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세 대신 아브라함에 대한 걸 떠들어볼까 합니다.
모세에 대해 할 말이 없어서 아브라함에 대해 말하려는 건 아니고,
아브라함에 대한 분석론이라고 해야할까, 방법론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게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동일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늦둥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고,
아브라함이 그 지시에 따르려고 하자,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기 직전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을 말리고
근처 수풀에 걸린 양 수놈을 대신 바치게 하는 일화가 나옵니다.
이 일화는 여지껏 수백 수천년 동안 교회(구교든 신교든)가
일반 신도들을 착취하는 근거가 되어 왔습니다.
자기들이 그 어떤 무리한 요구를 강요해도 신도들은 그거에 대해 비판하지도 말고
무조건 따르라는 도그마가 되어 왔습니다.
자, 여기서 시선을 조금 돌려 바빌론으로 가보겠습니다.
동양 역사의 아버지 사마천이 있다면 서양 역사의 아버지는 헤로도토스이고,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i'라는 저서는 고대의 역사뿐 아니라
고대의 풍습에 대해 방대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흥미로운 저서입니다.
헤로도토스는 바빌론의 (가장 좋지 못한 풍습이라고 스스로 코멘트를 남겼을 정도의) 풍습에 대해 남겼는데,
바빌론의 여자는 반드시 일생에 한번 여신의 신전에 가서
낯선 남자에게 몸을 팔아야 합니다.
남자는 신전에서 여자의 무릎에 은전을 던지고 “여신의 이름으로”라고 말하고
여자를 데리고 갑니다. 이것으로 여신에 대한 봉사가 끝난 여자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풍습이 왜 생겼는지 헤로도토스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추론은 가능하죠.
중세 서양에서는 지방 영주들에게 초야권이란 말도 안되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왕에게 하사받은 봉지 안에 거하는 여자들이 결혼하기 전
그들의 첫날밤을 영주가 취할 수 있는 권리 말입니다.
권력을 쥔 남자들의 추한 욕망이 만들어 낸 권리인데,
바빌론의 그 풍습도 이런 추한 욕망의 연장 선상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좀 다르게 해석합니다.
결혼 자체가 매매혼이었던 고대에는 처녀인 딸은 제법 재산 역할을 했습니다.
남자들도 당연히 자기의 자식만을 낳고 키워줄,
딴 남자에게 눈길 돌리지 않는 여자를 필요로 했고요.
많은 대가를 치러 처녀를 사왔는데 이 여자가 알고 보니 처녀가 아니었다,
내 자식인 줄 알고 키웠는데 실은 딴 자식이었다,
뭐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고 법적인 다툼이 생기니까,
게다가 고대의 신전은 법정 역할을 했으니
이걸 중재할 고대 바빌론 사제들이 대안으로 내놓은 게,
출가 전의 아가씨들이 신전에서 매춘을 하는 거였다고 추측합니다.
신의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처녀성을 지워버리니
남자들이 매매혼에서 불만을 표할 일이 없어진 거죠.
그럼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매매혼에서 처녀성에 대한 분쟁은 해결됐는데
그 여자들이 낳은 자식들은 어쩔 거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걸 해결하는 방도가, ‘너의 첫 소산을 신에게 바쳐라’라는 종교 교리입니다.
여자가 낳은 첫 아이가 신전 매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남편과의 관계로 인해 생긴 애인지 분간할 수 없기에
신에게 첫 소산을 바친다는 대의명분으로 첫 아이를 죽이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그건 고대 바빌론에서만 해당되는 얘기고
바빌론이 아닌 다른 나라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이나 고대나 강대한 국가의 문화 전파는 막을 수 없습니다.
아시아는 핼로윈과 아무 접점이 없는데도 지금 핼로윈 파티를 즐기고 있으며
자국에 기독교 인구가 적은 나라조차 크리스마스를 즐깁니다.
고대 바빌론의 문화는 인접 국가에 전파됐고
그 문화는 애초 생긴 취지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해도 전파됩니다.
