국 기독교는 오만한 배타심으로
민심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참된 진실과 거짓된 진리를 구분하는 척도를 함부러 결정짓지 마세요.
정확한 방법론의 제시를 위한 명확한 근거도 없으면 말입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건..
개인적으로, 생명의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지금 이 모든 길 자체가 바로 삶인 것이요, 생명 그 자체인거죠.
이건 제 사견임.
부모없이 자란 고아들은 살기가 막막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근근히 삶을 이어 나갔을테지요.
그러면서도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외톨이로 왕따 당하지 않고 뒤쳐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열심히 살았겠지요.
너무나도 힘들었던 그 삶이 눈에 선 합니다.
이분들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 모두가 어떤 사고로 돌아가시고 남겨진 고아들은
얼마나 부모님이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이라면 또 다르겠지요.
한 평생을 부모를 원망하며 이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목숨이 위태로운 아주 힘든 상황해 직면했을 때,
내 목숨을 살려줄 기적을 일으킬 어떤 신령스러운 존재를 찾게 되는 것은 이해는 합니다만,
동양과 중동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동양에서는 나 혹은 내 조상이 남에게 덕을 베푼 적이, 혹은 선을 쌓은 적이 있느냐에 따라서
자연의 인과 법칙에 따라 나의 위급한 상황을 피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데 반해
중동에서는
"이 세상을 창조한 이가 있는데, 이 존재는 내가 믿어야만 내 목숨을 살려준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 만큼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다고 확신한 어느 목사가
사자 우리에 들어가 사자들을 계도하다 사자에 물려 죽은 이런 실제 상황은 어찌 해석하려고
"믿으면 목숨을 살려주마"를 말하고 있습니까?
나의 앞날, 내 자손들의 앞날이 걱정된다면, 알라나, 예수나, 무당을 믿을 게 아니라,
남에게 덕(德)을 베풀고 스스로 선(善)을 쌓아야 합니다.
그게 사람이 이 사회에서 서로서로 잘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명심보감의 귀절,
積善之家(적선지가)에는 必有餘慶(필유여경)이요,
積惡之家(적악지가)에는 必有餘殃(필유여앙)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