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지청수님과 헬로가생님께 드리는 댓글에
초점을 맞추려는 글이었던 지라
제 나름의 이해를 비교적 단순하게 제시해보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러면 납득을 갖는데 어려움이 있으실 듯 합니다
마침 확증편향님의 댓글을 보니 이 부분을 좀 더 보강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깔아둬야 구체적이고 분명할 것이지 싶어
유아기에 대한 논거를 보강하도록 방향을 선회합니다
우선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감정의 조건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감정을 형성하는데는 몇 가지 필요조건이 있습니다
크게 3가지인데,
첫째는 사고방식이고 지금 쓰는 글들에서 전체적으로 다루려는 논거이니
전반적으로 다룰 겁니다
둘째는 '믿음'입니다
왜냐면 자신의 비언어적인 감성을 언어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믿음이 되지요
어릴때일수록 스스로의 감성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되고,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규정에 대한 불확실성을 고려하기 때문에
규정과 믿음의 내적 거리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셋째는 '중요성'입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는 감정을 갖지 않습니다
사소한 중요함과 매우 중요함의 사이에서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지
중요성이 없다면 '무관심'으로 이행될 뿐 입니다
이 3가지를 고려해보시고 이후의 논거에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다음의 논거를 고려하면 한결 쉬운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싶습니다
유아는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육체적으로 너무도 무능해서
보살핌이 절실한 무력한 상태로 세상에 나옵니다
이를 유아 나름대로 완전히 못느끼는 것은 아니기에 강력한 불안의 느낌과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의 강력한 즐거움의 느낌 모두를 갖게 됩니다
이런 사정상 유아의 장기적인 무력감은 유아기의 특징이 됩니다
그러나 유아가 완전히 무력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인간의 유아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을 제공하면서
아이의 결여를 채워주는 환경과 보살피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보살피는 존재들은 유아의 초창기에
아직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체의 인식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아이의 결여의 충족에 대한 강력한 바램을 중점으로 운영되게 되죠
초창기 유아는 고통스럽거나 침입된다고 느끼는 자극을 제거하고,
완전한 행복(즉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의 완전함) 혹은
무언가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은 상태로의 회복(즉 평온)을
확보할 필요성만 강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유아의 눈에 비치는 대상들의 세계 속에서 아이의 이러한 필요성에 대한 결여를
충족시킬 대상인 보살피는 존재는 매우 "중요"해 집니다
이런 중요한 존재가 된 보살피는 존재는 자신과 별개의 대상이 아니라
유아자신의 상태(일체의 인식인 관계)가 변해가는 변형과정으로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유아를 보살피는 대상은 이런 유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유아의 환경을 바꿉니다
이것이 반복되며 유아는 그 대상과의 공생적 앎을 통해
이런 보살피는 존재의 역할을 자신의 변경과 동일시하며,
자신을 환경과 신체적 돌봄을 받는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아직 이 시점에선 자신과 보살피는 존재가 타자로서 구별되기 전이기 때문에
이런 변형적 대상과 자신의 동일시를 통해 대상과의 관계들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형성된 열망들은 우리 생에 전체에서
알수 없는 흔적이자 욕구로서 깊숙히 자리잡게 됩니다
이것은 "완전한 행복의 재림"과 이를 인도해 줄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욕구"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만 여전히 완전한 무력감 상태에 있는 유아는 자신이 경험하는
변형과정으로는 여전히 자력으로는 거의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저 유아의 입장에선 "번개가 치듯 빛과 즐거움의 갑작스러운 침투와 함께 도래"
하는 것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게 됩니다
이렇게 유아가 인식하는 외부세계는 유아의 결여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자신의 결여를 충족시켜 줄 완전한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모든 것이 완전한 전지전능감의 이상형을 갈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아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보살피는 존재에의 의존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보살피는 존재가 제공하는 충족에 의해 아이가 갈구한 전지전능의 세계와
다시 연결되기는 하겠지만 다시 현실에서 결여의 시간을 보내면서
갈구와 현실은 엇갈리게 됩니다 현실은 자동이 아니니까요
유아의 입장에선 의존 없이는 충족이 없기에
유아의 인식에서 외부세계는 불확실성과 위험이 가득하고
모종의 구멍이 많아서 불안한 세계일 따름이겠죠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아이의 인식능력이 발달하며
아이는 곧 자신의 부분과 환경의 부분을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이 구별이 좀 더 확실해질때까지 시간이 걸리며 이는 일종의 깨달음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보살피는 존재에 대한 전체적인 판단은
자신의 욕구가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유아의 보살피는 존재에 대한 판단비중은
생존의 장소이자 평온을 주는 보살피는 존재의 몸이게 됩니다
이때 쯤에 일부의 초보적인 감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배고픔이 밀려오는데 이로부터 구원해줄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의 두려움...
