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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2-13 10:41
삼신불과 삼위일체와 힌두 / 1
 글쓴이 : 러키가이
조회 : 1,172  


김상일(한신대학교 철학과)


제 I 부  三神과 三身의 관계
1. 힌두이즘과 불교의 ‘인격’과 ‘비인격’의 문제
A. 인도 전통속의 삼신설의 유래
힌두이즘의 삼신과 불교의 삼신

니르구나 브라흐만과 사구나 브라흐만
동양의 역에서는 음 가운데도 음양이 있고, 양 가운데도 음양이 있는 것을 ‘양단(兩端)’이라고 한다. 이런 양단현상을 현대과학은 ‘프랙탈’이라고 한다. 최근 브리기스와 피트는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사고 속에서도 이런 프랙탈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다(Briggs and Peat, 1999, 참고). 신관에서 ‘인격’과 ‘비인격’의 문제를 거론할 때도 이런 양단현상을 고려하지 않고는 올바르게 이해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인격과 비인격을 엄격하게 나누는 양단(兩斷)의 기준이란 없기 때문이다. ‘양단적(兩斷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형 논리의 특징이며, ‘양단적(兩端的)’으로 생각하는 것이 에형 논리의 특징이다. 包含이란 바로 일종의 프랙탈 현상이다.
우랄 산맥을 중심으로 서쪽 유럽 백인들은 인격 신관적이고 동쪽 몽골리언들은 비인격 신관적이다. 서쪽의 서양의 경우를 동서로 나누어 보았을 때 서방 기독교인 천주교와 개신교는 모두 인격 신관적이고, 동방 기독교인 그리스 정교회는 비인격 신관적인 데 가깝다. 동양의 경우 역시 이러한 신관의 양단현상이 나타나기는 마찬가지이다. 인도가 인격 신관적이라면 동북아시아 일대는 비인격 신관적이다. 같은 인도에서도 역시 힌두이즘은 인격 신관적인 반면, 불교는 비인격 신관적이다. 동북아시아의 경우 유교는 인격 신관적이지만 도가는 비인격 신관적이다. 이러한 양단-프랙탈 현상은 카오스 이론으로 볼 때 차라리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현대과학에 무지한 일부 종교학자들은 인격과 비인격을 兩斷的으로 나누어 보려고 한다. 불교의 경우도 인격신적 특징이 있는가 하면 비인격신적 특징도 있다. 기독교의 경우도 인격적 ‘God’에 대해 비인격적 ‘Godhead’가 교회 형성 초기부터 있어 왔다.
이러한 兩端的 특징을 兩斷的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의 제도‧교육‧교리 들이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을 버리도록 한다. 종교 사이의 갈등이 궁극적으로 인격과 비인격 사이의 갈등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는 종교전쟁으로까지 발전하고 이단시비로까지 확대되기도 한다. 스리랑카에서 힌두 타밀족과 불교 싱갈리족 사이에 30년 동안 있었던 전쟁 역시 이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중세기 기독교의 오랜 이단 시비의 기준도 바로 이에서 연원한다.
그러나 우리 뇌의 특징으로 볼 때 좌뇌는 인격 신관적 그리고 우뇌는 비인격 신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서구지향적 교육이 우뇌를 불구자로 만들고 있는 한 이 둘의 갈등은 더욱 지속될 것이다. 좌우뇌의 균열은 교육에 의한 인위적인 것이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뇌의 교량을 통한 좌우뇌의 균형 있는 교육은 앞으로 우리의 신관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즉 좌우뇌가 어우러진 인격과 비인격적 신관이 兩端的이 되는 신이 도래할 것이다. 뇌 연구 학자들에 따르면 좌우뇌가 남성의 경우는 兩斷的이고 여성은 兩端的이라고 한다(Northrup, 1998, 116). 이때 동학의 신관이 갖는 의미가 재조명될 것이다. 앞으로 미래의 주인공이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관의 프랙탈 현상 때문에 종교 사이에는 서로 수용할 때 인격적인 것끼리 상호 보충하고 비인격적인 요소들끼리도 서로 그러하다. 예를 들어 기독교와 불교가 대화한다고 할 때 기독교 안의 비인격적 요소와 불교의 그것 사이에 대화를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는 비인격적 요소들을 제거했기 때문에 불교와의 대화에 제약을 받게 된다. 여기서 영지주의 같은 잃어버린 기독교의 복원이 필요하다. 수운이 동학과 서학은 운이 같다고 할 때 그 말의 의미는 바로 인격 신관적인 요소를 양자가 같이 지니고 있다는 말과 같다.
인도에서 아리안들은 인도-유럽 혈통의 계승자들로서 준실체론적(semisubstantial) 신관과 인격신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안들은 베다 시대(1500~1000 B.C.E.) 이래 자연신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M. 뮐러가 말한 대로 그들은 다신교적인 자연신관→교체신교→유일신교→범신론으로 신관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켰다. 뮐러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힌두이즘의 신관이 인격과 비인격이 되먹힘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힌두이즘이 범신론과 초월적 유일신론을 매개시키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도에는 태양신‧바람신‧우레신 같은 자연신들 이외에 우주 신들이《리그베다》에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우주신들은 해나 달 같은 자연의 일부분을 의인화한 것이 아니라 전 우주 자체를 의인화한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같이 전 우주적 성격을 지닌 실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인도-유럽 인종의 특기라 할 수 있다(비트삭시스, 1990, 서문). 베다 시대의 비슈누(Vishnu) 신이 이러한 우주신이다.
힌두이즘은 이렇게 인격신과 비인격신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자기들의 신관을 만든다. 에형 논리에서와 같이 비슈누는 우주 자체가 그의 몸이지만 동시에 그는 아형 논리에서와 같이 우주를 초월한다. 그는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한다. 그의 몸인 우주를 세 걸음으로 뛰어넘는다. 그는 안에 있고 동시에 밖에 있다. 비슈누는 브라흐만 시대(1000~750 B.C.E)에 들어와 브라흐만(大범천신), 시바(大자재신)와 함께 삼신 가운데 하나로 등장한다. 그리고 불교는 이 비슈누 신이 붓다로 변해 지상에 내려왔다고 했다. 이렇게 비슈누 하나만 하더라도 하늘과 땅 사이를 왕복‘하는’ 신으로서, 비인격에서 인격으로 다시 비인격으로 맴돌이하는 프랙탈 현상을 보인다. 천지왕복하는 사이에 종교가 바뀌기도 한다. 모세가 신을 하늘에 올려 놓은 것이 유대교이고, 다시 땅으로 내리면 기독교의 신이 된다. 여기서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다만 천지왕복 “‘하는’님(Lord Doing)”이 있을 뿐이다. 프랙탈 현상이 ‘하는님’을 만들어 간다. 천지왕복의 맴돌이에 도움이 된다면 어느 종교의 신관이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지금 기독교 신은 하늘에 매여 땅에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땅으로 내려 맴돌이를 하기 위해서는 땅의 어미니신을 믿는 원주민 인디언들의 종교에서 그 도움을 받아야 한다(Kjos, 1984, 94~110). 그런 점에서 인도에서는 이러한 신의 맴돌이 현상이 활발했다.
