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書 卷四十二 列傳第十二 唐彬 당빈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彬既至鎮,訓卒利兵,廣農重稼,震威耀武,宣喻國命,示以恩信。於是鮮卑二部大莫廆、擿何等並遣侍子入貢。兼修學校,誨誘無倦,仁惠廣被。遂開拓舊境,卻地千里。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綿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由是邊境獲安,無犬吠之警,自漢魏征鎮莫之比焉。鮮卑諸種畏懼,遂殺大莫廆。彬欲討之,恐列上俟報,虜必逃散,乃發幽冀車牛。參軍許祗密奏之。詔遣御史檻車征彬付廷尉,以事直見釋。百姓追慕彬功德,生為立碑作頌。
(북쪽 오랑캐가 북평군을 침략했다. 당빈을 사지절 감유주제군사 영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삼았다. 당빈이 진에 도착하여 병사를 훈련시키고 무장을 날카롭게 했다. 농장을 넓혀 농사를 짓게해 위엄을 떨치고 나라의 명을 선유하고 은혜와 신의를 보였다. 이로 인해 선비의 두 부족 대막외, 적하등이 함께 인질을 보내고 공물을 바쳤다. 학교를 열고 게으르지 않도록 가르쳐 어진 은혜가 널리 베풀어졌다. 마침내 옛 영역을 개척해 천리를 넓혔다. 다시 진나라의 장성새를 복구했는데 온성에서 갈석까지 이르렀다. 산과 골짜기를 이어 거의 삼천리였다. 군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봉화와 돈대가 서로 바라보았다.)
=> 상기 지도에 표시된 노랑 점선, 산맥을 따라서 이어봤습니다.
낙양-요서 3,300리이니 서안-갈석 3,000리는 얼추 차이가 없지 싶네요.
갈석산은 3개 가 있습니다.
索隠(戦國策)碣石山在常山 九門県 -색은, 상산 구문현
地理志 大碣石山在右北平 驪城県 西南. - (한서)지리지 , 우북평 려성현
碣石山在遼西臨渝縣南水中也 - 수경주가 아닌 수경, 요서 임유현 진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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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창려의 갈석산은 가짜로 봅니다.
진황도의 갈석산이 진짜이지만 18세기말에 영국이 간척사업을 하면서 날려먹었다고 생각합니다.
진황도의 갈석산은 높이가 낮은 섬이라서 황제들이 가볍게 오르내린거라 생각하구요.
현재 이 갈석산은 파괴되어 찾을 수 없다고 봅니다.
여기까지가 전한 초기까지의 갈석산이고요. 장성의 기점이 될수없는 낮은 섬이죠.
후한 이후로 넘어오면 이상한 문헌이 등장합니다. - 진서 지리지
遼東國 秦立為郡。漢光武以遼東等屬青州,後還幽州。統縣八,戶五千四百。
襄平-東夷校尉所居。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
후한 광무제가 요동을 청주에 포함시켰다는 것이죠. 후한 초기의 사건입니다.
요동의 땅덩이 가 좁으니 청주에 속한것이 아닐런지 ?
그러다가 낙랑군을 설명하면서 경악스런 발언이 나옵니다. - 진서 지리지
樂浪郡 漢置。統縣六,戶三千七百
朝鮮-周封箕子地。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鏤方 駟望
낙랑군 수성현에서 진장성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서진 초기 당빈이 인식했던 3천리 진장성은 그림으로 표시했습니다.
서진초기까지 장성이란 2가지 입니다.
진시황의 진장성, 연나라의 장성
저는 낙랑군 요동설 지지자 입니다.
서진의 지리지와 문헌을 볼때 낙랑군이 요동에서 요서로 이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서진의 문헌을 볼때 낙랑군은 요동에서 북경 서쪽으로 이동한것으로 추정됩니다.
심백강 박사가 주장한 하북성 보정시 수성진으로 이동하고
그곳의 갈석산이 진장성의 기점이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서진 당시의 진장성 개념이죠.
이렇게볼때 최근 발견된 낙랑군 조선현 한현도의 무덤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위치 표시]
( 후한 시기에 교치된 낙랑군 조선현 ? 수성현 ? )
심증을 나열한 것이니 참고만 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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