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역사가 우리 역사라는 인식이 일제 만선사상 때문이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요동은 우리나라사람이라고 했습니다.
燕山 43卷, 8年(1502 壬戌)
領議政韓致亨、左議政成俊、右議政李克均、兵曹判書李克墩、左參贊申浚、右參贊尹孝孫、吏曹判書姜龜孫議: “接待唐官護送軍于義順館。 雖義州官吏開端失當, 然不可中止, 姑令該曹措置館待之具。 但遼東等地, 本是高句麗之地, 故自鴨綠江至遼河所居之人, 皆我國之民。 高皇帝初定天下, 以鴨綠爲界, 慮兩國人民互相往來, 設爲東寧衛, 以處元居民, 使地界截然限隔。
연산 43권, 8년(1502 임술 )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좌의정 성준(成俊), 우의정 이극균(李克均), 병조 판서 이극돈(李克墩), 좌참찬 신준(申浚), 우참찬 윤효손(尹孝孫), 이조 판서 강귀손(姜龜孫) 등이 의논드리기를,
“중국 관리와 호송군(護送軍)을 의순관(義順館)3384) 에서 접대할 때에 비록 의주(義州) 관리들이 사단(事端)을 낸 것이 부당했으나 중지할 수 없으니, 우선 해조(該曹)에서 대접할 준비를 조치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요동(遼東) 등지는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땅이었으므로 압록강에서 요하(遼河)까지 거주하는 사람이 모두 우리 나라 사람입니다.
肅宗 31卷, 23年(1697 丁丑)
臣於此, 又竊有所感。 蓋豆滿江北, 今雖爲異域, 實是我穆、翼兩祖胚胎日月之地, 比之周家, 卽同不窋之自竄、古公之陶穴。 今江北幹東、奚關城之間, 古德陵、安陵, 尙可指點其處, 鐵龍之埋山、白馬之渡水, 邊上之民, 傳說至今。 在今聖上, 眷焉北望, 其於濬哲長發之祥, 必有追慕繹思之懷矣。 至於遼左, 初是箕子受封之疆, 而開原縣, 乃古扶餘國, 高句麗始祖朱蒙發迹之地。 今之盖平縣, 乃辰韓故境, 亦我三韓之一也。 曾在高句麗盛時, 遼東一帶及女眞之屬, 大抵皆是封內, 以此爲海東强國
숙종 31권, 23년(1697 정축)
요동(遼東) 왼쪽에 이르서서는 처음에는 바로 기자(箕子)가 봉지(封地)로 받은 지역이며, 개원현(開原縣)은 바로 옛날의 부여국(扶餘國)이며,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 주몽(朱蒙)이 나라를 세운 곳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개평현(盖坪縣)은 바로 진한(辰韓)의 옛 지경인데, 역시 우리 삼한(三韓)의 하나입니다. 일찍이 고구려가 융성할 때에는 요동 일대와 여진(女眞)에 속한 것들이 거의가 모두 지경 안에 속해 있으며, 이 때문에 해동(海東)의 강국(强國)이 되었던 것입니다.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후한서85-고구려>
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삼국지30-고구려>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其性氣衣服有異.<양서54-고구려>(「남사」에도 같은 내용
『(고구려는)… 동이족들이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인 까닭에 언어와 법제가 많이 같다.
동이의 옛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해서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더불어 많이 같다.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많이 같은데, 그 성질과 의복은 다른 데가 있다.』
고 적고 있으며, 또 다른 기록에 옥저는 언어, 음식, 주거지, 의복이 고구려와 거의 비슷하고 특히 언어는 고구려와 많이 같고 조금 다르다고 기록 되어 있다.
耆舊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類.<후한서85-예>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삼국지30-예>
『(예의) 늙은이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한다. 언어와 법속이 대개 서로 유사하다. 언어와 법속이 대개 고구려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