힌두이즘의 하늘에 있던 비슈누가 불교에서는 땅에 나타나 붓다가 된다. 현대 영국의 종교철학자 J. 히크는 기독교의 극단적인 인격 신관과 불교의 극단적인 비인격적 신관의 양쪽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것이 힌두이즘이기 때문에 힌두이즘을 통해 종교간의 대화를 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주장은 한국의 동학이야말로 히크의 주장과는 달리 그가 주장하는 양면성을 이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종교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운이 주문 21자 속에 만권시서 다 들어 있다고 할 때 이 말은 바로 동학이 지니고 있는 인격성 및 비인격성을 동시에 모두 구비하고 있는 특징 때문이라고 보고 싶다. 동학의 신관이 그러한 이유는 신의 천지왕복 맴돌이의 ‘강도(intensity)’가 높기 때문이다. 고등종교의 기준은 다름 아닌 맴돌이의 빈도와 왕복 횟수에 달려 있다.
힌두이즘은 ‘존재’와 ‘존재자체’의 문제를 놓고 이들을 두 개의 별개의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같은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불이론자(不二論者, Advaita)’와 ‘이론자(二論者, Dvaita)’로 나뉜다. 불이론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샹카라(Sankara)이다. 서양의 유신론에서와 같이 절대자를 객관화하여 그것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을 때 이를 ‘신’ 또는 이러한 신의 속성을 가진 브라흐만을 ‘사구나 브라흐만(Saguna Brahaman)’이라 하고, 그에 대해 아무런 속성도 없는 브라흐만을 ‘니르구나 브라흐만(Nirguna Brahman)’이라고 한다. 사구나 브라흐만은 소유권을 가진 개념이고 니르구나 브라흐만은 존재자체와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샹카라는 아무런 속성도 없는 존재자체와 같은 브라흐만을 ‘파라브라흐만(parabrahman)’이라고도 했고, 속성을 가지고 현상세계에 나타나는 브라흐만을 ‘아파라브라흐만(aparabrahman)’이라고도 했다.
파라브라흐만은 어떤 형상(akara)도 속성(guna)이나 제한(upadh)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엄격히 말해서 우리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존재이다.《우파니샤드》에서와 같이 ‘무엇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라(neti neti)’라는 부정적인 표현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이다. 단지 명상을 통한 순수 ‘존재(sat)’와 순수 ‘식(cit)’으로만 체험될 수 있을 뿐이다(길희성, 1984, 205).
파라브라흐만 같은 것을 틸리히는 ‘존재자체’라고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작용 자체만 있고 아무런 속성도 없는, 형상도 속성도 제한도 없는 존재를 그저 존재자체라고 표현하는 길밖에 그 순수성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순수한 동사 ‘하’의 작용뿐이다. 수운은 이러한 수수한 존재를 ‘무형이유적’이라고 했다. 흔적은 있으나 아무런 형태가 없다는 뜻이다.
거듭 말해 화이트헤드는 존재를 ‘존재의 범주’로 분류하고, 존재자체를 ‘궁극성의 범주’로 분류했던 것이다. 종래의 철학이 이 둘을 모두 존재의 범주로 분류한 것과는 다르다. 화이트헤드에게 존재는 ‘God’이며 존재자체는 ‘Creativity’이다. God와 Creativity를 완전히 다른 범주로 나누어 달리 분류했던 것이다. 존재자체를 존재와 같은 범주 속에 넣을 수 없을 만큼 그 성격이 다르다는 뜻이다. 필자는 두 범주에 적용되는 논리형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존재는 아형 논리의 지배를, 그리고 존재자체는 에형 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논리 구분을 몰랐기 때문에 전통철학은 잘못을 범했다.
샹카라의 경우 니르구나 브라흐만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틸리히도 황홀한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후대 불교에 와서 니르구나 브라흐만은 ‘무’나 ‘공’ 같은 개념으로 변한다. 그러나 샹카라는 니르구나 브라흐만은 아무런 속성이 없다 하고는 그것을 순수의식‧지식‧축복 또는 기쁨이라고 했다. 그만큼 아무런 속성이 없는 존재자체는 어떤 속성을 부여받으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수운의 ‘지기’도 ‘금지’로 구체화하려 한다.〈본주문〉의 두 번째 글자 ‘今至’가 이를 의미한다. 노자는《도덕경》제1장에서 ‘유욕(有欲)’과 ‘무욕(無欲)’이라 했다. 존재자체가 존재를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수운은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願爲大降)” 다시 지금 막 지기가 이른다고 했다.
힌두이즘에서는 브라흐만이 아트만이 되어 양자가 일체가 되는 것을 “내가 그것이다(That thou art, tad tram asi)”라고 했다. 원래 이 말은 챤도가《우파니샤드》에 처음으로 나오는 말이다. “전체가 부분이 되고 부분이 전체가 되는” 홀론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모든 종교는 깨달음의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 슈라이엘마허는 이를 ‘영성(spirituality)’이라는 감성에 의존해 실현하려고 했다. 이를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했으며 수운은 이와 비슷하게 “간절히 원하는 바[願爲]”라고 했다. 나중에는 ‘성경(誠敬)’이 된다.
