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전은 고구려에 대해서도 간단히 서술을 하고 있다.
고구려는 험준한 계곡에 위치하여 항상 식량이 부족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을 즐겼다.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와 관습은 부여와 유사하였으나, 복장이나 기질은 약간 달랐다.
왕은 다섯 개의 씨족들 중에서 나왔으며, 왕비는 항상 특정한 씨족에서 택해졌다.
지배 씨족들은 결코 들에서 농사일을 하지 않았고 하층민이 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였다.
매일 밤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개천절 10월)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드는데 막대한 재물을 소비한다.
그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능하며, 좋은 활을 만들어 주변의 예맥족들을 모두 정복했다.
말들은 작지만 산악을 오르는데 적합하였다.
왕망이 고구려의 군사를 동원해 흉노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고구려의 병사들은 그저 주변지역을 약탈했을 뿐이었다.
2세기(AD 125-67)에 들어와 고구려는 자주 요동을 침범했다.
동이전은 정확한 연대를 기록하지 않고, 고구려군이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러 가는 길에 대방군의 태수를 죽이고 낙랑군의 처자들을 생포 해 왔다고 말한다. 242년에 동천왕(東川王, 227-48)은 서안평을 노략질하였다. 서안평은 요나라가 상경(上京)을 세웠던 곳의 이름이기도 하다.
요동에서 세력을 공고히 한 공손씨는 204년에 낙랑군을 손에 넣었으며, 204-220년 기간 중에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했다.
고구려는 독립한 공손씨와 싸움을 계속했다.
공손씨는 237년에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했다.
동이전에 의하면, 조조의 위 나라가 238년에 공손씨를 공격했을 때, 고구려 왕은 수 천명의 군대를 보내 위군(魏軍)을 도왔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위(魏, 220-265)와 서진(西晋, 265-316)에 의해 계속 점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