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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4-04 06:21
깨달음이라는 허상을 쫒아봐야 매번 그자리.....궁좌실제중도상 (窮坐實際中道床)
 글쓴이 : 방랑노Zㅐ
조회 : 1,198  

현대 사회는 복잡다단 합니다 
고대의 동양전통에서는 희노애락 애오욕 이라 하여 인간의 감정을 
미숙하고 어리석은것으로 판단하여 사단칠정이라 부르며 자제하기를 종용해 왔습니다
즉 부정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이르러 인간에 대한 심층적 탐구가 더욱 깊어지며 
인간의 감정 감성 영역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방식으로 변화되어 오고있습니다 



궁좌실제중도상 (窮坐實際中道床)

중도는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 당시부터 양극단을 여읜 일관된 수행방편으로 중요시되어 왔다. 
‘일승법계도’에서는 중도자리가 수행방편에서 더 나아가 수행의 결과, 
법성을 증득한 실제의 열반 자리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 “궁좌실제중도상”에 대한 의상 스님의 법문을 보자.

‘실제(實際)’란 법성을 끝까지 다하기 때문이다. 
‘중도(中道)’란 두 변을 원융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는다[坐床]’란 일체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법계의 열 가지 열반의 광대한 보배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체를 섭수하므로 
‘자리에 앉는다’라고 이름한 것이다. 
‘보배’란 귀하기 때문이며, ‘자리[床]’란 곧 섭수하여 지니는 뜻인 까닭이다.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어느 하나 버릴것이 없다는 말 이기도 합니다 
단점과 장점 
인간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 모두를 어느쪽에도 치우치지않고 모두 수용하므로 
기준점을 짓지않고 무한히 진행하는 인간정신 또는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추구한 
철학적 귀결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본성을 억 누르기가 아니라 
본성을 살려  더 행복해 지기가 바로 중도상 (中道床) 이라고 여겨집니다  

조언바랍니다 

언제나 예리하고. 특성 사상에 치우치지 않는 의견 담론으로 댓글 적어주시는
고마우신 가생이 철학게 유저분들의 의견 바랍니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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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지2 21-04-04 10:12
 
잘못된 된 말을 한 것 같네요..
중도란 쌍변을 말하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이그러지거나 변형 등.... 그 사실이 없다 하는 것은 아니에요...

거짓말을 ....
새벽바다 21-04-04 17:34
 
불교는 참으로 어렵죠
연기의 가르침은 쉬운듯 하면서도 사람들의 유견상(有見相)으로
인해서 더욱 이해하기가 어렵죠

게다가 일체는 오직 식(識)이라는 가르침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죠
물질과 정신으로 이분법적으로 고착되어온 사고방식이
오직 식(識)임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불교공부는 수십년을 두고 천천히 공부해야 이해되고
어렵게 이해되어진 만큼 큰 기쁨을 맛보게 된다고 봅니다

대승불교위주에서 현대의 한국불교공부가
초기불교 티벳불교가 함께 유입된
한국불교공부가 더욱 확장되어 좋은현상이라 보여집니다
     
방랑노Zㅐ 21-04-05 02:36
 
밀레라빠와 나가르주나를 통해 접하게 된 티벳불교는
독특하면서도 여전히 흥미를 가지게 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더군요
특히 티벳의 성자들이라 불리는 싯디 들의 개성넘치는 모습들은
오백나한 들의 개성넘치는 모습과도 연관되어 보입니다
새벽바다 21-04-04 18:11
 
연기를 공부하다보면 필히 중도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연기라는게 연이 있으면 결과가 나타나고
연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져서 사람이 보고 듣고 아는것
모두가 있는것도 아니요 없는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연에따라 나고 사라지는것에 집착해
모든법의 연기의 가르침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죠

중도의 가르침을 풀어논 논서가 있죠
근데 그걸봐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쉽지도 않지만
물질적 유견상 내지 정신적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유견상이 많아
연기의 가르침 즉 중도의 가르침이 더욱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방랑노Zㅐ 21-04-05 01:24
 
많은 수련단체들이 깨달음이라고 부르짖는 허상 으로부터 어렵게 벗어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준것이 중도의 가르침인데
이것을 체현하고 일상속에 녹이기란 참으로 힘들더군요
한방에 이해하고 체현하기 어려우므로 차근차근 실현해 가는것이 숙제로 남습니다
돈오 후  점수라는 현대 선불교 수행방식도 그런측면에서 상당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여겨집니다
언제나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팔상인 21-04-04 22:23
 
불가의 교리에 대해 방랑노재님의 해석은 감사드립니다
불가쪽 용어는 너무 그들만의 일정이라
그쪽으로 몸담은 분들 말고는 접근성이 안좋습니다
다만 그런거야 뭐 학계마다 다들 보편적인 불편들이니 제쳐두고..

제 사견을 피력하자면,
저 내용의 해석이 "사상의 성숙"이란 측면에서 볼 때
"실증적 측면"에서 "충분히 성숙"한 해석이냐는 관점으로 살필 필요를 전 찾습니다

실증적 측면에서 성숙한 해석이라면 바로 삶에 쓰여도 만족스러운 것이겠죠
그런데 저 해석을 바로 삶에 적용할 때 만족스러울까요? 먼저 자기 자신에게요

바로 삶에 적용하려면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즉 논증적 명료성을 가져야 그것이 자신의 정당성을 논파하는 실용성을 갖게 하지요
타인과의 토론에서 자기 주장의 정당화에 써먹을 수 있게 되니 말입니다
논증되는 정당성은 정당한 위엄의 기초가 되고
그것이 삶의 자신감으로서 토대를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동시에 교리의 모호함이 갖는 상징적인 방향을 잃지 않음도 가져야 하죠
이런 두 요소가 징검다리들로 적절히 놓여있다면
충분히 삶으로서 밟아볼만 하니 말입니다
*다만 이런 명료와 상징을 동시에 갖는게 일정한 예술성을 내포하기에 쉽진 않으나
 사이비들이 쉽게 표절하지 못하는 진정한 심미적 차별성이기도 합니다

이런 자기주장의 정당화는 상대에게 와닿게 표현하게 되기에 유력할 가능성이 높은데,
불가의 단순히 "인간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 모두가 써먹을데가 있다"는 표현만으로는
대단히 모호한 면도 강합니다

특히 불가에서 말하는 중용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가 "징벌"이 필요할 때
그 징벌을 미룸으로서 그 징벌의 대상이 생을 다할 때까지 미루어
징벌의 미룸이 대를 이어 보류되는 적폐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주의하는 좀 더 구체적인 중용의 개념이 필요한데,
아직 불가쪽에서 그런 개념의 중용을 논파하는 것을 전 접한바가 없습니다

