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옳은 말씀이십니다. 근데 인과에 대한 응보를 막연
하게 하늘이 내리는 천벌에 의존하는 건 매우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봅니다.
인과에 대한 응당한 죗값은 막연한 믿음 따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가시적이고 적법한 처벌에서 시작되어야 해요.
천망회회 소이불실은 더는 현 시대에 맞지 않는 경구이고,
처벌의 주체는 이제 하늘이 아닌 사람이 되어야 하죠.
논지에 대한 댓글을 달기에 앞서, 전 제로니모 님을 이곳 종철게가
생기기 전에 이미 다른 게시판에서 안면을 뵈었었고, 신앙 생활을
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서로간 이견으로 인해 몇 번
투닥거렸던 기억도 나네요. 다만, 쓰신 글에서 나름대로의 신념을
엿볼 수 있었기에 종철게의 흔한 광신도에 대해 지금껏 반론하고
비꼬던 제 모습과는 달리, 한결 조심스레 말을 꺼내 보겠습니다.
"문제" 는...
말씀하신 기독교나 무슬림의 근본주의자들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어디까지 소수입니다. 물론.. 그들 소수가 의외로
상당한 지분과 권력을 가지고는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힘 만으론
유일신교들의 악순환이 굴러가지 않아요. 이 부분은 아마 제로님
스스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저 믿고 따르는 신도들에게 책임을 일부 전가 하고 싶진 않지만
현실을 보면 결국 무조건 믿고 따르는 신도들이 깨우쳐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저의 이 말이 얼마나 모순되는 주장인지는 저도 잘 알고는 있지만,
결국 믿음에서 출발하는 이 신앙의 근본적인 성격과 개념을 이젠
좀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과거 일어났던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이
불경하거나 불신함에서 개혁을 일으킨 것이 아니듯, 오늘날 삶을
살아가는 신도들도 맹목성과 배타성을 버려야 할 때라고 봅니다.
선의나 공의가 사라진 교회들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일견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 밝은 빛무리에 마냥 매료될
만큼 현대 사람들이 무지한 것이 아닐진데, 기독교는 여전히 믿음
하나로만 모든 오류와 불합리를 설명하고 때우려 들고 있죠.
성경 속 내용이 좀 틀리면 어떤가요?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잖아요.
성경 구절들이 나쁘다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떤 이라 해도
삶의 지침이 되는 좋은 경구들이죠. 예수는 분명 선구자였고, 많은
이들이 감화되었던 시대를 앞서 간 식자이자 성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 만으로도 그를 존경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물론 종교에서 무결성이 깨어지면.. 편협한 이들은 불신하고, 다른
오만한 식자들이 공격도 하겠죠. 하지만 성인의 옳은 가르침 들을
상기하고 실천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결국 누굴 더 욕할까요?
성경과 기독교는 완전하지 않으니 종교도 아니고 사기라고 할까요?
아마 아닐겁니다.
그저,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이 조금만 내려 놓으면 더 나은 방향의
공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선택이 늦어질수록 저 같은 사람들은 더욱 기독교를 공격할겁니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오류, 모순점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비호하는 광신도를 공격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결국 공격의 세례 중 일부는 목표를
지나쳐서 뒤에 서 있는 기독교 자체에도 꾸준히 타격을 줄 겁니다.
악마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고, 누구라도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환경이, 상황이, 욕망이 바로 악마의 주식인 것인데,
종교인들이 가진 내면의 악마는 바로 오만, 맹목, 배타 이 세 가지의
욕망이 아닐까 하네요. 신실함으로 이것들을 지워갔으면 할 뿐입니다.
그리구 제 생각과 일치하는 님 생각 역시 절대적이진 않으나 적어도 공감하고있는 사람들이 많을거로 봅니다.
예로 방송인이자 목회자인 김용민 같은 스피커들이 대표적이겠죠.
