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당에 관한 설화는 여러 가지로 그의 출가(出家) 동인을 말하는 후처 응징 설화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활동한 이야기들로 대별할 수 있다. 후처 응징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명당은 속성(俗性)이 임(任)이고 전처 소생의 아들과 후처 소생의 아들이 있었다. 전처의 아들이 장가간 첫날밤에 어느 자객에 의해 목이 잘리자 신부는 누명을 벗고자 남복을 하고 집을 떠나서 범인 색출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범인이 바로 시집의 계모의 사주를 받은 하인임을 밝혀내고 이를 시아버지에게 알린다.
시아버지는 벽장에 숨겨 둔 항아리 속에서 아들의 머리를 찾아내고 후처와 그의 아들을 모두 묶어 집과 함께 불태워 버린 뒤 재산을 노복에게 나누어 주고 집을 떠난다.
이 설화는 「사명당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전주·안동·밀양 등 여러 지역에서 십여 편이 채록되었다. 임진왜란 시에 사명당의 활약상을 담은 설화는 주로 「임진록」에 집결되어 있는데, 구전설화로도 채록된 것이 많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명당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왜왕이 왜국의 시를 병풍에 적어 지나는 길에 진열해 놓고 자국의 문물이 번성함을 자랑하자 이를 모두 암송해서 모작(模作)이라 했다.
왜왕은 사명당을 큰 무쇠 막에 넣고 숯불을 피워 무쇠 막을 달구어 데어 죽게 하였으나, 사명당은 ‘빙(氷)’ 자를 천장에 써 붙이고 도술을 부려 왜왕이 방문을 열었을 때는 수염과 눈썹에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또 왜왕은 무쇠 말을 벌겋게 달구어 놓고 이것을 타 보라고 사명당에게 요구하자 사명당이 비를 오게 해 무쇠 말을 식혔다. 그리고 비를 계속 내리게 하여 왜국을 물에 잠기게 해 왜왕의 항복을 받고 매년 인피(人皮) 300장과 불알 서 말씩을 조공하도록 했다.
이러한 설화는 모두 임진왜란 시에 형성된 왜적에 대한 민족적 적개심과 민족적 긍지를 반영하고 있다.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에는 사명당영당비(四溟堂影堂碑)가 있는데 이 비는 국가의 큰 일이 날 때마다 몇 말씩의 땀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문헌에 기록된 사명대사의 설화로는 『지봉유설(芝峰類說)』·『청야만집(靑野謾輯)』 등에 수록된 가등청정과의 일화가 있다.
사명당이 왜장 청정의 진영을 들어갈 때 수 리에 걸쳐 기치창검(예전에 군대에서 쓰던 깃발, 창, 칼 따위를 통틀어 이르던 말.)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으나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가등청정(加藤淸正)은 사명당에게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 물었다.
사명당은 그대의 머리가 오직 보물이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묻자 너의 머리에 천금 만호(千金萬戶)의 상이 걸려 있으니 어찌 보물이 아니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 밖에 사명당이 꽂아 놓은 지팡이라는 수목설화가 있는데, 사명당은 지팡이를 꽂아 놓고 사라지며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 있다고 했는데 아직도 그 나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사명당설화」는 구국도술설화로서 민족의 사랑을 받고 널리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