이를 이루어내는 불가의 중용이 논파된다면
그것은 분명 한단계 더 성숙한 중용일 것이라고 봅니다
이를 이루는 불가의 논거가 논증적이자
동참할만한 상징성으로서 동시충족되는 예비를 갖추고

논증적 토론기회(혹은 비판적 토론기회)를 서양사상계에 청할 때
서양사상계의 마지막 논제이자 인문학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으로서의 미학"을 이해하는 분들과 흥미로운 토론시간을 갖게 될 겁니다
아마 그게 저라면 이성감정의 형성과정과
감성의 축을 이루는 '인상'을 거론하게 되겠네요

서로 그 정도 준비하고 토론을 해보면
진리를 추구하는 출발이 다른 시작점에서
결국 가고자하는 방향이 비슷한 지향의 '동료'였음을 직감하면서
불가와 연결가능한 고리가 발견되실 수도 있을테니 흥미로울 겁니다

이를 만약 제가 대상이 된다면 전 "저의 삶"과 "서양사상"을 토대로 논증할테니
상대가 되는 불가쪽에서도 본인의 삶과 불가사상을 토대로 논증하시면 적합할 겁니다
다만 여기서의 논증은 논리학의 형식을 준비하시라는게 아니라,
자기 삶에서 "왜" 그 불가의 사상을 받아들였냐의 이유를 세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걸 세우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아야
지적으로 즐거운 유희와 보람이 동시에 있는 결론을 향해 이야기가 전개될 겁니다
     
방랑노Zㅐ 21-04-05 02:38
 
언제나 예리한 분석의 글에 감사드립니다

접근성의 문제는 전문지식에서 늘 나타나는 용어적(특히 전문용어) 이해의 벽이
존재하므로 탐구를 통해 해결 할 수 밖에 없는 측면이라 생각됩니다

공학도 였다가 잠시 승려생활을 하다가
현재는 노장사상에 심취해 있는 제 지인과의 이야기중에 나온
" 불교사상이나 동양사상을 이해하는데는 philosophy를 탐구해본 존재가
불교사상에 대한 통념적 이해도가 더 빠를 수도 있다"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인식과 실재의 문제를 쉽게 섭수하여 그것이 통합된 형태를
불교사상에서 읽을 수 있다는 말인데
승려생활만 해온 존재보다는 법문에 대한 실용적 이해도가 더 높다라고
승려생활 경험을 통해 말하길래
상당히 공감가는 이야기 였습니다

말씀하신 진리를 추구하는 방향이 출발이 다르지만 지향점이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글에는 백퍼 공감합니다
인간의 더 나은 삶에 대한 갈구이자 탐구가 철학이라는 분야에서 분명한 방향성을
(과학보다도 오히려 더 궁극적인 ) 제시하므로 의미있다 라고 여겨집니다
현대 첨단 사회학 심리학 생태학 양자역학등이
대표적 동양사상중 하나인 불교사상을 이해하는데 방해요소가 아니라
더 비판적(긍정의미로서의 비판) 분석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제 경우는 서양사상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실증을 느끼고
(특히 기독교와의 상호적 영향으로 흑백의 구분이 너무 분명한 헬레니즘 - 로고스 카오스 사상체계 - 예외로 소승불교 수행자를 연상시키는 헬레니즘의 반항아 니체같은 인물도 있지만 )
이후
접하게된 노장사상이 불교로 연결되고
(유학사상은 너무나 시대와 맞지 않다고 판단되고 교조적 덕목 이라서 여전히 흥미가 없습니다)
불교 - 그중에서도 교리적 탐구인 교종보다는
직관적 탐구인 선종에 관심을 두게 된 원인자가 됩니다
간명하게 표현한다면 "자유" 라는 화두에 심취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불교사상의 실증적 이해야 말로 불교사상이 일상에 녹아드는데 가장 큰 요소라 생각됩니다
이것 역시 저한테 남겨진 숙제이기도 합니다
애매모호한 관념론이 아니라 체험론의 결과가 불교가 (붓다의 사유와 체현)
온갖 신비주의와 잡신사상으로 얼룩진 인도에서 그것을 깨트리며 태동하는데 중요한 기점이 되었으니까요

묵직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방랑노Zㅐ 21-04-05 03:13
 
PS : 21세기의 동양사상은 불교사상이 단연 탑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학은 이미 맞탱이가 가기 시작했고
한반도에서도 조선조 5백년간 신유학이 탐구 되고 실험 되다가 실패하였으며
중국에서도 문화혁명이후 사라져 갑니다
노장 사상은 그 맥락이 남아 중국 한국 일본등 -북동아시아에서만 탐구됩니다

불교사상은
히말라야일대 티벳 몽골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 일대 전역에
현시점에도 남아서 활발히 진행중입니다
태동지인 인도에선 오히려 유적만 남아 있는 아이러니가
               
팔상인 21-04-05 22:49
 
동양사상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상식수준에서만 단순 이해하는 터라
그에 대해선 불가의 이념이 정점인지는 제가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동양의 사상에도 장/단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느냐가 핵심이며
마찬가지로 서양의 사상에도 장/단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느냐가 핵심일 뿐입니다
그저 그 장/단의 판단에 전 논증을 세울 수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동양사상에 정통하다 보는 분들이
그 견해의 정당성을 이런 기준으로 온전히 표현하길 바라는 것 뿐이죠
그래야 온전한 전제로 소통이 되거든요
망상을 전제로 삼는 자들과 소통이 안되는 것과는 대치되는게 이런 점이죠

그 정당성의 표현이 타인에게 동감/공감을 얻을 수 있고
동양이든 서양이든 이 동감/공감을 얻어내는 것이 진정한 '공유'가 될 겁니다
그 지향이 기독에선 전도의 지향이겠고 하고
불가에선 대승의 지향이겠거니 합니다

한편
순수하게 훌륭했던 사상들이 그 태동지에서 빛을 잃어버린 이유가 뭘까요?
그건 아이러니가 아니라 '순수성'을 그 태동지에서 잃어버렸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전 아이러니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게 순수성을 잃어버리거나 버릴만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기류가 있었겠죠

자주하는 얘깁니다만,
세상에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견해엔 동의하실 겁니다
그걸 '필연'이라고 부르지만 세상엔 '우연'이라는 표현도
현실의 세상엔 필연과 대치될 만큼 많습니다