동학사상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향벽(向壁)’과 ‘향아(向我)’의 문제이다. 예배의 대상이 객관적 초월의 대상이냐, 아니면 자기 자신이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가 모든 종교 일반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토론의 주제가 된다. 향벽의 문제와 향아의 문제가 결국 존재와 존재자체의 문제로 귀착된다. 왜냐하면 향벽은 객관적 실체로서 속성 있는 존재를 벽을 향해 모셔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자체는 주객의 구별이 없어진 상태인 ‘인내천’이기 때문에 결국 향아적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향벽과 향아의 문제는 존재와 존재자체의 문제와 같아진다. 존재자체를 ‘영성’과 ‘황홀한 이성’ 등에 연관시키는 이유도 모두 주객의 구별이 없어진 신비적 상태이며, 그것은 논리적으로 역설적이기 때문에 합리적 사고로는 이해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동학의 종교적 문제성을 인도의 전통을 통해 견주어 알아보았다. 이를 다시 불교를 통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의 소유권과 존재권의 문제
붓다 자신은 인격신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도 입을 다문 것과 그 의도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이런 따위의 질문은 쓸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붓다는 철저한 논리가의 입장에서 이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모두 무한퇴행이라는 악순환에 빠질 것을 불을 보듯이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신 존재 증명이란 것 자체가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아형 논리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존재하려는 사람 자신이 바로 증명의 대상이기 때문이라는 에형 논리를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불멸 후 소승 부파불교는 ‘부처님 절대신앙’을 강조했다. 경전 가운데 자타카(Jataka) 계통의 문헌은 붓다 인격의 영원성을 입증하려 했고, 아바다나(Avadana) 계통의 문헌 역시 그의 초월성‧위대성‧영원성을 부각시켜 그를 절대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대승불교 경전인 『금강경』제 5분 ‘여리실견분 (如理實見分)’은 “진리대로 참 모습을 본라”는 뜻이다. 화엄불교에서는 진리자체를 ‘이(理)’라 하고 그것이 현실적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사(事)’라 한다. 전자를 자체권 후자를 소유권이라 해도 좋다. 그래서 금강경 5분의 말은 진리자체를 있는 그대로 ‘여실히(實)’ 보라는 뜻이다. 진리자체를 있는 그대로 그 실상을 그대로 보라는 뜻이 5분의 근본 취지이다. 김용옥이 정확하게 지적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로 불교의 삼신설은 금강경의 5분에서 그 빌미가 잡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김용옥, 1999, 194). 
그러면서 김용옥은 이러한 불교의 삼신설을 기독교에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 존재 방식을 이해하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는 데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의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전자는 존재의 소유권 그리고 후자는 자체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색신을 ‘역사적 부다 Historical Buddha' 혹은 기독교의 ’역사적 예수 Historical Jesus), 그리고 ‘법신’을 ‘영적원리로서의 부다 Buddha as Spiritual Principle' 혹은 기독교의 ’신앙의 예수 Jesus of Faith'라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적 붓다나 역사적 예수는 모두 色身을 이름이요, 정신적 원리로서의 붓다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는 모두 이 法身을 가리킨 것이다”(같은책, 196)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용옥의 잘못된 판단은 그가 ‘God'와 ’Godhead'의 개념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가 ‘신앙의 예수’는 법신적 개념이 아니고 색신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가 잘 지적한 대로 대숭불교 중기인 4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법신과 색신의 두 개념 밖에는 없었다. 그 이후 색신 개념이 분화되어 응신이나 중생의 교회를 위해 형태를 수시로 변해 나타나는 ‘化身’이나 ‘應身’같은 개념이 파생되었다. 그리고 색신과 법신의 중간 대념이 바로 ‘報身’에 해당한다. 그리고 김용옥이 색신과 법신 “이 두 개념은 인류의 종교사에 모두 공통된 문제의식의 아키타입(원형)인 것이다”(같은책, 197)라는 말은 정확한 것이다. 실로 그의 말대로 “기독교의 문제점은 법신을 모르고 색신 예수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문제점은 색신붓다를 너무 무시해버리고 법신붓다만을 진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두 종교는 이 문제에 있어서 너무도 대조적이다”(같은책)라고 한 것도 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다음 구절 즉 “그런데 기독교는 정확히 말하면 이 色身과 法身에 대한 명료한 구분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色身의 신화화(mythologization)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같은책)라고 한 것은 잘 못 된 지적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기독교가 색신과 법신 사이에 명료한 구분의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만큼 양자 사이의 구분의식을 분명히 가진 종교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구분의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너무 분명하게 구분한 나머지 법신에 해당하는 신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이단으로 정죄시 해버렸던 것이다. 기독교 교리사에서 이단들이란 거의가 신성에 대한 애착자들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은 그들의 목숨을 던져가면서 까지 이를 수호하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정통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에만 집착하게 되었으며 역사적 예술를 규명하기 위한 ‘문헌비판’ 혹은 ‘양식사비판’이란 성서 연구 방법론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김용옥은 바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과 ‘신성’ 개념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신앙의 대상’이란 법신과 색신의 중간 개념인 보신에 해당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신앙의 대상’이란 말을 법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한국 신학계의 유동식과 종교학계의 일부 인사들도 불교의 삼신론을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동일시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실 삼위일체의 성부와 성자는 모두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보신’ 정도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성령은 아들에서 나왔다는 ‘필리오케’이론 때문에 결국 성자나 성부에 종속다하고 말기 때문에 성령도 결국 보신의 개념에 포함되고 만다. 물론 필리오케 문제는 동방교회와 서바교회가 갈라지는 군본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논하지 않기로 한다. 그래서 법신에 해당하는 ‘신성’은 삼위일체 그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기독교와는 대조적으로 불교는 일찍이 뭇다를 초기부터 법신화 시켜버렸다. 결국 김용옥의 지적대로 삼신론의 주체는 法身이다. 반대로 삼위일체론의 주체는 報身이다. 불교에서 역사적 싣달타는 법신위에 잔깜 걸쳐진 지푸라기 보다 못하다 한 것은 김용옥의 과장법이 결코 아니다. 이렇게 기독교와 불교은 서로의 이단이 정통이 되는 형국이다. 즉, 기독교의 이단이 불교의 정통이 되고 불교의 이단이 기독교의 정통이 된다. 앞으로 두 종교간의 조율은 삼신론과 삼위일체론의 조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색신을 부정하고 법신을 강조해온 불교가 색신인 붓다를 신격화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역설 가운데 역설이다. 이런 역설이 바로 오늘날 모든 고등종교가 가지고 있는 한계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한계를 대승불교로 넘어와 극복한다. 궁극적인 것은 인격적인 부처 자신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공’, ‘여래장’, ‘열반’, ‘진제’ 같은 것이라는 것이 대승불교의 종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으며, 불교가 동북아시아 문화권에 소개되면서 이렇게 불교의 비인격화는 가속화되었다. 소승이 소유권에 그리고 대승이 자체권에 더 비중을 둔다. 이는 양단현상에 의해 인도보다 동북아시아 일대가 더 비인격적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형이상학은 서양철학의 그것과 같이 역시 존재의 자체권과 소유권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문제가 불교의 삼신설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신설의 법신의 자리에서 비인격적 ‘절대무’가, 그리고 보신의 자리에서 ‘인격신’이 나온다. 여기서 절대무란 주객이 통일된 자리이고, 보신은 주객이 대립적인 관계로 나누어지는 자리이다. 그래서 불교의 삼신설은 모든 종교의 주객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측정언어(metalanguage)가 되고 있다. K. 윌버는 불교에서 부처의 몸을 셋으로 나누어 보는 삼신설에 입각하여 종교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Wilber, 1981, 253~256).
