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족 8개의 대부족을 중심으로 지속되다 광개토태왕때 고구려에 거의완전복속되서 고구려의 부용국가로 존재하게됨..
고구려말까지 대부분 고구려에 복속되서 고수전쟁과 고당전쟁때 고구려군에 속해서 대부분 참전..
물론 중간중간 이세민이 이끄는 당나라같이 고구려 주변부족이나 국가에 대한 사전공격으로 예를들어 영주를 당군 2만이 기습하여 점령했을때..영주를 중심으로 요서일부가 당에 점령되고 그 점령지의 거란족들은 당에 복속되서 이탈한 경우도 있으나 1차고당전면전에서 고구려가 승리하고 이탈된부족들 대부분 고구려에 재복속됨..고구려는 고구려가 망하는 668년까지 내몽고와 요서일부를 여전히 점령하고 있었고 이곳에 성과 군대를 주둔시켜서 당나라군의 보급로을 공격하여 승리에 일조함..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요서와내몽고지역등 이곳에 있던 성과 주둔군 백성모두 항복혹은 저항하여 죽거나 돌궐등 주변으로 뿔뿔히 흩어짐..
당의 영주점령으로 당에 붙은 일부 거란부족이 당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기도하나 대부분은 여전히 고구려에 복속되서 수,당과 싸움..그러다 연개소문아들들의 쿠데타..내전상황이 발생하고 이때 비로서 마지막까지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던 거란의 5개대부족이 태대막리지였던 연남생과 그가이끄는 군대에 합류하여 당나라에 투항복속되서 고구려군과 완전히 갈라져서 고구려멸망에 일조하게됨..
이유는..하나의 고구려는 북주,수,당등 어떤 적과 싸워도 전쟁에서 결국은 승리하는 저력을 보였고 항상 그걸 봤기에 고구려의 부용국가로 계속 존재할수있었지만..고구려가 연개소문아들들의 내전으로 사분오열되고 그힘이 분산되서 서로 계속 싸우고 그걸 보고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고구려의 사직이 다한걸로 보고 고구려남부를 지키는 신라와의 국경주변의 12개의성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함..당시의 고구려상황은 고구려 각지를 지키는 성주와 제후들이 모두 심각하게 동요하고 서로 살길을 찾아 갈팡질팡하던 시기로 이런 전반의 상황에서 고구려가 끝났다고 판단하여 연남생의 회유에 넘어가 마지막까지 고구려와 함께하던 거란의 5개대부족이 연남생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게됨..
667년 당군의 의도하지 않는 고구려내분으로 발발한 고당3차전면전에선 그동안의 전쟁과는 전혀 다른 전쟁양상이 벌어지게됨..현도성을 장악하고 있던 연남생군이 요동방어망의 시작점인 현도성으로 당군을 불러들였고 요동방어망의 중심축이자 가장 중요한 요동방어망의 3개성중하나인 신성을 공격하자 성내부의 배신자들이 사부구를 거점으로 성주를 잡아서 성문을 열고 항복함..이걸 보고 완전히 고구려는 내우외란으로 끝났다고 판단한 부속성 40여성이 당군에 싸우지 않고 항복함..당시 고구려의 성이 중국측 기록에 176개로 나오는데 이게 얼마나 큰타격인지 알수있음..그동안의 고수,고당전쟁에선 한번도 벌어지지 않는 전의를 상실하고 싸우지도 않고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것임 그것도 대규모로..이는 싸우고 있던 고구려군에게도 엄청난 심리적인 압박으로 작용하여..여러곳에서 배신과 투항이 벌어지고 고구려군은 전력을 점점 상실하게되고 마침내 668년 평양성을 지키던 연남건의 부하 신성이 성문을 열면서 고구려는 멸망하게됨..
이 마지막 고당전쟁에서 거란군이 전부 당군에 투항하여 고구려군을 공격하게 됨..
이로서 거란족은 우리 한민족과 완전히 갈라져서 적이됨..
후에 거란족의 왕인 이진충이 거란족을 일통하고 당에 맞서 싸우면서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참 거란족과 우리민족의 관계가 아이러니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