사람은 어떤 현상이냐 개념을 '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인과를 이해하고 인에서 과로 이어지는 과정을
표현할 수 있어야 온전히 '안다'고 표현해도 되는 것이 될겁니다
이것이 바로 '왜?'의 내용을 이루니까요

그런데 언제나 필연을 규정할 때 알아야할 무언가가 있는데
대체적으로 파악할만한게 개략적으로는 파악된거 같은데

그 인과의 과정을 표현하기엔 알아야할 게 뭔가가 더 있을 것 같은데
그게 파악이 안되니까 그 규정의 표현이
어렵고 그 어려움을 반영한 개념이 아이러니기도 하죠

그러나 거기까지도 애쓰지 않으니 깔끔하게 때려치고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싸잡아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할겁니다

그래서 구체성이 중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 구체성이 필연과 우연을 온전하고 명료하게 구별시켜 줄테니까요
               
방랑노Zㅐ 21-04-06 08:03
 
길이 너무 길어지는것을 방지하기위해 (불교사상 전체를 다루기엔 역량도 부족할 뿐더러 너무 방대하므로)
언급된 소 주제만 가지고 제 견해를 적어본다면

장단점 :
1.동양사상 - 도피적이고 비물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고답적인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인이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데 크게 도움이 되며
이타주의 평화 자비 평등 등의 인간정신의 뛰어난 덕목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데 기여한다
소규모 단위 공동체의 삶에 순기능을 발휘한다

2.서양사상 - 실용적이고 개량적이며 인간생활의 여러 물리적 과학적 편리함을 가져다준다
 합리적사고를 통해 실용성이 극대화 되며 제도가 잘못되었을때 개선점이 바로바로 나온다
그러나 무분별한 발전.개발의지로 인해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다
(히틀러의 생체실험을 통해 발전된 현대의학)
(살육적인 세계대전을 통해 발전된 현대 과학)
(산업화에 따른 생태계 파괴와 대기오염 코비드19의 발생동기 제공)
특히 기독교를 앞세운 열강제국주의시대 파괴성은 잔인하다 못해 패악적이다
이기주의의 극치라 할 수도 있다

열거한 내용이 일반화의 오류가 포함된 시각이라서
각개인에 따라 많은 변수가 작용하지만  아무튼 통념적으로 볼때
이런모습을 보입니다

동양사상이 애매모호 하고 어려워보이는 이유가
언어적문제가 아니라 ( 희랍어에 어원을 지닌, 독일어나 영어 불어등 고급전문어로 쓰여진 철학서들도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 해당언어를 사용하는사람들도 혀를 내두르니까)
동양사상은
분석적이 아닌 관조적이며 수많은 현상들을 종합해 이해하는 통합론 또는 통섭적이기 때문에
인생사 경험치가 적은 젊고 어린나이엔 이해하기 무척 어려운 난제입니다

제 경우엔 어린나이엔 전문용어로 가득한 서양철학서들이 더 쉬워보였고
나이든 지금에야 접근성을 지니며 동양사상이 어렵지 않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불교사상이 초심자에겐 뜬구름 잡기 같아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관념적 망상을 털어버리고 사물을 직관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초능력이나 신비주의 사후세계 예언 따위는 발디딜 틈도 없습니다
이런 깊은 심도를 이해하지 못한 사이비수련단체들에서 깨달음이라는 허상을 강조하며 허송세월하게 만드는것입니다
               
방랑노Zㅐ 21-04-06 08:47
 
끊임없이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가설이나 이론을 창출하며
변화발전 되어온 서양사상이지만
아이러니 하게 원본을 통한 가지 키우기 행위가 가득합니다
서양철학을 접근하려면
케케묵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본점에서 아직도 언급되는 정도이니까요
특정개인의 논리적 기본틀에서의 반전적 변화가 서양사상이라 사료됩니다
기독교와 상호영향을 주고 받으며 때론 굉장히 고답적입니다
다행히 비트겐슈타인이후 등장한 각종 첨단 이론들은 매력적이긴 합니다

고답적이고 케케묶은 걸로 보이는 동양사상서들은
문자 자구 그대로 그걸 지켜내고 문자행 그대로 따르라가 아니라 응용하여 자기자신에게 맞게 녹이고 합수하라 쪽에 가깝습니다
- 가르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 -
동양사상의 특성을 함축한 말입니다

실예로 -
21세기 기업가CEO 들이 가장 많이 신청하고 듣는 인문학  강의가 도덕경이라고합니다 
또한 죽은 스티브 잡스 역시  선불교(주로 일본식 선)에 쉼취하여
애플의 경영전략이나  특히 디자인에 심플함을 강조해서 대성공한 케이스입니다

두줄 요약 하자면
1. 니들 각성해서 다 잘해 - 사회적 공리적 문제점을 개선하자 - 뛰어난 서샹사상의 장점 입니다
2. 나나 잘하자 - 인간존재로 나서 가장 순수한 본질로 돌아가자  -동양사상의 장점입니다
..일반화의 오류문제는 인정하고 적습니다
                    
팔상인 21-04-06 13:35
 
소위 서양철학사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언제나 다른 학문의 연구를 병행하면서 philrosphy를 추구했죠
그리고 다른 학문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데카르트가 기하학에 x,y,z 좌표를 창조함으로서
물리학이 수학을 도구로 이용할 수 있게 만든 업적 같은 것들이죠
물리학의 가르침만을 계승하던 계승자들은 꿈도꾸지 못했던 업적입니다

아인슈타인도 서양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인물인데,
그의 상대성 이론이 추구된 배경도 2차원 평면의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순수한 탐구와 비판적 사고에서 추구되었기에 탄생했을 겁니다
이 역시도 유클리드 기하학의 계승자들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죠

불가의 가르침만을 강조하는 그 계승자들의 팔자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불가를 비판하는 것은 본인들이 계승자의 행적만을 반복하는데
갇혀있는게 문제라는게 제 비판의 골자입니다
실패해도 좋으니 불가의 가르침이란걸 실용적으로 구체화시키는 시도들을 통해
그 고통의 시행착오 속에서 수정/보완을 거듭해야 분명 더 나아질텐데
그딴 건 집어치우고 그 계승만을 반복하는걸 정당화한다면 더 드릴 얘기 없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그건 그들이 순수한 학문의 예술가였고 또 끝없이 부딪히며 실패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려는 숭고한 실천 때문이었음은 자명할 겁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지긋지긋하고 무수한 논증의 검토가 수반되었겠죠
아무리 때려치고 싶을만큼 고통스럽더라도 말이죠