․법신(法身, dharma-kaya):붓다의 자성인 영원한 진여 자체의 몸이다. 우주만유의 근본이며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생(生)도 떠나고 멸(滅)도 떠난 생생히 약동하는 진리 그 자체(suchness)이다. 그래서 불법이란 자체권만 있기 때문에 여러 개체들 속에 나타날 수 있다.
․보신(報身, sambhoga-kaya):법신을 근본으로 하여 그 과보(果報)로 나타난 몸이다. 그래서 생멸이 있을 수 있다. 즉 형체가 없는 법신이 형체를 취하여 나타난 몸을 말하는 것으로, 곧 법신을 원인으로 삼고 그 과보로 나타난 몸이다. 보신은 황금색을 띠고 있으며 32개의 다양한 상을 지닌다. 법신과 화신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보살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보신이다.
․화신(化身, nirmana-kaya):화신이란 말 그대로 ‘변형의 힘(the power of transformation)’을 의미한다. 즉 법신을 근본으로 하여 용‧뱀‧귀신 같은 육축의 몸으로 나타난다. 자비와 지혜의 작용인 현실세계에 나타난 붓다를 말하는 것으로,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중생과 같은 몸을 지니고 중생과 더불어 생존하는 붓다의 몸이다.
물론 이 책에서 사용하려는 법‧보‧화신은 불교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종교의 종류를 세 부류로 나누기 위한 측정언어로서 사용될 뿐이다.
화신은 붓다가 중생이나 육축과 같은 낮은 육체를 지니고 나타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붓다는 육정을 지닌 축생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쿤다리니 요가에서 성욕적 에너지 같은 것에 붙어 있는 것으로 이를 특히 ‘사하스라라(sahasrara)’라고 한다. 화신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샤만의 탈아 경험을 이런 차원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역사적으로 생존했던 붓다를 객관화하여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의 부류가 보신적이라 할 수 있다. 성전이나 사찰을 만들어 놓고 예배의 대상을 객관화하는 모든 고등종교가 거의 이 부류에 속한다. 성인이나 교주를 숭배하는 차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기독교가 보신적 부류에 속하는 전형적 종교이다. 세 번째 법신은 우리 시대의 평균적 인간들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종교의 형태이다. 붓다의 자성이 우주만물 모두와 같아지는 ‘그 자체’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무(無)’라고 한다. 경험 그 자체가 와해되어 버려 주객관의 이원론이 근본적으로 근절되고, ‘궁극적 통일(supreme identity)’이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사닥다리에 비유하면 법신은 가장 높은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나타나지 않는 공(unmanifested void)’, ‘신성(神性, Godhead)’, 주객 이원론을 초월한 자리, ‘심연(abyss)’, ‘반야(jnana)’의 자리이다. 그렇다면 전체로서의 사닥다리 그 자체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법신은 ‘모든 단계의 원천’이라 할 수 있고 사닥다리 그 자체는 법과 구별시켜 그대로인 ‘연(然)’이라고 한다. 동학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다. 법은 모든 층과 단계의 가장 높은 것이고, 연은 층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법과 연은 구별되지 않으면서도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사닥다리의 가장 ‘높은’ 단계와 사닥다리 ‘자체’의 구별 말이다. 완전한 통일은 이런 법과 연의 상태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불교의 진리자체를 ‘법(法)’이라고 했으며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체인 생존했던 붓다를 ‘불(佛)’이라고 한다. 붓다는 이 진리자체를 깨달은 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붓다도 보편적 진리를 받은 한갓 담지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깨닫는 자 없이 진리자체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다시금 전선 없는 전류가 있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불교 전통에서는 불교가 성립되던 원시경전 성립 시기부터 불과 법의 지위와 그 중요성의 순차 문제가 가장 중요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문제와 관련된 동학의 문제는 역시 향벽과 향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법은 곧 동학 역시 똑같은 문제를 다루는 데서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고 여겨 여기에 소개해 둔다.
원시경전 속의 삼신설
원시경전 속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실로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 나를 본 자는 진리를 본다”고 했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기독교〈신약성서〉에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라고 한 예수의 말이 있다. 기독교의 경우 예수가 말한 진리자체가 중요한가 아니면 이런 말을 한 ‘예수’라는 인물이 중요한가 할 때 비교적 그 대답은 간단하다. 두말할 것 없이 역사적 그리고 인격적 ‘예수’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특히 후대 선불교의 경우 “길을 가다가 붓다를 만나면 그를 죽여 버려라”고 할 만큼 불로서의 붓다는 법으로서 진리자체에 차라리 거추장스러울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교 종파에 따라서는 이 문제를 두고 인격적 불에 더 비중을 두려 하여 법과 불의 문제는 나중에 ‘불신관(佛身觀)’의 문제로 전개될 만큼 그 문제가 심각하다.
이처럼 원시경전에 나타난 표현에 따르면 불과 법은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그런데 또 다른 경전에서는 당연히 법보다 불을 주된 위치에 두고 있다. 예를 들면 “법은 세존을 근본으로 하고, 세존을 의지처로 한다”(《주아함경》, 권 48;《잡아함경》, 권 3)와 같다. 이들 가운데《잡아함경》은 모두 불교 원시경전으로서 소승불교의 주된 경전들이 되며 기독교의《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예수에 대한 태도와 아주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법보다 불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아주 유사하다. 그래서 불교적 표현을 빌리면 기독교는 ‘원시불교적’ 또는 ‘소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소승에서 대승불교로 발전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불의 위치는 축소되고 법의 그것이 확대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붓다의 소유권이 축소되고 자체권이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불과 법의 위치와 의미의 균형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소승에서 대승으로의 이동은 곧 다름 아닌 ‘이단’이다.
기독교에서 예수 없이 진리가 따로 없듯이 소승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붓다라는 역사 속에 살았던 인격적 존재 없이 진리자체로서의 법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석가라는 불에 의해서 비로소 법이 법답게 되는 것이다”(김진환, 1987, 4). 원시경전 어떤 곳에서는 붓다를 두고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던 도를 일으킨 사람이다”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진리자체로서의 법이 따로 불보다 선재(先在)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붓다가 나타나서 진리를 일으켰다는 뜻이다. 그래서 불로서의 붓다가 없었더라면 법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법이 먼저 있고 그 전달자로서 붓다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불이 나타난 이후에야 비로소 전에 없던 새로운 법(진리)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실로 불 없이 법 없다라는 불 지상주의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경우 법을 ‘로고스’라고 할 때 불은 ‘예수’라고 할 수 있다.〈요한복음〉같은 경우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요한복음〉, 1장 1~3절)”고 했다. 로고스와 예수를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직〈요한복음〉만이 불교가 말하는 법과 불의 문제를 동일시하여 다루고 있다. 다른 세 공관복음서에서는 한결같이 역사적 예수의 삶에 비중을 두고 있으며 예수에 의해서만 진리자체가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예수 없이 예수가 한 말로서의 진리자체는 있을 수 없다. 진리자체가 예수에 임해 들어오는 순간을 ‘카이로스’라 하며, 수운은 이를 ‘금지’라고 했다.
