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 온통 붉은 산이었습니다. 붉은 산이란 단편소설도 있지 않았던가요? 산에 오르다 보면 요즘은 키 큰 나무들로 울창합니다. 힘등 산행끝에 산정상에 올라 전망을 보면 그 동안의 숨차고 힘들었던 고통들이 사라지고 마음이 확 트이며 뿌듯한 성취감으로 휩싸입니다.
산속은 이제 소나무와 도토리 나무 다래 덩쿨등으로 울창합니다. 잣나무를 보다 보면 햇빛을 서로 받기 위해 위를 향해 쭉쭉 뻗어 경쟁하느라 반듯합니다. 등산하는 나의 지향점은 산정상이었고 잣나무의 지향점은 광합성에 필요한 햇빛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지향점이 없다면 방향을 잃은 자며 길을 잃은 자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것인가? 를 고민합니다. 어떻게 살것인가? 란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삶의 지향점은 무엇인가입니다. .
창 1:28절에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생존하여 자녀를 많이 나아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생의 지향점은 바로 생존하여 번성해라 라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태어나자 마자 치열한 경쟁입니다. 잉태를 위해 수억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하고 부모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와 경쟁해야 합니다. 치열한 경쟁속에 명문대를 가고 최고의 회사에 들어가고 많은 월급을 받습니다. 생존은 성공했습니다. 이제 번성할 차례입니다. 예쁜 배우자를 구하기 위해 돈을 아낌없이 씁니다. 결혼을 합니다. 참 행복하겠지요 이제 아이를 낳아야 겠네요. 아이를 키우기 위해 남은 인생을 모두 투자합니다. 번성도 했네요. 어느덧 인생이 황혼기가 다가오며 몸이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해가 갈수록 약해지는 과정속에 돌입한 것입니다.
조용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일만 남은 것이지요. 이렇게 사는 인생을 생존 지향적 삶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런 생존 지향적 삶은 아프리가 세랭케티 사바나의 동물들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인간이 위대하다 말하지만 결국 일정한 시간속에 머물다 떠나고 잊혀지는 존재에 불가합니다.
과연 생존지향적 삶이 우리가 살아야 할 긍극적인 가치인가요?
개인은 개인의 생존을 위해 가정은 가정의 생존을 위해 기업은 기업의 생존을 위해 나라는 나라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의로운 삶이란 주관적인 것입니다. 임진왜란시 조선을 목숨으로 구한 이순신장군은 우리나라에서 의로운 분이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의로운 삶을 산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의로운 삶이라고 하는 것들은 생존지형적인 삶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생존지향적인 삶은 쉽게 말해 빵을 얻는 삶입니다. 빵을 먹어야 살고 자녀를 낳아 키울 수 있지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이런 삶속에서는 생존하지 못하는 수많은 낙오자들이 합니다. 그들은 중도에 포기합니다. 학교시절에는 영포자 수포자 사회에 나가서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세대에서 내집마련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5포세대에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7포세대까지 존재한다고 합니다. 1명의 생존 번성을 위해 수백에서 수천명이 낙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나 수정자본주의나 모든 인간의 노력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생존지향적인 삶은 인간에게 비극이며 그 종국은 허무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만 합니까?
여기 또 하나의 성경말씀을 소개합니다.
마 4:4 사람이 빵으론 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
하나님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삶은 새로운 차원의 지향점을 제시하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킵니다.
다음에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