물론 전 메소디스트나 뱁티스타가 아니지만 입으로만 믿음을 외치고 믿음의 증거로써 행동하지않는 자들(물론 그렇다고 프리스비티리언의 예정설이나 결정론자들을 비판하는건 아닙니다. 결정론적 예정설도 어차피 인간 입장서는 미리 예단할 수 없는것이기에 행동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따른 수정된 칼비니즘의 성격이 있으니깐요. 또한 동시에 요한웨슬리의 인간 자유의지론나 혹은 쯔빙글리의 신인협동설같은 구원론 이론이 옳다 그르다하는건 논외로하더라도요. 어쨌든..)은 전 이단보다 더 나쁜 도그마티즘에 함몰된 자들이라 봅니다.
글구 복음서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함께 파멸의 낭떨어지로 추락한다'라고 비유한 말씀 처럼, 현세 한국 기독교 교회의 목자라 불리는 자들은 자신 스스로 믿음대로 실천하지못하면서 타인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인도하는 줄도 모른채 근거없는 자신의 신념을 성경구절과 억지 연결시키는 인간들이 많죠.
이런 자들은 전부 거짓된 선지자로 보면될겁니다. 특히 한기총 전광훈이 같은 자들이 대표적이구요.
이런 인간에 대해 할말은 많으나 길어질거 같아 줄입니다.
결국 침묵의 동조와 연대로 한국교횔 부패하게 만든 것도 한국 개독교인들이니, 그들이 복지부동하는 한 자정도 기대할순 없을겁니다. 쩝.
구약 율법과 이스라엘처럼 완전 무너지고 멸망해야하죠. 달이 차면 기울듯 악이 가득차면 심판이 오는 성경역사와 계시를 안다면말이죠. 그리구 다 허물고 새로 써져야 합니다. 물론 제 2의 예수 강림이 있어야한단건 아니지만.. 어쨌든 과거 소돔과 고모라성이나 옛바벨론성의 타락과 멸망, 그에 준하는 뼈아프지만 반드시 새로운 희망이 있어야겠죠. 그런 의미론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재조산하의 심정이 아닐지..
글쎄요.
인과응보를 알던 모르던 저런 일을 저지르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래서 인과응보를 알고 모르고와 관계없이
저런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생긴다고 봐야 더 현실적일 겁니다
초등학교 도덕문제 맞추기 수준의 판별력은
장애인을 제외하곤 성인이라면 대부분 있으니까 말입니다
사람이 큰 죄를 저지르고 저지르지 않고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로 보는 분들이 계신데
그렇다면 선과 악을 구별하도록 가르쳐서
이해시키면 큰 죄는 저지르지 않아야 말이 될겁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몰라서 큰 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지요
사람은 선악의 구별에 대해 그것을 실천하고 실천하지 않고를
저마다의 영역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의 영역이 제각각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각자의 습관으로 실천과 비실천이 형성됩니다
이성판단의 습관이든 감정판단의 습관이든지요
심리적으로는 방어반응을 일으키는 연결고리가 되는 부분이죠
이 습관과 더불어 실천을 결정하는 또하나의 체계는
'매력적인 보상'이 기대될 때 입니다
이때는 자신의 습관적인 실천영역을 넘어서
보상적인 실천영역의 판단으로 자신의 실천이 결정되게 됩니다
이게 심리적으로는 도전반응을 일으키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아마 저 범죄자가 기대했던 보상은 '징벌'일 겁니다
그리고 피해자에게 세웠던 징벌의 명분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일테고,
자신의 망상일 뿐인 '징벌'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며
결국 자신의 기분이 "하나님의 뜻" 임으로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죠
'인과응보'란 개념을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만,
사람이 큰 죄를 저지르고 저지르지 않고를
예방하도록 의지하기엔 현실적인 부족함이 많은 개념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인과응보라는 그 개념으로 인해 징벌해야 할 시점을
사회가 미루면서 죄인은 온갖 부귀영화를 천수가 다할 때까지 누려온 바는
얼마든지 있고 또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통해 얻을 보상을 동경하며
치루어야 할 대가 대비 보상율을 기대하고 수지타산이 맞으면 죄를 짓고 있죠
그러나 죄인에게 실질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손실적 위협은
사람이 큰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예방하는데
상대적으로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는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며 판단의 주체를
자신으로 삼으라고 설파해왔지
판단의 주체를 맹신적으로 타인에게 위탁하지 말라며
맹신적 영역과는 분명한 구별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역할은 거기까지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제가 문제를 삼는 요지는 '실현'의 문제입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든 관념인 인과응보를 믿든 말든
영향력이 적다는 것이죠
선택은 습관을 다스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과응보가 습관을 다스리라는 의미로 설파되진 않습니다
관념의 계승적인 의미는 있으나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실현성'을 척도로 봤을 때
인과응보라는 관념의 믿음 만으로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대책으로는 부족하다는 견해에서 꺼내는 얘기입니다
발상님. 말씀들어보니. 하긴 범죄하는 순간 인과응보나 권선징악 사필귀정을 생각하고 저지르진않을거 같긴합니다.
