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배시러님의 댓글을 본 뒤에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얼른 찾아봤습니다.
아차, 그 대목은 지난 번에 낙랑군과 백제 위치 쟁점으로 동아게가 한창 뜨거울 때 몇 번이나 찾아 읽었던 대목인데 저는 전혀 주목을 못 했습니다.
도배시러님께 감사드리며
관련 내용을 스크랩해 아래에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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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무(張茂)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
고구려의 압력이 가중되자 백제는 이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중국의 남조(南朝)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472년(개로왕 18)에 처음으로 북중국의 북위(北魏)와의 교섭을 시도하면서 구원병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 때 여례(餘禮)와 더불어 외교사절로서 북위에 파견되었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백제로서는 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외교 업무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나 당시 그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백제 지배세력내에서의 위치는 상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 :
『삼국사기(三國史記)』
『위서(魏書)』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538254&cid=46620&categoryId=46620
『魏書』 列傳 百濟
延興 2년(A.D.472; 百濟 蓋鹵王 ) 에 百濟王 餘慶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表를 올려 말하기를,
“臣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워 승냥이와 이리들에게 길이 막히니, 비록 대대로 신령하신 교화를 받았으나 藩臣의 예를 받들 길이 없었습니다. 天子의 궁궐을 그려 우러러 보면서 달려가는 마음 끝이 없습니다. 소슬한 바람이 살며시 일어나는데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시절의 변화에 잘 조화하시는지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억누를 길 없습니다. 삼가 私署한 冠軍將軍駙馬都尉 弗斯侯 長史 餘禮와 龍驤將軍帶方太守 司馬 張茂 등을 보내어 파도에 배를 던져 망망한 바닷길을 더듬게 하였습니다. 하늘에 운명을 맡기고 만분의 일이나마 조그만 정성을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귀신의 감응이 내리고 황제의 威靈이 크게 감싸주어 폐하의 대궐에 도착하여 신의 뜻이 퍼진다면, 아침에 그 말을 듣고서 저녁에 죽는다 하여도 영원히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二十五 百濟本紀 第三 盖鹵王
18년(서기 472),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임금이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의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저의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냅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신의 뜻을 전할 수 있다면, 비록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겠습니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凉風微應 伏惟皇帝陛下 協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運 遣進萬一之誠 冀神祇垂感 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표문에서 또 말하였다.
“신과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게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쇠(釗, 고국원왕)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신의 조상 수(須, 근구수왕)가 병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였고, 잠시의 싸움에서 소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馮氏, 연나라)의 운수가 다하자, 그의 잔당들이 도망쳐온 이후로 고구려가 차츰 번성해, 드디어 백제가 업신여김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화가 이어진 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마음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지아비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又云 臣與高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 輕廢鄰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須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殫力竭 轉自孱踧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女 執掃後宮 幷遣子弟 牧圉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연(璉, 고구려 장수왕)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어육이 되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끊임이 없습니다. 죄악은 넘쳐나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써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馮族)의 병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싸움이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고 둔하지만 힘을 다하여 우리 병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간계를 꾸미는 일이 하나가 아니니, 겉으로는 외효(隗囂)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하고 무모한 행동을 품고, 혹은 남쪽으로는 유씨(劉氏)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과 맹약을 맺어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하여 폐하의 정책에 배반을 꾀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堯)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丹水)에서 묘를 벌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질다고 일컬었지만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한 방울의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빼앗지 아니한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庚辰)년(서기 440) 후에 우리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小石山)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ㆍ기물ㆍ안장ㆍ굴레를 얻어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분한 마음을 깊게 품었습니다. 옛날 송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 장왕(莊王)이 맨발로 걸었고,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조그마한 변방의 소국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운을 모으고, 형세가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하십니까? 지금, 얻었던 말 안장 하나를 바쳐 실제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之期 假手之秋也 且馮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効畢力 當率所統 承風響應 且高句麗不義 逆詐非一 外慕隗囂藩卑之辭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蠕蠕 共相脣齒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嘗稱仁 不捨塗詈 涓流之水 宜早壅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並得衣器鞍勒 視之 非高句麗之物 後聞 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雖未委當 深懷憤恚 昔宋戮申舟 楚莊徒跣 鷂撮放鳩 信陵不食 克敵立名 美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况陛下合氣天地 勢傾山海 豈令小竪 跨塞天逵 今上所得鞍一以實驗
ㅡ 하략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