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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8-15 03:43
본시오 빌라도 그는 누구인가? (제 1편)
 글쓴이 : 돌통
조회 : 508  

한동안 너무 바빠서 글을 쓸 엄두를 못내고 있었습니다ㅎㅎ 꽤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던 주제였는데, 마침 시기적절한 때이기도 해서 써봅니다.
 
 
 
들어가며
 
 
'빌라도'라는 표기로 국내에서 널리 알려진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로마 역사에 별반 관심이 없더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법한 이름일 것이다. 동시에 유명한것 치고는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기가 정말 어려운 케이스이기도 하다.
 
 
가장 상세한 기록인 신약성서의 수난 내러티브는 상당부분 신학적 재구성이라 역사적 사실을 분리해내기가 매우 어렵고, 유다인들이 남긴 간략한 기록들조차도 흔한 '피정복민 입장에서 적은 정복자의 스테레오타입'을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빌라도라는 인물은 역사적 연구보다는 상상력에 의존한 재창조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성서에 대한 당시 맥락을 무시한 독해에서 나온 '우유부단한 인물 빌라도', '뭐가 옳은지는 알지만 군중들을 무서워해서 소신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빌라도' 상에서 아예 '개종한 그리스도교의 성인 빌라도'에 이르기까지 그 이미지는 매우 다양하다.
 
 
 
그렇다면 재창조된 캐릭터로서의 빌라도가 아닌, 실제 역사상의 빌라도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과연 그 재구성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역사적 빌라도
 
 
몇몇 기록들에 나타나는 파편적인 증거들을 넘어서, 역사적 인물로서 빌라도의 실체를 증언해주는 유물이 발견된 것은 1961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카이사레아 유적 발굴지에서 한 1세기 석회암 블록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많이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판독이 가능한 다음과 같은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S TIBERIEVM
 
..........NTIVS PILATVS
 
..........ECTVS IVDA E
 
................E...........
 
 
 
지워진 부분이 많아서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문장들의 길이 등으로 유추해볼때, 이는 '티베리움'이라는 이름이 붙은 어떤 건물을 봉헌하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두번째 줄은 '...티우스 필라투스'인데, 훼손된 부분을 채워넣을 경우 본 문장이 '폰티우스 필라투스'임이 거의 분명하다. 세번째 줄, '...엑투스 유다이'의 원 문장은 '프라이펙투스 유다이아이(praefectus Iudaeae)', 즉 '유다 장관'이었을 것이다.
 
 
빌라도 명문
 
 
이 돌의 목적이 무엇이었든간에, 이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즉 서기 1세기 경 유다에 폰티우스 필라투스, 즉 빌라도라는 사람이 있었으며 그의 지위는 유다를 다스리던 로마의 프라이펙투스였다는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위기에 이 지위는 '프로쿠라토르'로 바뀌게 되는데, 그 이후에 살았던 타키투스는 빌라도를 유다의 '프로쿠라토르'라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빌라도 재직시의 명칭은 '프라이펙투스'였다.
 
 
그렇다면 1세기 유다의 프라이펙투스는 어떠한 존재였을까?
 
 
 
프라이펙투스 빌라도
 
 
프라이펙투스와 프로쿠라토르는 둘 다 행정, 재무, 군사와 관련된 업무에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 관직명이다. 그중에서도 프라이펙투스는 좀더 군사적인 함의가 강하다. 유다 장관의 주된 업무도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치안 유지에 있었다. 
 
 
그러나 유다 장관이 행사할 수 있었던 군사력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프라이펙투스로서 그가 거느린 병력은 군단병이 아니라 보조병이었다. 유다에서 그의 통제에 두고 있던 병력은 기병부대 하나와 보병 5개 코호르스였다. 유다인들은 군복무가 면제되었기 때문에, 인근 속주민들 중 비유다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아마도 옛 헤로데 왕가의 군사조직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헤로대 대왕 시절의 군대는 주로 카이사레아와 세바스테 출신들이었으며, 로마식 편제로 짜여져있었다.
 
