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10월 10일
1차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이 발발 당시
진주목사는 이경이라는 자였다
이경은 전쟁이 발발하고 경상도의 조선군이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가자
급히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지리산으로 도피하였다
도피를 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는 꼬박꼬박 조정에 알렸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그에게 당장 진주목으로 돌아가서 방어를 할 것을 명했으나
이경은 결국 지리산에서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경의 후임으로 전주목을 임시로 관리하던 자는 김시민이었다
김시민은 왜군이 고성과 사천을 점령하여
진주를 압박하자
10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사천과 고성, 진해를 탈환하였다
조정에서 그 공을 높이 평가하여
김시민을 정식으로 진주목사로 임명하였다
한편
조선군이 각지에서 수비를 공고히 하고
남해상에서도 왜군이 연패를 기록하자
왜군은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군 장수들은 김해에서 회의를 하며
“경상도 병마 주력이 진주성에 있는 듯하니 이 뿌리를 먼저 뽑아버리면 다른 방면에서 시끄럽게 움직이는 조그마한 군사들은 겁에 질려 스스로 흩어져 소멸되어버릴 것이다. 대부대를 동원해서 먼저 진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라고 결론을 내렸으며,
때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경상우도의 요충지이자 전라도 침공을 위한 교두보로
진주성의 중요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진주성 공략을 명령하였다
이에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왜8군이 3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 공략에 나섰다
왜군은 순식간에 노현, 창원, 함안 등을 함락시켰으며
경상우도에서 방어를 하던 조선군은
8000의 병력을 잃고 대패하고 말았다
경사우병사 류숭인은 창원에서 패퇴하여
소수의 병력을 이끌로 진주성에 도착하였다
류숭인은 자신과 부하들을 성안으로 들여보내 줄것을 청하였으나
김시민은 자신보다 상관인 류숭인이 성안에 들어오면
자신의 작전을 제대로 펼치지 못할 것과, 지휘계통의 혼선을 우려하여
요청을 무시하였다
음력 10월 4일
왜군의 선봉대 1만이 진주성에 도착하여
경상우병사 류숭인이 이끄는 조선군을 그대로 학살하였다
김시민은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면서도
끝까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이를 본 조선군은 그의 냉정함에 치를 떨며 사기가 추락하였다
의병장 곽재우가 힘을 써서 겨우 사기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류숭인의 부대를 전멸시킨 왜군은 성을 포위하였으나
저 멀리 진을 치고 있는 의병대의 존재를 의식하여 섣불리 공격을 하지 않고
심리전만 계속하여 시도하였으며,
조선군 역시 나서지 않고 심리전으로 응수했다
음력 10월 6일
왜군의 본대가 도착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조총 일제사격에 성이 침묵하자 왜군은 돌격을 감행하였고
조선군이 화포로 대응하자 왜군은 근처 민가를 헐어 방패로 이용하였다
음력 10월 7일
왜군의 공세는 크게 효과적이지 않았다
왜군은 주위 민가를 약탈하고 야간에는 공격을 하지 않자
김시민은 성벽 위에서 악공들에게 퉁소를 불거나 거문고를 연주하며
심리전을 걸었다
그러자 왜군은 당황하여 포로로 잡혀있던 조선인들 중
아이들을 추려
“한양이 이미 함락되었고 팔도가 붕괴되었습니다.
아저씨들이 새장 같은 진주성을 어떻게 지키겠어요. 빨리 성문을 열고 항복하세요”
라고 소리치며 성 외곽을 돌게 하였다
그러자 몇몇 조선군이 분개하여 성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김시민이 그들을 진정시켰다
음력 10월8일
왜군은 총공격을 가했다
진주성은 함락직전까지 갔으나 간신히 막아내는 것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성 안의 군수품은 바닥을 드러냈고
김시민은 화살을 아끼고 돌을 이용할 것을 명했다
성 외곽에 남아있던 의병대가 계속 해서 왜군의 후방에 나타나
왜군의 신경을 긁어대자,
왜군은 먼저 이 의병대를 없애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음력 10월9일
왜군은 다수의 공격대를 편성하여
전장 외곽을 돌아다니는 의병대를 섬멸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부대를 여럿으로 나눈것이 패인이 되어,
의병장 김준민과 최경회 등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만다
왜군은 토성을 쌓아 그 위에서 조총으로 성을 사격하고,
공격부대에게 대나무 다발로 화살을 막으며 사다리를 들고 진격하게 하였으나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결국 왜군은 다시 한 번 심리전을 걸어
밤에 성 밖 여러 곳에 모닥불을 피워 퇴각하는 척 연기하여 조선군을 유인하였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 있던 한 아이가 탈출하여
진주성에 들어와 새벽에 왜군의 총공세가 있을 것을 경고하였다
음력 10월10일
왜군은 총공세를 가했다
일부 성벽이 점령되어 방어선이 무너졌으며,
악천후에 아직 날이 어두워 난전이 벌어졌다
김시민은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병에게 총탄을 맞아 쓰러졌으며,
곤양군수 이광악이 김시민을 대신하여 조선군을 지휘했다
결국 왜군은 오전 11시경 부대를 모두 철수시켰다
왜군은 약 300여명 가량의 상,하급 지휘관을 잃었으며
병력 역시 1만이 넘게 잃었다
단순 수치상의 피해뿐만 아니라,
이 전투의 패배 인하여 왜군의 전라도 진출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전라도를 본영으로 삼고 있는 조선 수군의 주력부대와
전라도 각지의 조선군과 의병들이 안심하고 싸울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동시에 왜육군의 보급문제에 치명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급히 부상을 치료받았으나
음력 10월18일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