원시경전 속에는 당연히 불이 우월한 위치에 있었으나, 차츰 인격으로서의 불 개념에 변화가 생겨나게 된다. 그렇다면 인격신의 절대화와 함께 왜 불교에서는 창조주 개념과 유신론적 신관이 발생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 만약 기독교에서와 같이 진리자체와 도가 인격화된 신 밑에 종속되는 것이라면 불교에서도 인격신 개념이 생겼을 것은 당연하다. 불교에서도 이러한 원시경전에서 볼 수 있는 절대자 인격신 개념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출발은 ‘깨달은 자’를 뜻하는 붓다라는 명칭 자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붓다 자신도 모르고 있던 진리를 6년 고행 끝에 깨달아 안 것이다. 그래서 붓다 자신은 진리자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법이 불보다 선재해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의 선재설, 즉 예수는 천지창조 순간부터 있었다고 함으로써 진리자체보다 먼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를 쉽게 신격화할 수 있었다. 예수는 로고스를 깨달은 자가 아니고 로고스 자체가 곧 예수 자신이다.
팔리《열반경》에 따르면 붓다는 죽기 즈음하여 “내가 발하여 준 ‘법(法, dharman)’과 ‘율(律, vinaya)’이야말로 내가 없어진 후의 스승이다”(《유행경(遊行經)》,〈대장경〉, 권 1, 26). 여기서 법이란 바로 진리자체이다. 이 진리자체를 전달한 붓다는 죽는다. 그러면 그가 전달한 진리자체인 법과 율만 남는다. 앞의 인용문에서처럼 붓다는 자기 자신보다는 자기의 말인 법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 참된 스승이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붓다 자신과 진리자체의 이중성이 생긴다. 이때 불교에서는 전자를 ‘불’이라 하고 후자를 ‘법’이라고 한다. 여기서 불교의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인 ‘불타관(佛陀觀)’과 ‘불신관(佛身觀)’의 문제가 제기된다.
불멸 후 살아남은 제자들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불보다 법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법보다 불이 더 중요한가라는 견해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붓다가 전달한 진리자체인 법보다는 인간 붓다인 불에 대하여 더 애정과 애착을 가질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설법이 중요하지만 인간 붓다에 대하여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연모의 정은 오랜 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피부로 경험한 역사적 붓다에 대한 애착에서 쉽게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여래가 입멸한 후에도 정법은 영원히 머문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이 이치(dhatu)는 정해져 있어 확법과 정법이 있다.” 그러나 인간 붓다가 입멸하자마자 즉시 붓다의 인격에 대한 흠모의 정이 제자들 가운데 싹트기 시작했으며 인격 붓다에 대한 숭배가 시작되었다. 나중에 삼신 가운데 하나인 ‘보신’이 생기기까지 인격체 붓다에 대한 숭배는 신격화 내지 절대화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죽은 붓다에 대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벽을 향해 모시는 향벽사상이 대두하게 된다. 그뒤 불과 법을 구별한다는 것은 아주 어렵게 되어 버렸다.
실로 오늘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가장 역설적인 면은 교주 자신은 우상숭배를 배격하지만 그 교주를 따르는 신자들은 바로 그 교주를 우상화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 이후 불교 안에서는 ‘불법(Buddha dharma)’, ‘불교(Buddha Sasana)’, ‘교법(dharmapariyana)’이 생겨났으며 이를 ‘삼보(三寶)’라 한다. 여기서 이 세 가지로 돌아가겠다는 ‘삼귀의(三歸依)’ 사상도 나오게 된다. 기독교에서 ‘예수’와 ‘그리스도’의 갈라짐, 힌두이즘에서 ‘범’과 ‘범천’의 갈라짐 등이 모두 불교에서 말하는 불과 법의 갈라짐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소유권과 자체권의 갈라짐이다. 동학의 신관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다른 종교와의 비교가 요청된다. 동학에서는 이 문제가 ‘시천주’냐 ‘인내천’이냐의 문제로, 그리고 ‘향벽’이냐 ‘향아’냐의 문제로 나뉘어 논쟁이 생기게 된다. 경운동 주변의 신관논쟁도 궁극적으로는 이에 준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붓다가 입멸한 뒤 역사적이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몸을 지닌 붓다를 상실한 허탈한 심경의 제자들은 죽은 붓다를 대신할 수 있는 여러 다른 구체적인 붓다를 생각해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취지에서 나온 것이 바로 ‘佛陀觀’이다. 불교의 이 말은 나중의 ‘佛身觀’과 함께 불교의 주요 교리들이 모두 이에서 기원한다고 할 만큼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주제가 된다. 즉 불타관은 몸을 지닌 구체적인 붓다를 대치할 대상을 찾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불신관은 일반적이며 보편적이고 영원한 붓다를 염원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영원, 특수와 보편 같은 철학의 핵심적 주제가 모두 불타관과 불신관의 논의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불타관의 전개와 주객관의 문제
불교에서는 진리자체를 ‘법(法)’이라고 하며, 그것을 깨달은 정반왕의 아들 석가모니 붓다는 ‘불(佛)’ 이라고 구별한다고 했다. 영원한 보편적 법 또는 ‘법신’이 전제되면, 거기에 대립되는 현실 속에서 생멸하는 현실신으로서의 ‘색신(色身, rupa-kaya)’ 또한 전제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서 법신과 색신의 ‘이신론(二身論)’이 등장하는 이유가 선명해진다. 불멸 후 석가에 대한 인격화는 제자들의 허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자타카 계통의 문헌은 석가에 대한 전생의 이야기를 모아 그의 영원성을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아바다나 계통은 석가의 초월성과 절대성을 강조하여 그를 신격화한다. 특히 석가가 중생과는 다르다는 것을 부각시켜 그가 다른 존재에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임을 강조한다(정병조, 1995, 48).
