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라면 다들 중고등학생 시절 “한반도에 한사군(漢四郡)이 있었다.”고 배웠던 일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사기(史記)》등의 중국 역사서들을 찾아보면 그런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고,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이른바 ‘낙랑재평양설(樂浪在平壤說)’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조선시대에는 ‘패수요동설’이 대세
‘낙랑재평양설’은 조선시대에 출현하였다. 당시 한사군 논쟁에서 초미의 관심사는 ‘패수(浿水)가 어느 강이냐’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강의 위치를 통하여 고조선의 강역과 그 도읍 왕험성(王險城)의 위치를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학자들은 압록강·청천강·대동강(국내), 요하(遼河)·어니하(淤泥河)·난하(灤河)·혼하(渾河)(중국) 등을 그 후보지로 거론했으며, 영·정조 시기의 유득공· 한진서· 정약용· 안정복 등이 제기한 대동강설은 당시만 해도 ‘소수파 의견’으로 간주되었다.
사실 《사기》에서는 위만(衛滿)이 패수를 건너 왕험성을 점령했다고만 했을 뿐 그 패수가 대동강이라고 밝힌 적이 없는데다가, 역사지리적으로 보더라도 평양 남쪽을 흐르는 대동강은 애초에 사마천(司馬遷)이 소개한 왕험성에 이르기 전에 나타나는 패수와는 강의 흐름 자체가 정반대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동강과 평양은 고대의 패수·왕험성과는 역사적으로 전혀 별개의 땅인 셈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왔고 지금의 평양이 고조선의 왕험성 및 한대의 낙랑군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학자들로서는 역사기록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약용이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대동강을 패수로 추정하면서 《사기》의 기록을 부정한 데에는 이같은 배경이 있었다. 물론, 이같은 괴리는 중국 역사 기록에 대한 당시 조선 학자들의 잘못된 이해와 ‘소중화(小中華)’라는 편향된 세계관 때문에 발생한 해프닝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다른 주장을 펴는 학자들도 패수·낙랑·한사군 나아가 고조선의 위치를 찾는 데 있어서만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민해야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조선 후기에는 패수의 위치와 관련하여 역사지리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는 요동설이 대세를 이루었다.
‘낙랑재평양설’이 통설로 된 것은 일제 강점기
조선시대에는 ‘소수파 의견’에 불과했던 대동강설이 확고부동한 통설로 자리잡은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1910년부터 대대적인 고고 조사·발굴을 벌인 조선총독부는 평양에서 “낙랑”, “대방(帶方)” 유물·유적들을 차례로 발견해내고 이를 근거로 기존의 통설이던 패수요동설을 파기하고 대동강을 패수로 선언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빌미로 삼아 한일합방 이전만 해도 ‘백가쟁명(百家爭鳴)’의 국면을 이루었던 다양한 패수 관련 주장들을 한꺼번에 정리하고 대동강설만 유일한 진리로 받들어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조선총독부와 일본인들이 주도한 고고 조사·발굴들이 전혀 투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효문묘 동종(孝文廟銅鍾, 1910)·대방태수 장무이전(帶方太守張撫夷塼, 1911)·점제현 신사비(秥蟬縣神祠碑, 1913)·낙랑 봉니(樂浪封泥, 1920-) 등, 강점기에 이루어진 일련의 세기적인 대발견이 전부 일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점, 고고 발견이란 것이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인출하듯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닌데도 단기간에 일사천리로 동시다발적으로 온갖 성과들을 쏟아낸 점, 한반도에 실제로 고조선과 한사군이 존재했다면 관련 유물, 유적이 황해도·함경도에서도 폭넓게 출토되어야 정상인데 그 후 80년이 흐를 동안 평양지역을 제외한 어디에서도 한사군과 관련된 ‘의미 있는’ 유물·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는 점, 한 무제(漢武帝)가 설치한 것은 4개 군인데 그동안 발굴된 것은 ‘낙랑군’의 것들 뿐인 점, 대량의 “낙랑 출토류” 유물들이 1910년대 중국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등이 중국을 드나들며 “조선총독부를 위하여” 거액을 들여 “한대 발굴품”이나 “낙랑 출토류” 발굴품들을 대량으로 사 들인 점, 1993년 평양에서 출토된 이른바 ‘낙랑호구부(樂浪戶口簿)’에 19세기 일본에서만 사용되던 한자어 표현이 들어가 있는 점 등등은 일제가 벌인 고고 조작·위조의 방증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일제의 대대적인 고고 조사·발굴의 과정과 역사지리적으로 문제 투성이인 패수대동강설·낙랑재평양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과정 등을 살펴보면 그 모든 것이 결국 고고 유물·유적의 조작·위조를 통하여 한낱 가설에 불과한 ‘낙랑재평양설’을 역사적 진실로 만들고, 이를 발판으로 한반도에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영구화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고 벌인 일들이었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정인보가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에서 일제의 고고 조작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시킨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문헌적 근거가 전혀 없는 ‘낙랑재평양설’
지금의 강단 사학자들은 평양의 고고 유물·유적들을 ‘낙랑재평양설’을 입증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증거로 믿고 싶은 듯하다. 그러나 학자가 고대사를 연구할 때 역사자료이든 고고자료이든 간에 어느 한 쪽만 100% 맹신하는 것은 대단히 무모한 짓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양의 고고적 유물·유적들이 그 진위나 성격에 있어 “낙랑=평양”, “한사군=한반도”라는 등식을 충족시키기에는 상당히 미흡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작 이 지역 유물·유적들의 역사적 성격을 문헌적으로는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 유물·유적들이 온갖 조작·위조 의혹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인 결함일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몇 가지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중국의 역대 사서·문헌들이 공통적으로 추정하는 한사군의 위치는 거의 예외없이 압록강 너머의 요동지역이다.
게다가 1993년 중국에서 발견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는 한사군 중에서 가장 동쪽에 설치되었던 임둔군이 강원도 강릉이 아니라 중국의 요령성(遼寧省) 태집둔(邰集屯) 즉 고대의 요서(遼西)에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또, 인근에서 출토된 청동검은 날이 다소 마모되기는 했으나 부여·평양 등 국내에서 많이 출토되는 고조선계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의 전형적인 외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문화적으로 한반도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기존의 문헌적 근거들이나 최근의 고고적 발견들은 한사군 또는 고조선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하북-요령 일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00년 가까이 국내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낙랑재평양설’은 이제라도 파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애초부터 조선을 영구 지배할 목적으로 일본인들이 부풀려 놓은 식민사관의 방편이었다는 점은 둘째치고라도 무엇보다도 역사적 진실과는 너무도 괴리가 큰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17.01.03 08:45 승인
대동문화 98호 [2017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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