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殿下)
전하(殿下)의 뜻이 ‘전의 안에 있는 사람’이냐, ‘전의 바깥에 있는 아랫사람’이냐 의 문제인데, 제가 확신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전하의 뜻이 어느 것이냐에 따라, 폐하의 뜻도 그에 따라 갈 것입니다. 물론, 전하의 뜻이 어느 것이냐에 따라, 전하와 폐하의 높낮이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殿이나 陛나 하늘궁전에 관련하여 천궁전(天宮殿), 천폐(天陛)이므로, 천궁전에 있는 사람은 천제(天帝)이고 황제는 천자(天子)이니, 전하가 폐하 보다 높은 위치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왕이나 황제는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대행자’이므로, 그들이 사는 곳은 당연히 하늘궁전입니다.
저도 한때 전하의 뜻이, ‘전의 바깥에 있는 아랫사람’이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기도 했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맞는 것 같았습니다.
전하의 원래 뜻이 무엇이든 간에, 쓰이는 용도는 존칭접미사입니다. 즉, ‘님’이나 ‘분’과 같은 용도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실례로, ‘황제폐하, 주상전하’라고 하여 ‘님=전하’의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대방의 이름을 생략하여 그냥 ‘님’이라 부르는 것처럼, 주상전하라 부르지 않고 그냥 전하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에서 ‘부모=님’이고, 선생님에서 ‘선생=님’이고, 손님에서 ‘손=님’이듯이, ‘임금=전하’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의 주장은, 실제로는 ‘임금=전하’라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원래는 ‘신하=전하’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것이 맞을까요?
그러나, 삼전도와 관련하여 승정원일기를 읽으면서 ‘전의 안에 있는 사람’이 맞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上步從至陣外, 龍骨大等, 留殿下〈坐〉於東作門外
상이 도보로 따라서 진 밖에 이르자, 용골대 등이 전하를 동쪽 작문(作門) 밖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일기를 번역하신 분은 여기의 殿下를 임금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전하는 ‘전의 아래’라는 뜻입니다.
실록이나 일기나, 인조를 지칭하는 용어로 ‘上’이라는 글자를 일률적으로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청태종을 지칭하는 용어로 실록에서는 ‘汗’, 일기에서는 ‘皇帝’라는 글자를 일률적으로 사용합니다. 뜬금없이, 아무 이유 없이 이 부분에서만 殿下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즉, 여기에서의 殿下는 임금이라는 뜻의 인조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글자의 뜻 그대로 풀이해서 ‘전의 아래’라는 뜻이 됩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전체적인 문맥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만, 여기에서의 전하는 임금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전의 아래를 뜻하는 구절이 됩니다.
즉, 여기의 殿이 무엇이냐가 이 글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나 사회에서, 운동회나 여러 행사 등에서 본부석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본부석은 항상 ‘두 개의 기둥을 세운 다음, 큰 천으로 씌우고, 못을 박고 밧줄로 고정한 막사’와 같은 구조입니다. 즉, ‘바닥과 벽이 없이 지붕만 있는 집’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운동회 때 만국기를 걸고 본부석에 천막을 짓는 풍습이, 일제 때나 서양에서 유래한 것이려니 하며, 막연히 그렇게 여겼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러한 풍습의 기원이 매우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복궁 같은 궁궐의 근정전 같은 殿만 생각하지만, 운동장이나 연병장, 넓은 평지에서 임시로 지은 궁전인 殿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어디가 되었든지 임금이 머물면 거기가 궁전입니다. 또, 임금이 머무르는 집은 전이 됩니다. 그러면, 사직단이나 수강단과 같은 기본 중에 기본인 국가 제례나 군대의 사열식, 대규모의 잔치 등의 행사에서, 임금이 햇빛을 그대로 받으면서,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행사를 진행할까요? 아니면, 근정전 같은 건물의 안에 들어가서 사람을 통해서 행사를 진행할까요? 그러한 야외에서 행사를 진행할 때, 임시로 지은 궁전이 바로 ‘지붕만 있는 집’인 막사입니다.
殿이 원래 어떤 형태의 집을 가리키는 글자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임시로 지은 막사와 같은 ‘임금이 머무는 지붕만 있는 집’의 기원은 몇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각종의 제례나 군대의 사열식 등의 국가행사 즉, 임금의 권위나 존재를 드러내야 하는 야외행사에서, 임금이 머무를 수 있게 궁전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목적의 궁전으로 바닥이나 벽이 없이 지붕만 있는 殿을 세우게 되면, 아랫사람들이 임금을 무엇이라 부르겠습니까? 사열하는 병사들이 저 멀리 전의 아래에 있는 사람을 바라봤을 때, 무엇이라 부를까요? 한정된 사람 밖에 못 들어가는 집과,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을 한번에 지켜볼 수 있는 천막, 어느 殿이 더 임금의 권위에 부합할까요?
즉, 殿下는 ‘殿의 아래에 계신 분’이라는 뜻이 됩니다. ‘전의 아래에 있는 사람’과 ‘전의 아래에 계신 존귀하신 분’은 뜻은 같지만, 존칭어를 쓰는 것과 쓰지 않는 것의 차이가 엄청 크게 느껴집니다. 단순히 천막의 아래에 있는 사람과, 궁전으로 쓰이는 천막의 아래에 계신 분은 존재감이 아주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뜻도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동서양 할 것 없이 존귀한 사람을, 옛날에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 보다 ‘무엇을 하는 자, 어디에 있는 자’ 등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래서, 전하는 ‘전의 아래에 계신 분’이라는 뜻이 맞습니다. 폐하 역시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의 아래에 계신 하늘아들님, 하늘궁전의 섬돌 아래에서 하느님을 뵙는 하늘아들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