 
이 병력의 상당수는 카이사레아의 장관 관저 부근에 주둔했으며, 나머지는 유다의 주요 지역들에 흩어져 있었다. 일부는 예루살렘 성전 옆에 지어진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했다.
 
 
 
이 군대는, 물론 잘 훈련되고 조직된, 속주민들을 평시에 위압하기에는 충분한 병력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경찰병력이었다. 대규모 소요 사태의 경우에는 시리아에 주둔한 군단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런 사태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다 장관의 중요한 소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한 가지 있다. 빌라도 재직시에 같이 근무했던 시리아의 레가투스들 중 첫번째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였다. 특이하게도 티베리우스는 라미아를 시리아 레가투스로 임명을 하면서도 로마에 붙잡아두었다. 덕분에 라미아는 재직 기간 내내 한번도 시리아에 직접 간 적이 없었다. 이 말은 무슨 일이 터질 경우 빌라도 입장에서는 시리아 군단의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뜻이 된다. Bond 선생의 지적대로, 그는 역대 유다 장관들 중 그의 보조병에게 가장 의존해야 했던 장관이었다. 본래도 대규모 소요사태는 로마 장관에게 반가운 일이 못되었지만, 빌라도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는 뜻이다.
 
 
 
치안과 징세의 유지를 제외하면, 일상의 행정은 대부분 현지 엘리트들에게 맡겨졌다. 고대 로마는 잘 짜여진 관료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유다의 경우 예루살렘 귀족들과 사제들이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여기에 있어서도 로마 장관의 권력은 분명했다. 이 유다인 귀족과 사제들은 유서깊은 토착 귀족이라기보다는 헤로데 왕가 아래에서 성장한 이들이었으며, 따라서 자체적인 세력기반이 부족했다. 이들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로마 장관은 매우 쉽게 이들을 교체할 수 있었다. 빌라도의 전임자였던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의 경우 11년간 재직하면서 대사제를 4번 갈아치웠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라투스가 마지막으로 임명한 대사제였던 카야파를 임기 내내 유임시켰다. 아마도 카야퍄의 일 솜씨가 마음에 들었고, 빌라도와 손발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이 점은 예수 재판을 이해할 때 특히 중요한데, 빌라도가 유다의 사제와 귀족층과 긴밀하면서도 원활한 동맹관계를 유지했다는 뜻이기 떄문이다.
 
 
 
예루살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들 유다인 귀족들과 달리, 빌라도를 비롯한 로마 장관들은 카이사레아를 본부로 삼아 집무했다. 카이사레아는 헤로대 대왕이 건설한 항구도시로, 많은 면에서 헬레니즘 군주를 지향했던 그의 이상이 반영된 그리스적인 도시였다. 당연히 빌라도와 로마 행정관들 입장에서는 거기가 예루살렘보다 훨씬 더 쾌적하고 편안한 거주지였을 것이다. 게다가 헤로데가 건설한 훌륭한 항구시설 덕분에 로마 본국과의 연락이 용이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사실 유다인들 입장에서도 거룩한 고도 예루살렘에 로마에서 온 지배자들이 얼쩡거려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으니만큼, 피차에게 편리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특정 시기에는 로마 장관이 예루살렘에 거주해야만 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종교적 축제일이 이에 해당했다. 이때에는 평소에 안토니아 요새 안에서 눈에 잘 띄지 않게 주둔하는 병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로마 장관이 직접 지원병력을 인솔하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루살렘에 체류할때의 거주지가 어디였을지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헤로대의 옛 궁전이 가장 유력하다.
 
 
빌라도와 다른 유다 장관들은 대부분 에퀴테스 출신들이었다. 에퀴테스 계급이 되기 위한 재산 상한선은 최소 40만 세스테르티우스였다. 따라서 빌라도도 최소한 그만큼의 부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에퀴테스 계급의 일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공직에 종사할수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흔한 것은 역시 군복무였다. 빌라도도 유다 장관이 되기 이전, 트리부누스 밀리툼 등의 직책으로 군경력을 쌓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사료가 없기 때문에 그 이상의 추측은 불가능하다.
 