이는 마치 예수 죽음 후에 제자들이 예수를 신비화 내지 신격화한 것과 같다. 가장 원초적인 자료라 할 수 있는 Q문서에 따르면, 예수는 평범한 윤리교훈가 정도로 등장한다(Mack, 1993, 191) 그러나 후기로 내려올수록 그에 대한 신비화는 가속화하여 인격신적 존재가 된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석가에 대한 이러한 인격화는 비인격화로 탈바꿈한다. 인격과 비인격의 관계는 兩端的 관계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조화는 고등종교의 측도가 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불교에는 삼신설이 나오게 된다.
먼저 어원적으로 볼 때 ‘dharma-kaya’는 팔리 경전에서 ‘dharma-kaya (법신)’ ‘brahma-kaya(범신)’, ‘dharma-bhuta(법자)’, ‘brahma-bhuta(범자)’라 불리고 있다. 원시경전 내지 원시불교 안에서는 아직 ‘법신’이라는 말이 정식화하여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고작 “법을 신체로 한다” 정도에 그치고 있다(김진환, 1987, 18). 그 이유는 불멸 후 300~400년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붓다의 살아 생전의 추억과 기억이 생생하게 사람들 마음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법신보다는 색신에 마음이 더 끌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기독교의 경우는 이미 예수의 죽음 직후부터 색신에 해당하는 몸을 입은 ‘예수’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물질과 정신, 그리고 몸과 마음을 극단적으로 이원화한 그리스 사상의 주변적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몸과 물질은 더럽고 추한 것이라는 스토익 학파나 영지주의에 대하여 그에 반대되는 에피큐로스 학파는 서로 물과 불의 관계였다. 그래서 일찍부터 기독교 안에는 법신 ‘그리스도’와 색신 ‘예수’ 사이의 대립 갈등관계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는 인도의 풍토가 그렇게 강한 이원론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색신과 법신의 변증법적 전개가 훨씬 쉬웠던 것이다. 차라리 법신보다는 색신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기독교의 그것과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비교가 된다.
불타관은《아육왕경》,《법화경》,《반야경》,《화엄경》,《열반경》의 순서로 발전되어 나간다.《아육왕경》에 따르면, 아육왕의 스승이었던 우파국다가 색신으로서의 붓다를 간절히 보기를 원한다. “세존의 법신은 볼 수 있지만 색신은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색신을 보기를 염원한다. “세존의 법신은 이미 보았지만 세존의 색신은 내가 보지 못했다(世尊法身我已得見 世尊色身我所未見)”, “여래의 색신을 보고 싶다(欲見於如來色身)”(《아육왕경》, 권 8)와 같은 구절들은 우파국다가 색신을 그리워하며 색신을 보고 싶어 간절히 염원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나를 보고 믿는 자보다는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더 복이 있다”고 했다. 예수의 이 말 역시 인간 몸을 지닌 자기 자신의 색신보다는 진리자체가 더 중요하고 자기에게 집착하려는 제자들의 인간적인 정을 끊으려고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샤머니즘 같은 원시종교에는 교주가 없기 때문에 이런 성가신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인간이란 소유권을 지닌 인격체를 통해 진리가 전달되는 고등종교에서는 불가피하게 이런 문제가 대두하게 된다. ‘인격’의 문제가 끼어들면서 인격신과 인격신의 ‘말’ 사이에 괴리현상이 불가피하게 생기게 되었다. 말 속에 그 말을 한 사람을 해당시킬 때 역설이 생긴다고 했다. 그래서 불신관 역시 역설의 문제이다. 두 권리의 문제도 결국 역설의 문제이다. 붓다는 자신을 그냥 ‘여래(如來, tathagata)’라고 한다. 진리자체와 자기가 같다는 뜻이다. 예수 역시 ‘나는 길이요 진리이다’고 함으로써 여래를 자처한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인간 예수에 대한 흠모의 정을 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 교회와 인간 예수를 대역할 수 있는 인물이 모색되었던 것이다. 그 대역의 적임자가 베드로였다. 그러나 과연 예수가 베드로라는 인물을 교회의 초석으로 직접 세웠는가는 회의적이다. 이 부분은 다분히 초대교회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이 현대 신약학자들 사이의 공통된 견해이다. 불교의 경우 영원한 진리자체인 법신을 보았다고 하더라고 그 본 주체가 색신을 보지 못했다면 그 진리자체는 허구일 것이라는 것이 3~4세기 이전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4세기를 넘어서면서 색신은 무상하고 환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 가면서 법신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예를 들면 우파국다가 너무 간절히 색신불을 만나기를 원하자 하늘의 악마가 불신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뒤 이 사실을 안 우파국다는 색신이 무상하고 색신에 집착하는 한 참 붓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환상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감지한다. 그뒤 색신불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된다. 영지주의자들이 역사적‧구체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거부한 원인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법신불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초기 불교에서는 법신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색신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릴 수 없었으며 결국 색신 중심의 ‘이신설(二身說)’이 처음으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신설도 차츰 시간이 지나자 색신에 대한 위험성이 높아지면서 법신 중심의 이신설로 점차 옮겨지기 시작한다. 4세기 무렵의 이때를 제1기 대승경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법신은 볼 수 있지만 색신은 볼 수 없다”에서 차츰 그 표현이 바뀌어 “색신은 멸하지만 법신은 불멸한다(色身雖取滅度 法身常住)”가 된다.
이러한 변화된 표현이《증일아함경》에 나타나 있으니, 상당한 표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변하는 “예수는 저주받아라”고 한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파의 심경과 같아진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신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아육왕경》의 또 다른 표현으로 “세존 색신을 보고 싶지만 그것을 볼 수 없다”고 한 데 대하여 대승불교의《반야경》에는 “법신을 통해 불을 보아야 하지 색신을 통해서 보아서는 안 된다(如來不應以色身異)”고 했다.《반야경》의 다른 곳에서는 심지어 색신은 언급도 하지 않고 법신만을 강조한 곳도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아육왕경》→《증일아함경》→《반야경》을 거쳐 나오는 동안 색신에서 법신으로 변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법화경》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구체적인 불타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법신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정토경》의 경우 역시 아미타불이라는 구체적인 영토에 거주하는 불타관 때문에 법신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법신관에 최대 관심을 보인 경은 역시《화엄경》이다.《화엄경》은 비로자나불같이 보편 편만한 붓다에 주된 관심사를 쏟고 있기 때문에 수십종의 다양한 어휘로 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요약하면 결국 법신과 색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화엄경》에 나타나는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이신(二身)에 ‘화신’을 첨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앞으로 나타날 ‘삼신설’을 예상할 수 있게 한다.《반야경》은 공과 무를 주제로 하는 경전인 만큼 불은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법성 내지 법신이라고 했다. 불을 심지어는 색신으로 볼 수 없다고까지 했다. 지금까지는 주로 제1기 대승경전 시대까지 발전되어 나온 이신설에 대하여 말했다. 그러나 제2기 대승경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법신에 관한 사상도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한다.