이런 과정이 물리학/수학 같은 과학분야에서만 일어나진 않았습니다
서양에서 발생한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일어났죠
그리고 학문의 시녀라 불리던 소위 서양철학에도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심리학도 아니고 기존 철학도 아니면서 그 사이에 있는 미학(일반미학아님)인데,
근현대에 들어서야 겨우 온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한국에서 미학과 교수들은 이 분야를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기본 소양이 philrosphy에 대한 조예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인간 정신을 완전하게 헤아리려면
단순히 이성만으로 살피는 것은 항상 불충분했습니다
이성과 감성의 통일체로서 인간의 정신을 헤아리는게 필요했죠

예컨대 인간 정신에 있어서 이성의 건축물을
어떤 감성의 대지위에 세우는게 맞겠는가?란 질문의 대답으로서,

저 이성의 건축물은 정당한 논증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고
저 감성의 대지는 감성의 지질학에 의해 좋은 부지를 선정해야 합니다
자기 감성의 대지 중 이 부지나 저 부지가
좋은 땅인지 아닌지를 구별해낼 지질학이 필요한 것이죠

이것이 철학으로서의 미학입니다
서양사상을 실용적으로 헤아린다는 것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고작 시작일 따름이어야 온전한 시작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걸 못하면 세상을 둘러싼 핵심적인 모순들의 형태를 특정해 낼 수 없고
또 어떻게 수정하고 보완해야 할지를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대한걸 예를 들면 이런식입니다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을 절제하라"
이는 미숙한 대중인식입니다

이로 인해 부당한 이성이 정당한 감정을 통제시키는 일이 현실로 이어져
경제적 기득권의 부당한 이득이 피해를 본 노동자들의 정당한 분노를 인내시키게 하죠
즉 노동자들의 입을 막고 부당이득을 지속시키는 구조가 현실이 되기 유리해집니다

그러니 이를 보완할 대중인식으로서 더 나은 인식은
"부당한 이성과 부당한 감정을 절제하고
 정당한 이성과 정당한 감정을 중시해라"
라는게 한단계 성숙한 대중인식입니다

불가식으로는 어떤 본성을 살리고 어떤 본성을 절제할 것인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현대에선 이게 정확한 표현은 못됩니다
인간은 본성을 포기하긴 어렵습니다만 어떤 본성은 만들어낼수있고
또 어떤 본성은 잃어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들을 두루 살피어 장단의 구별은 결국
무엇을 자신의 美로 삼고 무엇을 자신의 醜로 삼을지로 귀결되어야 할겁니다
이걸 정하는 것이 "자기 예술의 길"이니까요
이쯤되면 단순 이념놀이가 아니게 됩니다

3가지 질문..
"무엇이 사실인가", "원하는게 뭔가?", "그래서 어쩔건가"에 대한
단답을 제시하기 때문에 이것이 유력해보이면
자기 삶에 크든 작든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런 건 의미가 있죠
말로만 떠드는게 아닐 가능성을 갖게 되니까요

제 화답은 이 정도로 매듭짓는게 좋겠지 싶습니다
그럼 이만
새벽바다 21-04-05 23:15
 
중도는 2가지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논리적 이해를 통한 중도의 바른 견해를 이루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실천수행차원에서의 중도를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 수행 차원이라 함은 당연히 팔정도를 뜻 합니다.

팔정도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정견, 즉,바른견해죠.
이 바른견해는 곧  중도의 바른통찰이라 봅니다.

개인적으로...
선사가 제자에게 선문답을 주고 받는것은 바른견해를 갖추게 하거나
확인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바른견해란 무엇인가?
바른견해란 연기의 바른통찰,즉 공성의 바른 통찰입니다.
공성의 바른 통찰은 곧,중도의 바른통찰이죠.

불교의 시작은 바른견해,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팔상인 21-04-06 00:38
 
원하실지는 모르지만 이 견해도 비판을 하자면..

"바르다"는 표현은 보편적으로 윤리적 잣대를 기조로 삼습니다
"맞다"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진실이나 사실을 잣대로 삼는 것과 차이가 있죠
문제는 그 윤리란게 사회나 문화마다 윤리적 잣대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 바르다는 불가의 개념이
특정 사회나 문화를 편들수는 없으니
전 인류적인 윤리를 바르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연에 종속된 종으로서 예속되어야 할 인간이
자연전체를 아울러 공생할 윤리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호합니다

그러나 이 경계를 확정짓는 시점부터 사회의 윤리와 충돌하거나
자연의 윤리와 충돌하거나 둘 중 하나는 현실에서 조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문제가 있으니
종이 다른 상대적 존재들의 집단들이 가진 윤리의
균형과 조화라고 해석해볼수도 있겠는데,
이는 윤리가 아닌 미의 영역이 됩니다
그렇다면 미적으로 바른 것을 기조로 삼는 것이 불가의 뜻인지?

혹은 아직 보편적인 사람들이 닿지 못한 이상의 영역처럼 보이는
미와 윤리의 통찰적 경계와 관통을 기조로 중도라는 것인지?

뭐하나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는 한발짝도 내딪지못하는
불가의 정체됨을 중도라는 명분만을
내세워 비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비판이 세워집니다

그 한발짝을 내딪지 못하니 축약된 개념인 한자표현에 머물러
그 계승만을 종교적 권위로 삼는 행적이 불가의 역사적인 정체성이고
구체성의 실천은 보류시키는 것만을 윤회하듯
대를 이어 반복하는게 아닌지를 불가에 묻고 싶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온전한 의미의 확인이란
'인과와 그 과정'을 논증하느냐 못하냐입니다

모호함을 모호함으로 식별하는 것은 그저 '가늠'이지,
그걸 확인이라 부르니까 사이비가 흉내내기 쉬워서
분별없이 창궐하는 거라고 봅니다

뭐 그래도 기독교보다는 비할 바 없이 낫다고는 봅니다만,
기독교도 온전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해석하면 한없이 달라집니다
불가도 시대에 걸맞는 실증을 목표로 온전한 사상을 가진 분들이
한걸음 더 나아간 해석을 하면 더 나아질거라고 보는데,
희안하게 불가쪽 분들은 이런 구체성에 대한 시도가
너무 적어서 참 답답하네요
          
새벽바다 21-04-06 05:58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바른견해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한
바른견해입니다

예를들어서 공성에  대한 바른 견해를 중생들의
중구난방 견해를 어디에 기준을 맞추어야 합니까??