영양과 평온의 원천에 대한 사랑과 같은 감성입니다
비록 흐릿하고 불분명하나 강력합니다. 딴 생각을 안하니까요
젖을 많이 먹이면 어머니의 수유와 그 위치가..
분유를 주로 먹이고 아버지가 주로 안아주면 또 그 위치가..
아이에겐 거기가 반복성의 중심이라는 자신에 대한 초보적인 생각과
자신의 결여가 거기서 충족된다는 일련의 기대가 형성되고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유아의 판단이 "자기중심적인 판단의 기원"이 됩니다
이상적인 보살피는 존재는 먹을 것을 비롯한 모든 것을 제때에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보살피는 존재도 나름의 계획이 있습니다
이런 유아에게 '좌절'은 유아 스스로 움직이려고 애쓰는 동기가 되며,
유아가 아이가 되기까지의 발달과정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런 유아의 자신이 가진 결여의 충족이 분명한 중심이라는 판단이 강할수록
자신을 보살피는 존재가 자신을 항상 충족시켜주지 않기에 발생하는 거리감을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며 이윽고 자신을 보살펴주는 존재조차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쯤부터 유아의 인지능력은 급속히 가속됩니다
그리고 보살피는 존재로 인해 유아가 충족을 느낄때는 사랑의 감성을..
보살피는 존재의 부재로 인해 결여가 커질수록 분노의 감성을 갖게 됩니다
유아에겐 독립이 불가능함으로 의존이란 측면에서만 보면 납득이 될겁니다
아이의 의식이 성장해가면서 이 감성은 더 선명해 집니다
이러한 기원으로 인해
사랑은 자신을 이롭게 하는 외부적 힘에 대한 인정을 수반하게 되고,
분노는 자신을 해롭게 하는 외부적 힘에 대한 인정을 수반하게 됩니다
다만 유아로서는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해석을 갖는게 필연적임으로
충족을 주지 않는 것은 대부분 고통입니다
그래서 모든 보살피는 존재는 자신과 분리되어 있고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고통의 원천이 됩니다
이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전지전능한 신의 탄생 동기라고 봅니다만 일단 요 얘긴 접어두죠
이런 유아의 내적세계가 가진 전지전능함은 자신의 무력감과 대조를 이룹니다
유아가 점차 보살피는 존재 이상의 타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되고
이와 맞물려 세상의 중심이고 그래야 한다는 분명한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그 결과 원초적인 수치심을 갖게 됩니다
수치심은 자신이 충분하길 기대하는 어떤 면에서 자신이 나약하고 불충분하다는
괴리에서 잉태되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는 아이라고 불러야할텐데,
이를 가진 아이의 반응은 이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부족함을 알 수 있어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언어학습을 통해서 온전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되지요
물론 아이는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을 갖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이로서는 그저 신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망각된 경험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게시판의 맹신도들의 반응 및 대응을 보면서
그들의 심리를 추론해보면 상당히 가깝다는 점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이 정도 이야기를 꺼냈으면 이제 환원적인 사고관과 합리적인 사고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꺼낼만한 기반이 잡힌 듯 합니다
술 더 먹고 잘까 그만 먹을까 생각과 내일 또 술약속 있는데
어쩌나란 생각 사이에서 오늘은 이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