즉 법신이 주로 공이나 무 같은 객관적인 것에 관한 것이었으나 제2기에 들어와서부터는 법신이 ‘내재불(內在佛)’로서 ‘여래장(如來藏)’과 관련하여 토론이 전개된다는 점이다. 여래장이란 인간 의식의 내면 속에 있는 붓다를 두고 하는 말이다. 법신이 외재적이 아닌 내재적으로 되어 간다는 뜻이다. 내재적 ‘내재신(內在身, pratyatma adhystma)’으로서의 여래장과 법신을 동일시했다. 그래서 중생의 의식 속에 내재하는 면에 역점을 두면 여래장이 되고, 보편적 외재성에 역점을 두면 법신이 된다. ‘여래’에 대해 ‘여거(如去)’는 자내증적 자기언급적 붓다이다. ‘여래’는 세계를 타자로 하여 온 자이다. 타자언급적 붓다이다. 그러나 이 둘은 보통 구별되지 않는다. 불교는 붓다가 ‘깨달은 자’라는 역설을 ‘여거’와 ‘여래’로 해결한다.
불타관에서 볼 때 점차 구체적인 데서 보편화되어 나가면 비로자나불같이 사방팔방에 편만한 붓다가 되고, 다시 내면화하면 여래장불이 된다. 특히《열반경》은 비로자나불 같은 초월-객관적-보편자가 아닌 중생에 편만한 보편적 내재신으로서의 법신에 의하여 새로운 이신설을 만든다. 주객관이 서로 되먹힘해 나가면서 양단현상을 만든다.《불증감경》과《승발경》에서도 보편적 진리 신으로서 법신을 여래장에 결부시켜 내재화하고, 다시 법신의 보편성을 한층 철저화한다. 이것은 이신설의 한 새로운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주객관이 상호 되먹힘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열반경》에서 이러한 법신의 되먹힘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이신설이《열반경》에서는 주객관이 상호 교환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법신의 영원성 내지 보편성이 내재화를 통해 심화된다. 드디어 법신의 영원 보편성에서 색신이 제거되기에 이른다.
심지어는《열반경》에서 색신을 ‘번뇌신(煩惱身)’ 또는 ‘무상신(無常身)’이라고까지 혹평한다. 이런 점에서 색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열반경》과《반야경》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반야경》에는 법신이 공과 무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열반경》은 영원 보편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래서《열반경》은 여래 법신의 내재적인 영원 보편성에 강조점을 둔 나머지 ‘법신상주설(法身常住說)’에 이른다(《대장경》, 권 12, 421).
시간상으로 볼 때《법화경》에서는 그 연장선 끝에 불이 상주해 있다고 생각한 반면,《열반경》에서는 여래장과 결부되고 지금 여기에 내재해 있다고 본다. 영원과 현재가 만나게 된다. 영원성의 내재화란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열반경》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다. 그리고 유식불교(唯識佛敎, Yogacara Buddhism)가 등장하는 배경도 여기서부터 가능해진다. 즉 유식불교의 ‘알라야식’이란 다름 아닌 영원한 붓다가 인간의 의식 속에 내재화한 것이다. 알라야식이 나타나면서 현실과 영원, 현상과 본질이 둘이 아닌 하나로 통일된다. 그래서 ‘오직 식뿐’이라는 유식(唯識)의 진정한 의미는 극단적인 주관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객이 통일됨으로써 주관만 말하여도 객관을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의 주관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드디어 여래장과 알라야식이 통일되어 이 둘을 포함하는 경론이 나오게 되며, 이것이 불신론으로 발전하여 영원한 법신과 현실적인 색신의 상관관계 내지 통일이 이루어진다. 나아가 통일을 이루었을 경우 제3의 신이 가능해져 결국 ‘삼신설’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 이신설이 삼신설로 발전하는 과정을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란?
동학의 주문은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이고, 불교에도 널리 대중화한 주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있다. 불교에는 붓다 역시 깨달은 자에 불과하고 법 자체는 불과는 다르다는 교리 때문에 붓다 이외에 다른 많은 깨달은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이 바로 ‘보살’이다. 그 가운데 아미타불과 관세음불은 대중들과 가장 가까운 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佛陀觀’이란 다름 아닌 붓다 이외의 다른 여러 붓다들에 관한 견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시간적으로 미래에 다가오는 붓다를 ‘미륵불(Maitreya)’이라고 했다. 공간적으로는 서방정토 세계에 있는 불을 ‘아미타불(Amida)’이라고 한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불들을 마치 그리스 올림포스 신전에 모여 있던 만신들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불타숭배란 석가라는 특별한 인격에 대한 숭배에서 시작된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석가불 사상을 연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석가에 대신하는 불로서 미래불인 ‘미륵’과 정토불인 ‘미타’ 등의 특정한 일불(一佛)이 세워지고,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일불이 설정되어 그 결과 ‘다불(多佛)’ 내지 ‘제불(諸佛)’의 존재가 있게 되었다”(같은 책, 8).
아미타불은《법화경》에 처음 나타나는데 ‘아미타유스(Amitayus)’, 즉 ‘무량수(無量壽)’란 뜻이다. 그러나《화엄경》에는 ‘아미타바(Amitabha)’, 즉 ‘무량광(無量光)’이라고 했다. 무량수와 무량광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냐고 할 때 그것은 이론의 여지없이 경전의 성립순서로 보아《법화경》이《화엄경》보다 먼저이기 때문에 무량수가 무량광보다 먼저라고 할 수 있다. 무량수는 시간적으로 ‘영원성(eternal)’을, 그리고 무량광은 공간적으로 ‘무한성(infinite)’을 뜻한다. 불교의 ‘영원무궁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화엄경》의 무량광은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불로서 사방에 편만해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이다.
붓다가 입멸한 뒤 석가를 대신해 줄 불이 자연스럽게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영원한 무량수불이 먼저 모색되었고, 나아가 공간적으로 무한대로 확대되는 아미타불이 뒤이어 등장하게 된다. 아미타불은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존재와 비교할 수 있으며, 그래서 심지어 일본의 교토 학파에서는 ‘아미타 그리스도(Amida Christ)’란 말을 사용할 정도로 기독교의 인격적 초월자와 일치시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주문에 나타나는 ‘아미타불’이란 다름 아닌 초월적 타자를 불러 전지전능한 힘을 구하고 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주여 주여” 할 때 찾는 대상과 유사하다고 하여 ‘아미타 그리스도’란 말이 유래한다.