게다가 공성 또는 연기의 가르침이 윤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빅뱅설도 윤리의 기준에 맞추어서 말했다고 보십니까??

게다가 불교에서는 업에 관한 한...
인과응보를 분명히 하기 때문에 윤리적 문제는 
더욱 확실히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팔상인 21-04-06 12:34
 
"바르다"에 대한 구체적 묘사를 못하시는군요

모든 언어는 근본적으로 그 언어 자체가 실제이지 않습니다
모든 언어가 지칭하는 것은 직관이나 개념의 모형들일 따름이지,
온전한 실제나 이념의 모형이 근본적으로 아니란 의미입니다

이게 언어의 태생적 한계이기에 언어를 통해 지칭하려는
직관이나 개념의 모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구체화시키지 못하면
또 이념의 경우엔 그 구체적인 개연성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구체화시키지 못하면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그저 자기 말이 맞다는 옹알이의 시도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즉 주장하시는 불가의 올바른 가르침이란 것과
불가의 사이비 가르침이란 것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불가가 인과응보를 분명히 한다고요?
인과응보를 "분명히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실천'을 보여야 하는 겁니다
입으로는 누가 못합니까? 입으로만 떠드는게 불가의 바른 견해입니까?

심지어 게시판에서조차 헛소리를 지껄이는 종자들에게
욕하나 시원하게 박지 못하는 불가가
무슨 인과응보를 분명히 한다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하십니까?
                    
새벽바다 21-04-06 12:47
 
지금 주제는 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을 논하는 겁니다

헛소리 지껄이는 사람에 대해 한마디 하는건
사람의 성향에 따라 하는 사람도 있고
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데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건 그게 주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헛소리 지껄이는 사람은 거기에 맞는 인과 응보가 있겠죠
그리고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제가 한마디 한다고
들을 사람도 아닐겁니다

참고로 불교는 기본적으로 (출가수행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일반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취사선택이라 봅니다

아니할 말로 결혼한 중생이 금욕하고 고기끊고
속세를 등지는 일은 없을거 아닙니까??

다만 저같은 경우는 진리에 대한 탐구심에서 불교를 공부합니다

왜 사는가??
왜 죽는가??
이게 저의 기본적인 의문점으로 시작한게 불교공부입니다
                         
팔상인 21-04-06 19:20
 
보통 불가분들끼리 이야기 나누는데는 잘 끼지 않습니다만,
철학을 언급하는 사람의 견해를 청하시길래 제가 낀겁니다

인과응보는 인간이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지,
그것이 자연이나 초월적인 힘에 의해 응보가
이루어진다는 망상엔 불가도 동참합니다

그 망상 덕분에 사이비들이 힘을 기르고
그들에 대한 방관의 명분이 불가의 인과응보죠
불가의 가르침이 거짓을 일삼는 무리들에게
응보가 따를터이니 방관하라 가르치나보죠?
그게 그저 성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라면
불자의 성향을 더 중시해라란 가르침이 있는 것일까요?

말보다 행적을 중시하면 이렇게 보는게 타당성을 갖습니다
이걸 불가내에선 뭐라고 포장할지 몰라도 외부에서 보기엔
그런 방관의 명분에 안주하는 여타 종교의 단점들과 별달라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비판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게 석가의 참뜻일 것 같은데,
불가를 공부하신다는 분이 별로 그런 모습은 없네요?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밀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기독교인처럼요

그리고 불가의 정견이란 것도 도대체 무엇을 근간으로
정견이란 용어를 쓰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는데
새벽바다씨의 정견이란건 그저 "부처의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인상'일 뿐이지 실제로는 별 구체적 의미가 없으니 이렇게 부르는건 아닙니까?

혹은 그 정견이 뭔지 잘 모르겠으니
그저 '정견'이란 용어의 '인상'을 직관으로 삼는 것 뿐이진 않나요?

사실 진리란건 인간의 역량으로 규정되지 못합니다
왜냐면 가장 모태가되는 궁극의 이치에 대한
이상형이자 불가투입성의 완벽함에 대한 인상을 '진리'라 부르는 것 뿐이니까요

결국 불가의 용어도 그저 그 용어의 인상에 머무르는 정도로
사용하시는 것이지 싶은데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진리를 탐구한다는
불가의 인물이라면 너무 얕은 것 아닙니까?

뭐 단순히 취미로 불교를 택한다는 것이라면 그건 존중해야죠
그런데 취미에 자신의 흥미뿐 아닌 진리가 있는 것처럼 약을 팔면
그 진리란걸 드러내라는 요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그 실천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드러내라는 요구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마도 불가가 속세에 내려오지 않는 이유가 이럴 준비가 안되서
그랬을 것이지 싶은데 과연 새벽바다씨가 준비가 되신건지 모르겠네요
새벽바다 21-04-06 23:17
 
1,팔상인님//
인과응보는 인간이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지,
그것이 자연이나 초월적인 힘에 의해 응보가
이루어진다는 망상엔 불가도 동참합니다

새벽바다//
불교경전  어디에 인과응보는 자연이나 초월적인 힘에만 이루어진다고 합니까??
경전 출처를 제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2,팔상인님//
그 망상 덕분에 사이비들이 힘을 기르고
그들에 대한 방관의 명분이 불가의 인과응보죠
불가의 가르침이 거짓을 일삼는 무리들에게
응보가 따를터이니 방관하라 가르치나보죠?
그게 그저 성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라면
불자의 성향을 더 중시해라란 가르침이 있는 것일까요?

새벽바다//
팔상인님이 윤리 어쩌고 하는 그정도 마음가짐이면
지금이라도 미얀마에 가서 학살하는 군인을 처단하고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는게 맞지 않겠습니까?



3,팔상인님//
말보다 행적을 중시하면 이렇게 보는게 타당성을 갖습니다
이걸 불가내에선 뭐라고 포장할지 몰라도 외부에서 보기엔
그런 방관의 명분에 안주하는 여타 종교의 단점들과 별달라보이지 않습니다

새벽바다//
그러니까 저 같은 사이비 불자는 그렇다 치고
맨날 윤리를 들먹거리는 팔상인님은 윤리적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4,팔상인님//
이런 비판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게 석가의 참뜻일 것 같은데,
불가를 공부하신다는 분이 별로 그런 모습은 없네요?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밀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기독교인처럼요

새벽바다//
인과응보도 편협하게 해석해서 말하는게 비판이라고 생각합니까??
게다가 본인은 살아오면서 항상 자신이나 남에 대해 완벽하게 윤리적 실천을 해 왔다고 생각합니까??
남을 비판 할려면 자신이 먼저 완벽하게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된다고 봅니다.