 
 
어찌되었건, 유다는 원로원 속주가 아니었고, 따라서 그 장관으로 임명되기 위해서는 황제의 승인을 필요로 하였다. 이것은 개인의 능력과 재산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황제나 혹은 황제와 가까운 사람과의 연줄을 필요로 했다. 학자들 중에는 빌라도가 군에서 경력을 쌓으면서 티베리우스의 눈에 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티베리우스가 마지막으로 게르마니아에서 군을 지휘했던 서기 9-12년 사이에 빌라도가 초급 장교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젊은 장교에게서 나름의 재능을 보고 키워주었다는 것인데, 전혀 개연성 없는 추측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여러 가능성중 하나일 뿐이다.
 
 
 
예전에는 빌라도가 티베리우스가 아니라, 그 측근 세야누스와 끈이 닿아서 유다 장관직을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근거가 더 희박하다. 무엇보다도 빌라도는 세야누스가 몰락한 뒤로도 5년을 더 장관으로 지냈다.
 
 
 
한 가지 비교적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빌라도가 재산도 꽤 있는 가문이며, 황제 혹은 그 측근들과 어떻게든 연줄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빌라도는 무려 10년이나 재직했다. 이는 전임자인 그라투스의 11년 다음으로 긴 재직기간이다. 다른 장관들은 대체로 3-5년 재직한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기간이다. 이는 빌라도가 높으신 분들의 인정을 받아가면서 동시에 속주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치할 능력(물론 어디까지나 로마 제국 입장에서 봤을 때)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암시한다.
 
 
 
필론과 빌라도
 
 
성서의 기록과 다른 동시대 기록을 읽다보면 얼핏 보기에 상당히 모순적인 빌라도 상을 발견하게 된다. 일견, 신약성서의 빌라도는 어떻게든 예수를 살려주려고 애쓰지만 군중들이 무서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는 인물로 많이 이해된다. 반면에 동시대 유다인 저자들은 빌라도를 탐욕스럽고 포악한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사실일까? 결론부터 내리자면 둘 다 역사적 사실과는 꽤 거리가 있는 인식이다. 두 기록에 나타나는 빌라도는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다 저자의 정치적, 신학적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 재구성된 장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실 신약성서의 빌라도 묘사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그건 잠시 미뤄두고 유다인들의 기록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당대 가장 유명한 유다인들 중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남긴 기록이다.
 
 
 
필론은 빌라도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설명하면서 상당히 직설적으로 '융통성이 없고, 고집스러우며, 천성이 잔인한 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신약성서의 빌라도만 접한 사람들은 일견 상반되는 묘사에 상당히 혼란을 느낀다. 그러나 성서 내러티브를 문자적으로 읽는 것이 합당하지 않듯이, E. P. 샌더스 선생이 말하듯 다른 고대 역사가나 저술가들의 서술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 또한 조심해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우선, 필론의 서술 목적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현대 학자들은 이 글이 클라우디우스 황제 즉위 초에, 클라우디우스에게 전임자였던 칼리굴라의 전철을 밟지 말고 유다인들을 보호해달라는 요청의 의도로 쓰였다고 보고 있다. 생전에 칼리굴라는 예루살렘에 자신의 상을 세우려 하였는데, 필론의 글에서 빌라도는 그 비슷한 일을 시도하는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필론에 의하면 빌라도는 예루살렘의 헤로데 궁전에 도금된 방패를 전시하려 시도하였다. 이 방패에는 신상이 그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빌라도 자신과 빌라도가 이 방패를 봉헌한 대상(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거기 새겨진 Augusti Divi Filius가 유다인들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이에 유다인들은은 대표를 뽑아서 빌라도에게 "티베리우스 황제께서는 우리 관습을 존중하기로 약속하셨소. 그러니 이 방패는 치우시오."라고 요구하였고, 한동안의 신경전 끝에 빌라도는 방패를 철수시켰다.
 