갠적으론 타고난 성품과 후천적 교육상태와 그걸 받아들이는 태도가 삶에 어떻게 베어서 굳어져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척도로 봅니다.
사실 범죄가 일상이고 그걸로 먹고사는 악인이 아닌 이상, 범죄는 거의 부지불식간에 일어나거든요.
뭐 분노조절장애 같은 정신적 문제가 아니라면 예로 아주 지극히 일반인이라도 욱할수 있고 그게 본의 아니게 사건사고로 발현되는 경우가 허다하죠. 전문용어로 미필적 고의나 과실같은 범법말이죠.
그니 사고치는 경우는 계획범이 아닌 이상 거의 대부분은 우발적이라 인과응보를 두려워해서 범죄가 줄어드는건 아닌듯합니다.
실제로 양형과 범죄율의 관계가 반드시 반비례하는건 아니란게 국제인권법연구회나 국제판례법연구회 연구논문과 관련 통계로 인해 법조계에선 통설로 읽혀지지않습니까.
사형제도존속여부를 놓구도 천부인권을 강조하여 반대하는 인권단체가 주장하는 바도 마찬가지죠.
사형이 있다고 강력범죄가 더 줄어든다던지 또 없다한들 더 늘어난다는걸 과학적 수학적 증명할수 없으니말이죠.
우리가 한번 재고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타고난 성품이란 점일 겁니다
학계의 관찰에 따르면 아직까지 인간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결정하는
DNA는 단 한 개도 발견된 바 없습니다
간접적으로 피가 빨리 돈다든가하는 식의 간접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DNA는 발견된게 좀 있습니다
옛말에 "인품은 천품이다"란 말이 있는데,
이는 오해라고 봐야할 것 입니다
성장기 아동이 후천적으로 무슨 영향을 받는지 몰라
어떤 성품을 형성하는지 헤아리지 못했던 세대들의 오해인 탓 이겠지요
아동은 그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맞는지 맞지 않는지 헤아릴 역량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동물과 비슷한 것이죠
그러나 동물도 훈련이 가능하고 아동도 환경의 영향이 절대적인 이유는
동물이든 인간의 아동이든 그것을 지속해도 된다는 판단의 근간이
"심리적 안정감"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개체든 이런 저런 자유와 방종을 구별하지 않는
마음대로의 판단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심리적 안정감"을 주느냐 마느냐가
그 체계의 판단을 지속해도 되느냐 아니냐의 '선택'이 됩니다
이것이 어릴때부터 그 대상이 어떻게 자라도 되느냐의 판단주체로서 핵심이 되는 것이죠
이는 보편적으로 어릴 때부터 청년기까지의 시기에 형성됩니다만,
부실한 판단력을 형성해왔고 심리적 안정감을 확보하는 판단력을 확보하지 못한채
나이를 먹어왔다면 이를 나이들어서도 시도하게 됩니다
'사형' 제도는 거리감이 있습니다
인간의 사회생활은 윤리적 영역에서의 처분을 넘어가야
사법적 처분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기에 여기까지 넘어올 정도면
적어도 현실적인 미래전망의 판단력에 부족함이 있는 사람들이
여기까지 오는 것이라 봐야할 것이고 그 사람들 자체가 그리 많진 않기에
"사형제도"가 그다지 효과가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사법적 영역으로 이전되기 이전의 윤리적 '징벌'이 유력한 효과를 낼 것이고
기독교든 불교든 이 징벌을 생략하는 종교에 허술한 점을 지적하고 싶어서
꺼내는 이야기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상인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의 실현이라는 것도 제 견지에서 볼 때 위의글에 이미 밝혔듯이