아미타불에 대하여 관세음불은 ‘觀自在’라고도 하며, 말 그대로 ‘내면에 스스로 있는 자’란 뜻이다. 아미타의 전지전능한 속성에 대하여 대자대비하며 특히 생명을 좌우하는 불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아미타와 관세음불은 초월과 내재, 주관과 객관, 그리고 힘과 사랑으로 대비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주문에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할 때 이는 철학적으로 보아 주관과 객관적 존재를 동시에 번갈아 부르는 것과 같다. 즉 향벽과 향아가 동시적이란 뜻이다. 전통 기독교 유신론의 큰 약점은 신을 객관적 타자로서 저 멀리 그리고 ‘저 너머’에 있는 존재로 만들어 놓은 데 있다.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 병폐를 불교는 주문을 통해 대중 속에서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원론의 피해가 정신세계에 얼마나 큰 상처를 줄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유신론은 이 초월성을 공간적으로 생각하여 신을 말할 때 ‘저 위에 계시고’, ‘저 밖에 계시는’ 신으로 생각했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근저에는 먼저 우리 이성이 주관과 객관으로 나뉘어 생각하기 때문에, 주관에 대하여 신을 객관적 대상으로 삼았고 또한 신이 주관일 경우에 인간은 객관적 대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신이 인간 사고의 객관적 대상이 될 때는 인간 지식의 모든 대상과 마찬가지로 신이 일정한 형상을 가지고 존재하는 존재자로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오직 이 존재자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있는 존재자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 위에 있는 존재로서 보아 바로 이것을 초월적 신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김하태, 1983, 870~871).
이 인용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서양의 유신론적 신관은 주‧객 그리고 초월‧내재의 놀이를 벌이고 있다.
불교의 주문으로 볼 때 기독교의 유신론적 신관은 아미타불만을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주문이 신과 인간 사이의 주객 놀이를 극복하고 주관적 관세음불과 객관-초월적 아미타불을 반복적으로 부르게 함으로써 주객의 통일, 그리고 초월 내재의 통일을 이루게 한 것이다. 주문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주객을 비롯한 모든 이원론이 순환논리로 바뀌어 이원론을 극복한 세계관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주문의 효과가 있다. 같은 글을 반복해서 암송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맴돌이 현상을 만들어 프랙탈을 만들면 깨달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의 주문이 갖는 의미란 다름 아닌 주객통일이라는 이원론의 극복 차원에서 있다는 것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같은 관점으로 동학의 주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초학주문〉을 이런 관점에서 다시 생가해 보아야 한다. ‘위천주’는 객관적 타자로서, ‘고아정’은 주관적 내재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본주문〉의 ‘시천주’란 천주를 ‘모신다’는 뜻이다. 수운은 천주의 초월적 객관성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아미타 같은 전지전능성도 부인하지 않았다. 이러한 천주를 마음 속에 모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기’를 지금 여기에 강림하게 하기 위해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철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주객이 통일되고 초월과 내재가 조화되기를 바라는 것 이상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동학주문은 불교의 주문과 구조적으로 같아 보인다. 주객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동학의 21자 주문 가운데 ‘지기’와 ‘천주’를 동시에 불러야 하는 이유도 주객통일 그리고 초월과 내재의 통일에 있는 것이다.《동경대전》〈논학문〉에서 수운은 ‘시천주’의 ‘시(侍)’는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어서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옮기지 못할 것이라(內有神靈 外有氣化 各自不移)”고 했다. 수운의 이 말 속에는 신의 객관성과 내재성이 동시에 들어 있다. ‘조화정’이란 바로 주객이 조화 통일되어 안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영세토록 불망하며 만사를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이 분리되어서는 안 될 것을 ‘불이(不移)’라고 했다.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불이’는 주객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분리를 부정하는 말이다.
우리는 불교의 불타관과 불신관을 통하여 불교의 주문이 갖는 철학적 구조를 파악해 보았다. 동학의 주문이 가지고 있는 성격 역시 이원론의 극복에 있다고 볼 때 큰 철학적 틀에서 볼 때 잘 짜여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의 유신론적 신관은 깊은 이원론의 수렁에 빠져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이원론적 오류를 수운은 이미 그의 글들을 통하여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매체 가운데 구리는 전류의 흐름을 가장 적게 방해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류의 매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구리도 이상적인 매체일 수는 없다. 그러면 매체 없이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수면파는 물을 매체로 전달되고 음파는 공기를 매체로 전달된다. 여기서 우리는 소유권에 해당하는 매체가 전달되는 주체인 자체권을 훼방하기 때문에 매체 없이도 주체가 전달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것이 있다. 수면파와 음파는 매체 없이는 전달될 수 없지만 빛은 가능하다. 자기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매체이기 때문이다. 매체가 도리어 전달하는 데 방해자 노릇도 하기 때문에 매체 없이 전달되는 빛만큼 빠른 것은 아직 없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빛의 제국(empire of light)’이라는 말이 가능해진다(Perkowitz, 1996, ix). 빛도 에테르라는 매체를 통해 전달될 것이라는 생각을 과학자들이 한때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빛을 전달하는 매체란 없다는 것이 하나의 과학적인 공론이 되었다.
즉 19세기 이전까지는 에테르의 존재를 믿었지만 맥스웰의 실험 이후 지금까지 그 존재를 믿는 과학자는 없다. 빛은 자기가 스스로 매체가 되어 전달된다. 빛은 자기언급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빛은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게 된다. 주객과 같은 모든 이중성의 양극성의 극복은 자기언급적이 될 때 빛과 같이 될 수 있다. 전달하는 주체로 볼 때는 입자같이 보일 것이고 전달하게 하는 매채 또는 수단으로 볼 때는 파동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빛은 입자이고 파동이다. 이는 순전히 논리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빛이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중성을 보이는 이유는 빛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주체이면서 객체라는 자기언급적이기 때문이다. 빛의 이중성이란 역설의 고리 ‘TF 시리즈’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예수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말을 그 은유적인 표현을 떠나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빛과 같이 되어 매체 없는 자기 자신이 되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리고 동학의 주문이 의도하는 바가 바로 거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만사의’ 또는 ‘만사지’란 자기충족적이 되는 단계이다. 모든 종교의 궁극성은 빛과 같이 자기충족적인 데 있다. 빛은 어둠에 대칭되는 것으로, 빛과 같이 된다는 말 속의 광채를 의미하는 것 이상으로 의미는 깊다. 예수의 이 말은 지금까지는 빛으로 어둠을 이기라는 말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는 외양적 이해이고 그 내밀적 이해는 자기언급적인 데 있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붓다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한 것이라든지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라고 한 것은 자기교만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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