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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초, 그때 고등학생 이었던 우리짝패는 3명이었다.
우리셋은 참으로 많은곳을 함께 다녔는데 그중 하나가 단골 중국집 이었으며
그때의 중국집은 예외없이 중국인이 직접 경영하는 소규모의 중국식당 이었다.
다 낡아빠진 유리창 문을 옆으로 밀고 들어서면 밀가루 푸대로 만든
앞치마를 입고있는 장궤(掌櫃=중국사람을 부자라는 뜻으로 속되게 일컫는말,
한문의 뜻은 금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후줄근한 모습으로 일어서면서 [어서와 해.] 한다.
그때의 중국집은 주방과 식탁들이 한 공간에 같이 있었다.
자장면 세 그릇을 시키면, 허리높이의 반죽대에 밀가루 푸대로 덮어놓은 반죽에서
3인분의 분량을 크고 네모진 칼로 잘라낸후 다시 반죽한다.
장궤는 그 반죽을 계속 반죽대에 때려낸후 길게 늘려가면서
나중에는 그 반죽의 양쪽끝을 두손으로 잡고 위 아래로 흔들기를 반복,
그 굵기가 점점 가늘어져 국수가 되는데 그 과정은 언제나 우리들 에게는 대단한 볼거리였다.
나는 언제나 그 국수발이 밑으로 쳐질때 더러운 바닥에 닿을까봐 조바심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런일은 한번도 없었으니 장궤의 솜씨는 알아줘야 했다
http://egloos.zum.com/yorowon/v/73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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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고등학생이면 뭐 지금 나이론 거의 80세 넘은 노인 분이 회상하신건데..
님 화교 친구가 아니라고 한다고 있는게 없는 일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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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음창(侯蔭昌)
개휴북고촌(介休北賈村) 후씨 집안의 사업가이다. 청 건륭시기 주단과 찻잎을 팔았고, 재산이 은 백만 냥에 달한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를 후백만(侯百萬)이라 불렀다. 그의 사업은 평요에서 발전하여 북경, 상해, 무한, 하남, 산동, 하북 등지 까지 진출하였고, 평요 외 지역에 수십 개의 분점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집안의 재산이 많아지자 후씨들은 북고촌에 자신들의 성을 쌓기도 하였다.
부친 사망 후, 사업의 전권을 물려받은 후음창은 일승창의 발전을 지켜보고 표호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의 빠른 성장을 바랬던 그는 일승창의 대장궤(大掌櫃 : 사장)와 이장궤(二掌櫃 : 부사장)의 사이가 좋지 않음을 간파하고, 이장궤 모홍홰(毛鴻翽)를 영입했다. 모홍홰는 오랜 표호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후씨 집안의 6개 사업 모두를 표호로 전업시킨 후 크게 발전시켰다. 청 도광, 함풍, 동치 시기를 거치면서 후씨 일가의 표호는 전국 50개 성과 시에 분점을 낼 정도로 성장하였고, “후씨위자호(侯氏蔚字號)”는 전국적으로 신용있는 표호의 대명사가 되었다. 청 광서시기에는 총 재산이 8만 냥에 달해 진상(晉商 : 산서상인) 중에서는 최고의 부호가 되었다.
http://blog.naver.com/rotc6188/70118930283
핑야오고성 - 위태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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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궤(掌櫃)
그냥 장궤 구글링만 해봐도 주판 든 왕서방 이미지가 떡하니 나옴..
https://www.google.co.kr/search?q=%E6%8E%8C%E6%AB%83&newwindow=1&biw=807&bih=418&source=lnms&tbm=isch&sa=X&ei=pEBrVY-9HYzN8gXvnoLQAw&ved=0CAYQ_AUoA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