5,팔상인님//
그리고 불가의 정견이란 것도 도대체 무엇을 근간으로
정견이란 용어를 쓰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는데
새벽바다씨의 정견이란건 그저 "부처의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인상'일 뿐이지 실제로는 별 구체적 의미가 없으니 이렇게 부르는건 아닙니까?

혹은 그 정견이 뭔지 잘 모르겠으니
그저 '정견'이란 용어의 '인상'을 직관으로 삼는 것 뿐이진 않나요?


새벽바다//
그러니까 비판이라는 것도 (논리에 의한 비판)이 아니고 님의 추리에 의한 비판입니까?


6,팔상인님//
사실 진리란건 인간의 역량으로 규정되지 못합니다
왜냐면 가장 모태가되는 궁극의 이치에 대한
이상형이자 불가투입성의 완벽함에 대한 인상을 '진리'라 부르는 것 뿐이니까요

새벽바다//
그러니까 팔상인님의 말대로 인간의 역량으로 규정되지 못하거나 참으로 어렵기 때문에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듣는 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인은 당연히 부처님 입니다.
근데 불교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님이 불교에 대해 비판이 가능하다 생각합니까?
물론 비판할 수 있지만 불교에 대해 빠삭하지는 못해도 불자가 수긍할만한 식견으로 말해야 비판과 토론이 가능합니다.

7,팔상인님//
결국 불가의 용어도 그저 그 용어의 인상에 머무르는 정도로
사용하시는 것이지 싶은데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진리를 탐구한다는
불가의 인물이라면 너무 얕은 것 아닙니까?

새벽바다//
불교용어는 불교에 맞게 쓰여야 쉽게 이해가 됩니다.
같은 법이라도 불교에서 말하는 법과 세간의 법의 쓰임이 다른건 잘 아시죠?
     
팔상인 21-04-12 20:25
 
실망스러운 댓글이네요

불가의 이념을 이런 피상적인 이해와 조야한 심미상태로
내 댓글에 저항하려는 반응(단순 방어반응)일 뿐이라니..

기독교 애들이 걔들 교리를 유의미한 가치로 번역해내지 못하는거나
불가쪽 신자들도 본인들 교리를 유의미한 가치로 번역해내지 못하는거나
별 다를 바를 못느끼겠습니다

이래서 실증은 집어던진 단순이념놀이에서 못벗어나나 봅니다
이런 단순이념놀이에는 과거에 많이 어울려드렸으나
더이상은 시간낭비라는 판단이 강해서 그만두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쇼
방랑노Zㅐ 21-04-08 08:47
 
새벽바다님과 팔상인님의 토론(토론은 논쟁이 포함되므로 당연히 치열합니다)을 보며
두분 다 성숙한 의식을 지니셔서 인신공격 같은 하수들의 방식은 쓰지 않고 비판의식만 보이는  모습도 참 좋아보입니다

두분의 담론이 결론이 도출되기 힘든이유를 저는 이렇게 봅니다

중도의 확장영역을 말하기 위해 중도자리(중도상) 를 이야기한 제 작성글에
팔상인님은 중도의 본질이나 속성을 이야기하자 라고 댓글 쓰신것이고
새벽바다님은 중도의 실천항목을 이야기하자 라고 쓰시므로
출발부터 두분의 논점이 이미 어긋나 있어서 
도출된 결과가 나올 수 없다고 보여집니다


간밤에 집들이에 초대되어 술에 기분좋게 많이 취하여
숙취상태이지만 정신은 맑아지는 기분이 듭니다

아무튼 두분의 글을 통해 저도 생각해 볼 여지와 공부가 됩니다
두분의 댓글 감사합니다 ~
     
팔상인 21-04-09 22:23
 
신경적인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그 논쟁의 의도가
건설적이라면 하는게 좋다고 보는 편입니다

다만 그게 건설적인 가능성을 가진 상대한테 하는거지
건설적인 가능성이 없는 상대에게는
응보적인 대응이 실효적이라고 봅니다

그때는 과감하게 쌍욕을 날리던지 조롱을 하던지 같은 식의
'낙인'을 부여하는게 다수에 대한 실효적인 배려라고 봅니다
그게 역대의 숭고한 조상들을 실용적 측면에서
훌륭하게 바라보는 배경이기도 하니까요

우리 민족이 그분들이 고충을 겪을 때 그리고 막상 그런 현실이 다가오더라도
우리가 겪게 될지 모르는 지배적인 영향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비겁하더라도
안전을 도모하기 쉬울거고 또 그러할 보편적인 자기우선주의가 그분들께 죄송하잖습니까?

저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적어도 그 미안함 때문이란 실증적 배경이지만
그것이 단순히 성향으로 치부되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그게 불가의 온전한 해석인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럼 그걸 내버려두기보단
확실하게 논쟁이란 형태의 싸움을 걸어서
그 정신을 해체시켜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겁니다

통찰? 통섭?.. 제가 중요하게 보는 관점들이긴 합니다만,
인간정신에 관련된 대부분의 학문을 관심사로 삼고
이들을 근거로 통찰과 통섭을 찾아 수년째 시간을 꼴아박고 있는 저와
불가교리만을 계승하는 분과 서로의 정신을 논증적으로 해체시켰을 때
무슨 차이가 나는지 비교해보는 것은 좋은 실험이 될 것 같습니다
알랑가 21-04-10 17:24
 