 
 
이 이야기가 얼마만큼의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최소한 완전한 허구는 아닐 것이라는게 많은 연구자들의 중론이다. 그러나 빌라도에 대한 상투적인 묘사를 제외하면, 필론의 주 목적은 빌라도가 얼마나 나쁜놈인지를 그리는게 아니라, 클라우디우스에게 "우리는 로마 황제의 충신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선제께서 해주신 약속을 존중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빌라도에 대해 특히 "융통성 없고 잔인하다"는 묘사를 한 것은 유다인들을 잘 대해주었던 티베리우스 황제와의 극명한 대비를 이루기 위한 당대의 흔한 수사학적 표현(이런 상당히 극단적인 대조는 고대 문인들이 즐겨 쓰던 서술법이었다)으로 보인다.
 
 
 
이 부분을 걷어내면, 이 에피소드는 사실 빌라도에 대해 꽤 흥미로운 점을 많이 보여준다. 첫째는 그가 주군인 티베리우스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려고 노력하는 흔한 관리였다는 점이다. 이 도금방패 사건은 아마도 현재 명문으로 전해지는 그 건물을 지어 봉헌할때와 같은 의도에서 일어난 것이었을 것이다. 둘째, 당대의 많은 로마 관리들과 같이 그는 그가 다스리는 정복민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가 방패에 어떤 그림이나 문양을 그려넣지 않았던 것은, 유다인들의 전통이 이미지를 금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이해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셋째로, 의견 충돌이 일어났을때, 그는 상당히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태도를 전환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머리는 꽤 기민하게 돌아가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세푸스와 빌라도
 
 
 
필론의 빌라도는 다소 정형화된 캐릭터에 가깝지만, 요세푸스는 좀더 풍부한 정보를 전달해준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서 빌라도는 필론이 묘사한 빌라도보다 좀더 공격적으로 유다인들의 심기를 거스른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빌라도는 밤중에 몰래 예루살렘으로 황제의 상이 그려진 군기를 들여왔다.
 
 
유다인들은 방패 사건때처럼 카이사레아의 관저로 가서 빌라도에게 군기를 철거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이번엔 빌라도도 물러나지 않고 팽팽한 기싸움이 벌어졌다. 유다인들은 빌라도의 집 앞에 엎드려서 6일간을 읍소했다. 그러자 빌라도는 한가지 술수를 고안해낸다.
 
 
그는 마치 유다인들의 청원을 들어줄 것처럼 나아가 의자에 앉으며 군중들을 불러들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장한 병사들을 동원해서 그들을 포위하고 칼을 뽑아들게 했다. 그리고 "황제의 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네놈들을 모조리 베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유다인들은 잠시 겁에 질렸으나, 곧 우루루 목을 늘이며 엎드렸다. 그리고 "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여주시오"고 소리쳤다. 이 기세에 놀란 빌라도는 명령을 철회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빌라도는 상당히 오만한 정복자이자 통치자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그는 어떻게든 유다인들의 고집을 꺾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캐릭터다. 특히 황제의 상을 예루살렘에 세우려는 것은 "내가 대표하는 로마 제국이 너희 보스다"라는것을 확실히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정도 유연한 모습도 보여준다. 유다인들이 물러서지 않으면서 "차라리 우릴 죽여라"라고 하자, 빌라도는 뜻을 꺾는다. 즉, Bond 선생의 설명대로, 이 에피소드의 빌라도는 정복자 특유의 오만함과 난폭함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래도 불필요한 유혈 사태는 자제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캐릭터다.
 
 
 
요세푸스의 다른 책 <유대고대사>는 빌라도와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를 더 소개한다. 그중 하나는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를 지으면서 성전 금고의 돈을 사용한 사건이다. 인프라 건설은 장관의 본래 의무이기도 하고, 유다인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성전 금고는 단순히 성전에서만 쓰이는게 아니라 도시 행정에 쓰일 비용도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그걸 사용한 것도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빌라도가 폭력을 써서 강제로 돈을 빼왔다는 서술은 없다.
 