빼빼로데이는 부산의 여고에서, 졸업 후에도 우정을 간직하자는 의미로 시작됐지만
지금은 연인 사이에서 더 퍼지고 있고
‘졸업 후의 우정’따위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아기를 신에게 바치는 인신제물의 풍습은 현대의 관점에서는 끔찍해보일지 모르겠지만
낙태가 불가능한 고대에서는 태어난 아기를 책임져줄 남자가 없을 시에
이를 해결할 가장 무난한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자, 너의 첫 소산을 바치라, 라는 주위의 압박이 아브라함에게도 해당됩니다.
성경의 독자들은 너의 첫 소산을 바치라는 요구가 여호와의 요구였다고 읽었을 것입니다만,
이건 신의 요구가 아닌, 문화 관습적인 주위의 압박입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의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이쯤에서 우리의 전래 동화를 걸고 넘어갈까 합니다.
밤중에 손발톱을 깎아 아무 데나 버리던 사람은
그 손발톱을 먹은 쥐가 그 사람으로 변하여 사람 행세를 하니
지나가던 스님이 고양이를 이용해 그 쥐를 쫓으라 하니 그 방법대로 해서
사람으로 변한 쥐를 쫓아냈다는 전래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에 워낙 게으른 사람이 있었는데 먹고 눕고 먹고 눕고 통 일은 안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밥을 먹고 느긋하게 누웠는데 갑자기 몸이 소로 변해서
가족들이 소로 착각하고 이 사람에게 멍에를 씌워 낮에 논밭을 갈게 하고
엄청 일을 부려먹으니 이 사람이 자기 삶을 후회하다가 지나가던 도인의 도움으로
원래 사람으로 돌아와, 성실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는 사람들의 눈이 어두워 사람과 소를 분별하지 못하고
사람을 소로 착각해서 서로 잡아먹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현실을 슬퍼하며 자기 살던 마을을 떠나 유랑했는데
어느 마을에 가니 자기를 소로 착각하지 않고 사람으로써 반겨주는 데가 있어서
그 사람이 놀라, 여기는 왜 사람과 소를 착각하지 않느냐 물으니
밭에서 나는 대파를 가리키며, 저걸 먹으면 눈이 밝아져
사람과 소를 분별하게 된다 일러줬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마을로 돌아와 대파를 잔뜩 심고
마을 사람들에게 대파의 효능을 일러줬습니다만,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을 소로 착각하고 그만 잡아먹었습니다.
얼마 후 마을 사람들은 밭에 난 대파를 보고 궁금해서 먹어봤는데 그때부터 눈이 밝아져
서로 잡아먹는 일이 사라졌다는 동화가 있습니다.
이 동화를 지금의 현대인이 읽으면 그 동화의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밝은 전등이 없던 옛날, 밤에 손발톱을 깎으면 그 조각을 찾을 수 없어 밟게 되니
밤에 손발톱을 못깎게 하려고 그런 동화를 만들어 낸 것이고
게으른 사람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밥 먹고 바로 눕지 말라는 동화가 나온 것이고
대파 먹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저런 동화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일화는 저 한국의 전래동화가 만들어진 동기와 똑같은 겁니다.
늦둥이로 어렵게 얻은 아들을 주위의 관습으로 죽일 수 없기에,
아들 대신 수컷 양으로 대신 바치라고 신이 말했다고 주위에 변명을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추앙합니다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는 신의 명령이라면 맹목적으로 따랐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게 아니고
고대 종교의 폐해를 거부했기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지 않고 수컷 양으로 대신한 것은
마틴 루터가 가톨릭에 저항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모든 세대를 통틀어,
믿음의 선각자들은 기존의 악습을 거부하고 인본주의를 내세웠습니다만
권력을 쥔 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믿음의 선각자들을 자기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교묘히 이용해 왔습니다.
이렇게 길게 아브라함에 대한 얘기를 떠든 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아브라함도 기존의 종교적 악습을 거부하고 인간에게 유리한 새 규칙을 세웠지만
권력을 쥔 자들은 이런 종교 혁명가들조차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악용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게 종교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