중생의 사회적인 관계에서도 중생의 업과 장악(障惡)에따라 그 과보가 나타난다 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중생의 죄의실현도 (현생의 업과 장악)에 따라 나타난다 봅니다
선천적으로 심성이 착하고 나쁜업장이 없는 중생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발적이거나 죄의실현은 그 가능성이 적다고 봅니다
만약 언뜻 봤을때 우발적이거나 죄의 실현이 현생에 있다면 죄의 실현에 앞서 죄의실현이 나타날 (원인)이 먼저 나타날겁니다
예를들면 말입니다
길을 걷다가 상대방과 어깨가 부딪혀 순간적이고 우발적인 칼부림이 났다면
당연히 사람과 사람의 어깨의 부딪힘이 그 원인이 되겠죠
결과라는 것도 지금의 업은 물론...사람의 장악이 많거나 없음에 따라 인내심도 차별이 있겠죠
다시말해서 그 사람의 심성(장악에 따라 심성이 기본적으로 착하거나 악할수도)과
인내심(현생의 업)에 따라 칼부림이 있을수도 있고 없을수도 있겠죠
이 세상엔 내것이란 없어 항상 홀로 갈뿐이다 그 눈에 넣어도 안아픈 내 새끼 조차 인연이 다하면 떠나는 법이거늘
그 무엇이 내것이라는 이름하여 같이 머물고 같이 갈것인가? 다만 인연이 다하면 떠나는 법 내것이 없으니 나의 수족이랄것도 없어 그 인연에 충실할 뿐인것이다 한 생각이 세상을 만들고 그 한 생각은 한 마음에서 일어나니 마음은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은 곧 세상을 만드는 법 그래서 순간순간 깨어있으라는 가르침을 상기해 보아야 할것이다
^^ 그대는 필자에게 관심이 많구려 또한 필자는 그대에게 예를 바란적이 없소 설사 육두문자를 언급한다한들.. 아무런 상관이 없이 동요가 없을테지만.. 왜? ㄱ ㅅㄲ라 한다 한들.. 필자가 ㄱ ㅅ ㄲ가 아님을 알듯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필자가 그 육두문자의 대상이 아닌걸 직관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리고 필자는 지식이 미천해서 그대의 미사여구의 글의 뜻을 깨쳐보질 못하오 8만4천 법문조차 비우기가 버거운데.. 세간의 논리적 지식은 말해서 무얼하리..필자는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글을 알아듣는다오.. 그래서 필자는 그대의 지적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이해하시오
위 댓글 토론을 보니 과거 2005-6년도의 한겨레 종교토론방(종교토론의 사관학교임. 모든 기독교안티 종교안티들이 득시글)의 리바이벌을 하고 있군요. 그 한겨레 종교토론방을 그냥 종식시킨 유저가 바로 나 유전입니다. 반기독교연합?(연합이 아닌 연맹? 영문으로 안티크리스트 사이트 주소임)이든 뭐든 그때는 디씨가 흥행하기도 전이어서 모든 인터넷 가십은 한겨레가 네이버나 다음 보다 더 높은 수준이었을 때 그 모든 종교 또는 철학적 논객들을 다 잠재우고 특히 안티크리스트 라고 하는 반기독교연합에 몰려 있는 모든 종교인들(무당을 포함한 도교 불교 무신론자 등)에 대해 오로지 나 혼자 가장 강력하게 모든 논설을 논파하여 결국 반기련이 공식적으로 철수 했음을 알립니다. 그 당시의 반기련 논객들은 내 앞에서 감히 썰을 풀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나 헛소리나 욕질만 할 뿐이죠.
그냥 올리는 글마다 되도 않는 속좁은 선비질이어서 자네가 내게 신경 끊겠다고 하기에 잘됐다 싶었을 뿐인데 또 변덕이 심해 이제는 말을 바꿔서 내 정신을 해부해 본다고 하는군. ㅎㅎ 하든지 말든지 내 소관은 아닌데 이왕이면 자네 정신 수준이나 높이고 하면 좋겠네. 내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수준 낮은 초딩 수준이라 별로 대꾸해야 할 말이 있을지나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