 
아마도 사제들과 합의가 된 공무집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원문의 뉘앙스를 보면, 그 돈 중 일부를 빌라도가 전용했거나, 그랬다는 의심을 샀던 듯 하다. 이에 분노한 유다인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빌라도는 몽둥이로 무장한 병사들을 민간인 복장을 해서 시위대 안에 숨겨두었다가 신호와 함께 공격하도록 했다. 이 병사들은 격한 시위를 벌이던 이들과 그냥 주변에 서있던 사람들을 구분하지 않고 마구 폭력진압(단 요세푸스는 나름 공정하게, 이 병사들이 빌라도의 본래 명령보다 더 과격하게 진압을 했다고 서술해주고는 있다)을 시도했다. 결국 시위는 다수의 부상자와 사망자까지 내면서 진압되었다.
 
 
 
그 다음 에피소드는 빌라도가 해임되는 계기를 제공한 사마리아인 사건이다. 어떤 사마리아인들이 군중들을 선동해서 그들의 거룩한 장소인 그리짐 산으로 데려갔다. 이때 군중들은 무장을 하고 모였는데, 빌라도는 중무장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들의 길을 막았다.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히거나 도망쳤다. 빌라도는 그중 지도부와 유력한 이들을 모두 사형에 처했다. 그러자 사마리아인들의 대표는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에게 가서 그들은 로마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학살을 당했다고 주장하였고, 비텔리우스는 양자의 주장을 들어본 뒤에 빌라도에게 로마로 가서 황제에게 직접 이야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사실 요세푸스의 기록도 필론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목적과 그에 따른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에 100퍼센트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요세푸스는 의도적으로 유다인들이 빌라도의 뜻을 꺾었던 사건과, 빌라도에게 살해를 당한 사건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목을 내밀면서 비폭력 저항을 한 유다인들은 성공했고, 과격시위를 벌인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학살을 당했다. 즉 요세푸스의 진짜 목적은 "로마에 무력으로 반항하지 말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우리 전통을 지키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현대 연구자들은, 신학적, 정치적 목적과 그로 인한 수사학적 표현을 감안하더라도, 요세푸스의 기록은 대체로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앞서 말한 경향만 주의한다면 여기서 역사적 빌라도의 상당부분을 어느 정도는 재구성할수 있다.
 
 
 
여기서 빌라도는 반복적으로 유다인들의 법과 전통을 무시하면서 충돌을 벌이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제국의 권위를 과시한다거나, 아니면 장관으로저 자기 할 일을 하던 중에 벌어진 것이었지, '전통을 파괴하는 것' 자체가 주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는 어쩔 수 없는 정복자의 오만함이 배어있었고, 그것이 종종 예기치 못한 충돌로 번졌다.
 
 
 
백성들과 충돌할 경우, 빌라도는 상황에 따라 물러나기도 했지만 상황이 심각할 경우 무력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어느 정도 자제는 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루살렘 수로 사건때는 격하기는 했지만, 시위였지 봉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병사들에게 칼이 아니라 몽둥이로 무장을 시켰다. 사마리아 사건 때에는 군중들이 무장을 했기 떄문에 빌라도도 중무장한 병사들을 끌고 덮쳤다. 양쪽 다 과격진압의 혐의는 있지만, 빌라도는 아마 자신이 선을 지키면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서술들을을 종합하여 분석했을 때 유추할 수 있는 빌라도 상은, '오만하고 지배적인 태도를 보이며, 피정복민, 특히 하층민에게는 (제한된 규모의)폭력을 행사하는걸 망설이지 않지만, 그래도 대체로 유능하며 식민지 현지 엘리트와는 잘 협조해서 통치하고, 필요할땐 타협을 하고 가끔 유혈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체로 너무 막나가지는 않는 선을 지키는 관리'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역사적 인물이 그렇지만, 빌라도도 '선인vs악인'으로 단순히 분류할 수 있는 경우는 아닌 셈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빌라도는 필요에 따라 양보를 하기도 하고 폭력진압을 하기도 했지만 그 대부분의 경우 상황을 자신이 상당부분 컨트롤하는 입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군중들에게 끌려다니거나 우유부단한 이미지는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묘사하는 빌라도는 어떤 캐릭터일까? 다음번 글에서는 복음서의 서술을 중심으로 과연 거기 묘사된 빌라도가 지지금까지 본 유다인들의 기록과 크게 다른 인물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제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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