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조선 조정은 끝끝내 원정대와의 공식적인 접촉을 거부했고, 원정대는 회항할 수 밖에 없었다. 즈푸 항으로 돌아온 프랑스 해군은 곧바로 새로이 4척의 군함을 더 소집해서, 군사 훈련을 진행한 뒤 10월 11일 다시 한번 조선으로 향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프랑스 해군의 강화도 점령, 즉 병인양요이다.
병인양요
병인양요(丙寅洋擾[1] )는 1866년(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병인박해)을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적인 전쟁이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조선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사실 1차 방문 시점에서 조선은 이 원정대가 군대임을 알아챘으며, 고종은 급히 내탕금을 풀어 해군을 재정비하도록 명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군대는 프랑스 해군의 상대가 되지 못 하였다. 단 7척의 군함과 1500명 규모의 군대에 의해 강화도성은 점령되었고 강화 유수는 달아나고 말았다.
주민들은 이 소식에 피난길에 올랐고, 텅 비어버린 민가에 도착한 쥐베르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고, 때문에 다음과 같은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우리가 차지하고 들어간 집들은 처음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더러웠다. (중략) 기생충들을 단번에 몰아낼 방도는 없었다. 이 난공불락의 해충들은 놈들의 합법적인 집주인들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복수해 왔다."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와 뜨거운 증기는 수직으로 세워진 굴뚝을 통해 곧장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 밑에 수평으로 놓인 고래를 통해 방 전체를 돌아 지나서 가옥의 반대편 쪽에 야트막이 세운 굴뚝으로 나가게 돼 있다. (중략) 우리는 이 난방 시설을 무척이나 고맙게 사용했다."
아예 민가에 들어가 잠도 자고 온돌도 사용해 보았던 모양이다.
"대부분의 동양인들이 그렇듯이 조선인들도 물을 넣어 익힌 쌀을 주식으로 삼기에 이 싱거운 밥맛을 돋우기 위해 발효된 반찬과 자극적인 양념이 필요하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고추를 많이 소비한다."
"조선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다. 완벽하게 자모를 갖추고 있는 이 기호체계의 언어는 극동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언어이다."
"극동의 모든 국가들에서 우리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집 안에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냥 솜씨가 능란한 조선의 사냥꾼들은 조악한 무기를 가지고서도 저러한 맹수들과 어렵지 않게 싸워내니, 이 맹수들의 피륙은 조선의 주요 수출 품목이 되고 있다."
병인양요의 결과는 아마도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대로, 10월 3일 정족산성에서 당한 게릴라 기습으로 프랑스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했다.
조선군의 상실이 더 컸지만, 어쨌든 조선이 프랑스 해군에 승리(?) 한 셈.
어째서 충분한 전력을 온존하고 있음에도 강화도에서 퇴각했는가, 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함대를 이끌던 로즈제독은 강화도를 완전 점거하기 위해서는 산성에서 농성하는 조선군을 격파할 필요가 있지만, 포병대의 도움 없이
해병대의 전력만으로 성벽을 넘어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설령 더욱 깊숙히 전진하여도 조선에게 협상의 의지가 없으며
개항을 얻어낼 수 없으리라 보고 자진 퇴각했다고 보는 해석이 유력하다.
이에 대해 쥐베르는 "원정은 완전한 실패"라고 자평했다.
"우리는 조선 원정에서 기대했던 성과를 조금도 얻지 못했다. 한편, 우리 함대의 퇴각과 동시에 조선에서는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배가 되었고, 조선 정부는 유럽 국가의 침입을 비롯한 타협 일체를 격퇴하고 규탄한다는 선언문을 내렸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유럽의 국가들이 처음 접촉하는 이국의 국민들에게 폭력을 드러내고 횡포한 요구를 주장하는 일이 너무 빈번하다. 일단 그 나라가 아직 전신기를 갖지 못했고 또 그들 문명의 본원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면, 우리는 그들이 입는 폐해를 감안하지도 않고 주민들의 모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마치 우리에게 허락된 줄로 생각한다."
"더군다나 교의란 본질적으로 속칭 '무력'이라고 명명되는 이 슬프고도 의심스러운 설복 수단의 힘을 빌려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쥐베르는 이렇듯 자신들이 자행한 제국주의적 무력 시위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며 조선에 좀 더 온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한편으로 그는 책을 끝맺는 말로서, 강화에서 있었던 시간을 "전쟁" 이 아닌, excursion, 즉 일종의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오래도록 즐겁게 기억하리, 강화 섬에서의 이 소풍을.
Je me souviendrai longtemps, avec plaisir, de ces excursions dans l'île de Kang-hoa.
같은 사건을 두고도, 19세기 조선과 프랑스의 인식 차이는 그 정도나 큰 것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