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조공을 받던 잃어버린 천년 제국 부여
부여는 서기전 221년 이전부터 존재한 국가
부여는 해모수왕이 건 국한 북부여
동명왕이 북부여 땅에 건국한 부여
동명왕에게 북부여 땅을 빼앗긴 해부루왕이 동쪽 길림성 동부 연해주로 이동하여 건국한 동부여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 건국의 기초를 제공한 졸본부여
백제 성왕이 538년에 국호를 백제에서 국호를 바꾼 남부여
해부루왕의 조상이 해모수왕이니 해모수왕이 건국한 북부여가 가장 오래된 부여
북부여는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부터 존속해온 국가임이 분명
연나라는 하북성 중부, 남부지방을 영토로 한 국가
연나라 북쪽의 부여는 하북성 북부, 요녕성 서북부, 내몽고, 동몽고 지방에 있었고
부여 북쪽에는 어떤 국가도 없었으므로 그 강역은 시베리아 동부지방에 까지 미쳤을 것
중국 전한(BC 206~AD8)에 황제와 제후왕들을 매장할때 옥을 캐어 2498편의 옥 편을 가공하고
옥편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약 1100g의 금실로 꿰맨 옥의, 옥침, 신 등으로 만들어진 수의
옥갑(玉匣)을 사용
그러나 옥갑의 생산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가므로 후한(25~220) 때
황제의 장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옥갑을 사용하지 못하게 GKA
위(220~264)나라의 문제(:220~227)가 박장령을 내려 옥의 사용을 아예 금지시ZLA
이와 같이 후한시대에 후한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이 옥갑을
후한의 황제가 미리 만들어서 부여와 가까운 현도군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부여의 왕이 서거하였다는 통보를 받을 때마다 부여왕의 장례식에 늦지 않도록
즉각 이 옥갑을 선물로 보내야 했다고 중국 위, 촉, 오의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지 에 기록
부여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대국이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
이 옥갑의 조공문화로 미루어 볼 때 한나라에서는 해마다 막대한 량의 곡식,금,은,보화,옷감 등
부여에 선물(상납)하지 않았을리 없다
그 이유는 한나라를 침입하지 말라는 것
고구려, 선비 등을 견제해 달라는 이유였겠지만
중국의 조공을 받던 이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는 가르치지 않고 있다
북부여 부여를 역사가 동부여의 역사로 왜곡되어 왔기 때문
북부여 부여의 1,000년 역사를 서기 22년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명망당하는 동부여로 조작 당함
하북성 북부, 요녕성 북부, 내몽고, 동몽고, 동 시베리아의 광활한 지역을 영역으로 하면서
중국의 조공을 받던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는 말살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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