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전하는 존칭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폐하(陛下), 전하(殿下) 등을 존칭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황제=폐하, 왕=전하’이고 ‘폐의 아래에 있는 사람, 전의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므로, 저는 그 사람을 황제나 왕이라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황제나 왕을 알현하는 신하’라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폐의 아래에 있는 신하’라 하였고, 저는 ‘폐의 아래에 있는 황제’라 하였습니다. 만약, ‘폐의 아래에 있는 신하’가 맞으면, 본래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인데,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것과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라,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고, ‘폐의 아래에 있는 신하’에 대해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자기 자신을 가리키던 호칭이 상대방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적 기원 어쩌고 하면서, 헛소리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폐의 아래에 있는 신하’가 맞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맞았습니다. 신하를 가리키던 호칭이 황제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맞기는 하였지만, 뜻은 전혀 달랐습니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를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키던 호칭이 상대방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바뀔 수도 없었습니다. ‘폐의 아래에 있는 신하’가 맞기는 하지만, 그 신하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신하가 아니었습니다. ‘폐의 아래에 있는 사람’이 ‘폐의 아래에 있는 신하’를 뜻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폐의 아래에 있는 신하=황제’였던 것이었습니다.
폐하는 존칭이 아닌 비칭이었습니다. 모두가 존칭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맞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모순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왔었습니다. 그런데, 존칭이 아닌 비칭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모든 의문이 다 풀렸습니다.
후한(後漢) 말기의 채옹(蔡邕)이 독단(獨斷)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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陛下者,陛階也,所由升堂也。天子必有近臣,執兵陳于陛側以戒不虞。謂之陛下者,群臣與天子言,不敢指斥天子,故呼在陛下者而告之。因卑達尊之意也。上書亦如之。及群臣士庶相與言曰殿下、閤下、執事之屬皆此類也。
폐하(陛下)라는 것은 폐계(陛階,섬돌)로 이를 거쳐 당(堂)에 오른다. 천자(天子)에게는 반드시 근신(近臣,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신하)이 있어 병기를 들고 섬돌 곁에서 불우의 사태를 경계하였다. (천자를 가리켜) 폐하라고 일컬은 것은 뭇 신하들이 천자와 더불어 얘기할때 감히 천자를 직접 가리키지는 못하였으므로 섬돌 아래(陛下)에 있는 자(곧, 근신)를 불러 더불어 말하였으니 이는 비천한 자를 거쳐 존귀한 자에게 (의사를) 전달하려는 뜻이었다. 상서(상소)할 때도 이와 같았다. 더불어서, 뭇 신하와 사서(士庶)들이 서로 더불어 말하며 전하(殿下), 합하(閤下), 집사(執事) 등등으로 칭한 것들이 모두 이런 부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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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을 독해하는 과정에서 폐하를 존칭이라 여기는 탓에 오해가 생겨, 사람들이 올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하가 천자와 대화를 할 때, 직접 천자에게 말하지 못하고 근신(폐하)를 통해 말을 대신 전하게 하였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그렇게 독해하면,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아랫사람의 호칭을 윗사람이 이어받아 쓰는 꼴이라 말이 안 됩니다.
지척(指斥)은 ‘웃어른의 언행을 지적하여 탓함’입니다.
폐하의 올바른 어원은,
{아랫사람인 신하가 윗사람인 천자의 잘못을 지적할 때(아랫사람인 신하가 윗사람인 천자의 잘못을 따질 때), 감히 존귀한 천자를 직접 나무랄 수가 없으니(감히 존귀한 천자에게 직접 손가락질을 할 수가 없으니), 근신을 불러다 놓고, 근신을 꾸짖어 간접적으로 천자의 잘못을 지적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입니다.
즉, 근신이 신하의 말을 천자에게 대신 전해주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근신이 신하의 꾸지람을 천자 대신 들었던 것에, 그 유래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대통령이 어떤 잘못된 정책을 시행하였을 때, 권신(權臣)인 국무총리나 중앙정보부장 등이 비서실을 찾아와서 또는 대통령과 함께 얘기하는 자리에서, 비서나 비서실장 등에게 ‘너희들 대통령 똑바로 안 모실래? 너희들이 그 따위로 일하면 대통령께 누가 된다는 거 몰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 장면과 같은 상황이 폐하의 어원이 됩니다.
아마도, 그러한 상황을 제도적으로 확립하여, 애꿎은 근신을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좀 더 직접적인 대화를 하기위해 천자를 폐하라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폐하라는 단어를 사용하다보니 버릇으로 굳어져서 계속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황제의 잘못을 따질 때는 황상(皇上)이라 부르지 않고 폐하라 부르도록 관습화한 것으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습을 백 년 전까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사람들이 잘 인식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따라서, 사극 등에서 아랫사람이 임금을 부를 때, 무조건 아무 때나 ‘전하, 전하’ 하는데, 그것은 잘못이고, 임금의 잘못을 따지는 장면 등에서만 사용해야 됩니다. 무엇을 건의할 때나 어떤 것을 허락해 달라거나 하는 등의 상소를 할 때는 전하라 하면 안 되고, 자리나 목숨을 걸고 올리는 상소 등에서만 사용해야 됩니다. 추측건대, 신하가 부르는 전하라는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어린 임금이나 담력이 약한 임금은 그때 마다 경기(驚氣)를 일으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