철학은 철학으로 비교가능하지만
불교와 철학은 비교 불가입니다
철학은 인간의 사유로써의 생각의 여러갈래지만..그래서 철학도 여러가지의 류가 잇지만.
불교는 사유의 그 이전을 논하는 것입니다
모든 철학은 그 공통돤 사유(생각)를 함으로써 발전합니다
하지만 생각을 통한 사유는  구체적인 진실성이 절대 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도 그 당시의 수많은 사상가들의 사유를 망상에 망상을 더하는 일이라고 하셨죠
이것은 이래서 이럴것이다 고로 이렇기 때문에 또 이러고 그래서 또 이러고 이렇게 망상에 망상을 더하는것일뿐
-대혜여, 외도는 서로 모여 함께 견(見)을 일으켜서 유(有) 또는 무(無)로 부터 일체법이 생한다 하고, 선하다 악하다 스스로 집착 분별하며 견에 견을 더 하니...견 자체가 허망한 뜬 구름같은 거라는걸 모른다 대혜여, 나는 설하기를, 모든 법이 유(有) ·무(無)로 부터 생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무생(無生)이라 하느니라. 대혜여, 제법을 설하는 것은 제업(諸業)으로 생사(生死 : <11 권경 >「世間」) 에 빠지고, 유(有) ·무(無)와 단멸견(斷滅見)에 빠짐을 막게 하고자 하는 것을 알게 함이니라. 대혜여, 제법의 상(相)이 환(幻)과 같다고 한 것은 제법의 자성상(自性相: 自我의 相)이 있다고 보는 것을 떠나게 함이니라. 견(見)에 빠져 제법이 유심소현(唯心所現)임을 모르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인연으로 일어나는 상(相)에 집착하는데서 멀리 떠나게 하고자 일체법은 환(幻)과 같다고 설하는 것이니라. 저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은 견(見)에 집착하고 일체제법의 여실주처(如實住處)를 밝게 보지 못한다. 대혜여 일체법의 여실처(如實處)를 보는 자를 말하여 능히 유심소현(唯心所現)을 요달(了達)한 자라고 한다.”-

망상에 망상을 일으켜 그 망상을 알려하는것 보다 망상이 일어나는 그곳에 직접들어가 보는게 더 수승하지 않을까요?
     
방랑노Zㅐ 21-04-10 23:49
 
이미 잘 아시다 시피
불교사상은 방대할 뿐 아니라
순류적인 속성과 역류적인 속성을 동시에 지닙니다
마치 조수의 밀물과 썰물 처럼

제법무아 에서 제법실상으로 넘어오는 과정의 정점에 선것이
반야부의 금강경과 반야심경입니다
공성의 체현방식으로는 완벽하긴 하지만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일직선 상승방향으로 산으로 오르던 존재가
산의 정상에서 공성을 체현하고 난 뒤 
하신길의 이야기들이 다시 시작합니다
(끝인줄 알았더니 다시 시작이구나 - 이게 무슨일인가 )
붓다의 후반기 대승경전의 시행점인 화엄경부터 시작합니다
(아시다 시피  보리수나무아래 최초설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시작입니다)


하산길에서 만나는 비위산의 돌멩이 하나. 산짐승 한마리. 들판에 핀 꽃 한송이.
바다의 사금파리 모래한알까지 ...
그 모두가 이전에 보던 사금파리 모래가 아닙니다
너와 나 모두 오래전 부터 함께 호흡하던 공성이자 진성의 현현입니다

색인 즉 공
공인 즉 색

그러하므로

함께 가자
다 함께 가자

어디로?

자신의 순수 무결한 본래 청점심으로
동시에
여럿이 함께 어울려 가자 - 돌멩이 하나 미물들 모두 빠짐없이 모두가 행복한 상황으로
( 장소나 지점이 아닙니다  상황이 되는 것 입니다 )

불국토란 돌멩이도 이미 붓다이며
그것을 보는 나도 붓다이기에 가능한
너무나 어려운 길고긴 진화의 정점
또는
무형과 유형의 완전한 일치라고 여겨집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 (應無所住而生其心) 만으로도 안되고
화광동진 (和光同塵) 만으로도 안되는
여여(tathatā)의 증득과 현존
고대부터 붓다였고 지금도 붓다의 길을 걷는 존재의 참으로 어렵고 어려운
너무나 어려운 난제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길을 걷습니다


써주신 댓글의 마지막행은 참으로 고맙습니다
          
팔상인 21-04-12 20:50
 
동양사상 공통의 문제는 "결론"만 있지 과정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똑같이 불가도 공유하고 있죠

불가의 교리들도 왜? 또 어떻게?
형성되는지의 과정은 누락되어 있습니다

서양사상은 그 과정이 아주 집요하게 형성되어 있고
덕분에 그 과정을 온전히만 수행해내면
그 과정의 수정과 보완이 가능합니다만
불가도 그리고 동양사상은 과정을 알 수 없기에 전혀 개선이 안됩니다

왜냐면 그 결론에만 권위를 세우고 거기에 의존하는
고리타분하고 지엽적인 계승자들의 저항 때문에 안될 겁니다
모든 동양의 사상가나 종교인들이 그런건 아닙니다만
그들의 지배적인 인식은 언제나 계승자들의 인식이죠

그래서 그저 그들끼리 누가 더 잘 기억하냐라는
이념놀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실증, 실효와는 영원히 거리를 둔 채 말이죠

그런게 취미라서 정당화 하고 싶다면
자기들끼리 절에서 또 자기들끼리 교회에서
그런거 갖고 놀면 됩니다
그러나 외부에 드러낼때는 사회적 양식을 따라야지요
또 현실적 양식을 따라야지요
한국이라고 다 같은 한국이 아닌겁니다

서양의 사상들은 영원한 실증과 실효의 추구를 통해
공정한 입증의 권위를 꿈꾸며 스스로 고통을 자청하는 사고이자 지혜들입니다
이런 점이 서양의 사상들이 비록 가끔 틀리더라도 이내 자기 궤도를 되찾으며
끝없이 수정과 보완을 해나가는 잔혹하고 숭고한 여정을 밟게되죠
그에 비해 불가는 수천년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건지..

내가 불가의 교리를 알고 말고는 그다지 안중요합니다
난 인간의 정신을 파악하는데 일정역량이 있는 사람인지라
내가 파악하는 것은 그 불가의 교리를 떠드는 당사자의 정신입니다

그 당사자를 통해 불가를 보는 것이기에 불가의 교리 따위는 사소한 일입니다
그 당사자가 무슨 가치를 보이느냐가
불가를 고평가할수도 있고 저평가할수도 있습니다

더 쉽게 비유하자면 당사자의 삼촌이나 부모가 잘나가든 아니든 관계없습니다
당사자가 무슨 역량을 보이느냐로 당사자를 평가할 뿐이죠

불가의 사상이 무슨 가치가 있다면 본인들이 가치를 드러내면 됩니다
못하겠으면 침묵을 지키면 됩니다
그게 미덕이니까
               
방랑노Zㅐ 21-04-13 03:38
 
팔상인님이 짚어보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제가 서울에서 살았을때는 서양사상을 이야기하면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20여년전에 시골로 내려와 살게 되면서
서양사상의 형성 전개과정을 이야기해 봤자 - 공부 많이하신분이네 서울에서 대학교에서 강의나 하시지 왜 여기서 알아듣지도 못하는말 하십니까 라며 반문합니다
그러나 밭농사를 짓는 이웃과 막걸리 마시며
동양사상을 비유로 풀어 설명하면
귀를 기울여 들으며 맞아 맞아 나도 어디선가 들어봣어 라며
살아보니 그 말이 참 맞아요 라고 수긍합니다
제 경험담 입니다
한국인은 서울사람만 한국인이 아닙니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모든 사람들도 한국인입니다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어 스케줄 짜며 사는 사람들과
시간을 일년이란 단위로 나누어 사는 사람들과는 삶을 받아들이는 인식자체가 다릅니다

당사자의 사상적 역량이란
특정 학술지에 발표되어 유파를 형성하고 새로운 사상을 발굴하는게 다가 아닙니다
자신과  주변의 실생활에 녹아드는게 더 귀중하다고 생각됩니다
                    
팔상인 21-04-13 22:39
 
방랑노재님께서 크게 간과하는 것은
제가 어떤 전제에서 이렇게 모질게 구는지를 전혀 모르십니다

서양사상에서 사용하는 보편적인 단어 및 언어들을
제가 이 게시판에서 표현할 때 극히 제한(이게 제가 불가와 다르죠)하고
혹여 불가피하게 사용하더라도
전 그 의미를 풀어드리는 배경의 글을 써왔던게 이 전제 때문입니다

실증과 실효..
이것은 본인이 "자기개발"을 갈구할 때 통용되는 얘기입니다

제게는 쉽게 믿음을 규정하는 분들과 달리 '믿음'이 없습니다
얼마나 '유력'하냐가 중요하고 그 덕분에 모든 지식은
내 반성적 검증을 거쳐야 '유력'의 심사기준을 통과합니다
그래서 구태여 비유하자면 전 유력이 우선이지
믿음은 상대성에 불과합니다

굉장히 험난한 길입니다만 인류의 한걸음을 내딛었던 분들도
예외없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석가도 예수도 그런 사람들이었죠

그런데 진리를 찾으려는 분들이 "진정한 자기개발을 안한다?"라면
그 진리에 다가서는게 가능하겠습니까?
극단적으로는 모든 이념의 상반을 감수함과 그에 따른 고통은
"자기개발을 통해서 진리에 다가감"을
추구하는 것 외에 본질이 인간인 이상 다른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그들을 계승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일정지분을 수용하는 동료가 되어야 그게 온전한 불자일겁니다
그러니 석가가 자신으 등불로 삼으라는 얘길 세우는 게죠

그런데 이런 실천,실증,실효라는 목적은 고사하고
이와 가까운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마치 자신이 "뭔가 그런 진리에 다가간 듯한 상대적 동위의 흉내"를
표방하면서 그게 또 사회적으로 "문화적 분위기"로 간다면
그것은 역겨운 것으로 판정해야 유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권위적 인상을 자신의 동위적 인상으로 동기화시키는게 그 본질이니까요

불가와는 완전히 노선이 달라 불가식 표현으로 제 인식을 비유할 수는 없지만
방랑노재님이 불가의 어느선까지 인식을 가지신지는 제가 모릅니다

다만 딱 한가지만 저와 차이가 있다면
다소 교만하게 표현해서 제겐
"서양 사상의 천재들과 비슷한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게 이념으로서의 서양사상과들과 공정한 美를 공유하는 탓이겠죠
그래서 전 그들과 공유하는 美로 "재생산"이 가능합니다
제가 이걸 위험한 지식이라고 지칭하는 분야기도 하긴 합니다
너무 실효적이고 너무 실증적이니까요

그게 불가만 들여다보는 美가
온전하게 美를 진 그리고 선이자 그 요소들이 가진
조화와 균형 그리고 피하고 싶은 징벌로 체계를 갖는지를 전 할 수 있습니다만,
그 체계를 서술할 수도 없으면서 그 해석자들의 조야함에 드리는 선물입니다

서양사상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저도 좀 무리입니다만,
저보다 잘 이해하고 헤아리는 분들이 없는 듯 한데
그 교만에 대해 경종을 한번쯤은 표현하는게 낫지 싶군요

한가지 숙제를 내드려 볼까요?
방랑노재님이 현재 한국문화가 전세계에 잘 나가는 이치를 서술해 보십쇼

전 이게 가능합니다
근현대 서양사상의 정수가 한국의 정통성과 합치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거든요
그게 무슨 원리와 원리를 이루를 체계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언컨데 방랑노재님을 비롯 모든 불가의 관계자분들은 이걸 할 수 없습니다
그 체계와 원리를 표현으로서 온전한 이념을 생산해낸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불가분들과 논의를 나눠본지는 꽤 되었습니다만,
저랑 이야기를 오래 나눠본 분들은
"자신이 함부로 평가했다"는게 보편적입니다

제가 뛰어나다는 표현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왜냐면 그때부터 사람은 정체되거든요

대신 제가 그리 일반적이로 방랑노재님의 예상안에
있지는 않은 사람이란것은 표현해두는게 좋겠지 싶네요
                         
방랑노Zㅐ 21-04-14 11:21
 
객관적 분석으로 상황을 논하시려는 태도는 존중합니다

간명하게 말씀드리면
제게는 분석 대상으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공감체현의 의미가 큽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종교성은 제외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어릴때 기독교를 따르면서 삶의 가치를 찾지 못했고
이후 공부한 서양사상은 비트겐슈타인 까지 입니다 이후엔 손을 놓앗습니다
서양사상에서도 저의 사상적 아이덴티티와 가치의 동질성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후 온갖신비주의 잡서들을 보다가
15년전부터  동양사상 -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을 이해하면서
불교사상은 객관화시점의 해체적 분석만으로 설명이 안됩니다
불교사상은 내부로 들어가야 이해되지 외부현상만 본 학술적 이해만으로는 반쪽입니다

제 삶의 기준이 되는  가치와 일치점
( 복합적이어서 글로 다 쓰기엔 적절하지않습니다 제가쓴 작성글 전부가 모여도
반에반쪽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특정부분 일치되는 점들을  노장과 불교사상에서 여러 측면으로 보게 되었고
사실은 이전부터 그걸 추구하고 살아왔다는걸 비로소 보게된
나 자신의 성찰입니다
이러한 성찰은 타인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달리 말하면 불교를 신봉하거나 분석 하는 태도가 아니라
제 가치 기준과 동질성을 찾아가기입니다

PS: 위에 불교식 댓글에 대한 제 댓글은 팔상인 님을 향한 글이 아닙니다
알랑가님이 불가의 용어( 전문용어)로 댓글쓰시므로
저도 알랑가님에게 불가의 용어로 댓글 단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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