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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04 20:09
[기타] 2원(二元)통치조직의 창시: 모용선비의 연(燕)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364  

정복왕조(北魏,) 출현의 예고


                                                              홍원탁
(서울대 교수)


Janhunen(1996: 224)에 의하면, 홍산문화 (紅山, 4,000-3,000 BC) 이후 남만주 문화의 발전과정은, 특히 상나라에 앞섰던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 2,000-1,500 BC)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분명한 연속성을 유지하였다. 옛 연(燕, 1027/1025?-222 BC)나라는 전국시대(403-221 BC)에 와서야 비로서 중국왕조 역사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민족, 언어, 문화 등의 측면에서 볼 때, 요서(?-大凌河유역)와 오늘날의 하북성 지역에 위치했던 고대의 연나라는 원래 중국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Janhunen은 홍산문화의 후예인 (원시 알타이 계통 언어를 사용했던) 원시-선비족들이 바로 초기 연나라의 주 구성원 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비족들은 2세기 중, 단석괴(檀石槐, 156-81)의 영도 하에, 짧은 기간이나마 하나의 제국을 이룩했었다. 이 단명의 선비제국은 몽골고원의 흉노 세력을 일시적으로 대체했었다. 그 후, 한 동안 약세 이었다가, 한족 왕조들이 쇠퇴함에 따라, 4세기에 모용선비 연(前燕, 349-70; 後燕, 384-408; 西燕, 385-94; 南燕, 398-410) 왕국들을 세울 수 있었고, 5세기에 와서는 최초의 북중국 정복왕조인 탁발선비 북위(386-534)를 세우게 되었다.

후한의 쇠망은 184년 황건적의 난으로 시작된다. 188년에 영제(靈帝)가 죽은 후, 한의 통치자들은 지방 군벌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요동은 190년부터 238년까지 공손씨 (公孫度, 公孫康)에 의해 점거되었는데, 이들은 196-220년 기간 중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연왕이라 자칭하던 공손연(公孫淵)는 조조(曹操)의 위(魏)나라 원정군에 의해 239년에 살해당하였다. 중국의 삼국시대(三國, 220-265) 기간 중에는 선비의 작은 부족장들이 위 조정과 개별적으로 흥정을 하면서 변경의 많은 지역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위 조정은 국경 밖의 유목민에게는 후한 보조금을 주면서 국경무역을 허락하였고, 국경 안의 부족들에 대해서는 간접지배 정책을 유지하였다. 단명의 서진(西晉, 265-316) 역시 위의 정책을 답습하였다.

285년에 모용선비 부족장이 된 모용외(慕容?, r.285-333)는 곧바로 부여를 공격했다. 286년에는, 기원전108년에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복 한 이래 한족들이 정착한 요하 유역의 농경지대를 공격했다. 요하 유역은 중국이 통일되면 한족 제국에 흡수 통합이 될 수도 있었지만, 무정부상태의 혼란기에는 제일 먼저 중원의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지역이었다.  하긴 중국대륙의 한족 통치자들 역시 동북 변경지대를 그리 중시하지 않았고,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상당한 자치권을 주었었다.

291-305년 기간 중, 중국대륙 전역에 내란이 일어났다. 위와 서진의 볼모정책 덕분에 중국 왕실 내에서 성장하고 중국화된 새로운 유형의 흉노족 지도자가 선우가 되어, 311년에 낙양을 함락시키고 진 나라 황제를 사로잡아 서진을 유린했다.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자 진 황족의 일부는 남쪽으로 달아나, 317년에 양자강을 장벽으로 삼아 건강(建康, 지금의 南京)에 수도를 정하고 동진을 세웠다. 5세기에 게르만족에 의해 황폐화된 로마를 콘스탄티노플이 대신하였던 것처럼, 남경은 589년까지 장안과 낙양의 역할을 대신했다.

Ledyard(1983: 331)는 “317년”을 중국 역사상,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하나의 분기점으로 이해한다. 중국 대륙의 주요 부분이, 아니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한족이 아닌 이민족에 의해 점령된 역사적 전환점이 바로 317년 이라고 생각한다.

흉노가 북중국에 처음으로 세운 전조(前趙, 304-329)는 너무 중국식이었기 때문에 몽골 초원지대의 토박이 흉노 부족들로부터 호감을 사지 못하고 내분의 씨앗을 키웠다. 반대로, 두 번째 조나라(319-349)는 지나치게 흉노식이였기 때문에 중국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 마지막 흉노왕의 아들은 후궁 하나를 식탁에서 구울 정도로 극악무도했다 한다.

당시 만주의 선비족은 더 이상 순수한 유목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상당기간 요하 유역을 점령하여 농민과 도시민을 지배해왔었다. 선비족은, 요서 초원지대는 부족 전통에 따라 군사적으로 조직을 해 다스리고, 요하 유역에 거주하는 농민과 도시민들은 중국식 문민 관료제도로 다스리는 2원(二元)적 통치조직을 운용했다. 문민 관료는 절대로 부족들로 구성된 군대의 지휘관이 되지 못하였다. Barfield(1989: 97-99, 106)에 의하면, 모용 선비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5호16국 시대(304-439)에 (정주 농경지역에 대한) 관료적 행정조직과 (목초지 유목민을 상대로 하는) 부족적 군사조직을 분리한 2원적 통치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세운 것이다.

모용 선비족은 그들 자신의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전에 여러 세대에 걸쳐 중국 국경 안에서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살았었다. 모용외는 자신이 세운 국가의 기초를 구축할 때, 모용씨의 국가를 한 개의 중화제국으로 발전시켜 보려는 의도를 가진 수많은 중국 관리들과 학자들의 조언과 협조를 얻었다. 한족 자신의 사마씨 황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흉노의 지배에는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수 많은 중국 관료들이, 당시와 같은 정치적인 혼란기에, 요동 땅의 작은 나라에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모용씨 측에 가담했다. 그들은, 중국식으로 교육을 받은 모용선비 지배자를 통치자로 모시면서, 이상적인 중국식 조정을 조직하고, 모용씨의 국가를 점차 서쪽으로 또 남쪽으로 확장 해 나가도록 도왔다.  모용외는, 중국식 행정규율과 정부 운영 조직을 도입하고, 자신의 군대에 훌륭한 무기와 갑옷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군사력을 크게 강화했다.

Fairbank(1992: 111-2)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중국적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목민적인 2원제도는 4세기부터 남만주 지역에서 출현하는데, 후대 몽골족과 만주족 정복왕조를 거치면서 거대한 제국 전체를 장악하고 지키는 통치체제로 완성되었다. 덕으로 다스린다는 유교적 신화가 있지만, 왕조의 출발 자체가
바로 군사력에 의한 것이고, 황제 중심의 전제적 체제는 지배자가 반란세력을 진압할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을 가졌을 때만 존속이 가능 한 것이다. 하지만 일단 왕조가 확립되면 관료체제는 결국 문관에 의해 운영되게 마련이다. 유교 전통으로 훈련 받은 문관이 군사전문가로 변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개중에는 유능한 무관이 나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군사기술은 유목 정복자들의 주 특기였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혁신적인 만주 유목민들이 중국식 관료조직의 효율성과 자신들 고유의 군사적 장점들을 모두 취합하는 이원적 지배체제를 만들어 중국대륙의 심장부를 점령하고 통치하게 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식 국가조직은 왕의 형제들을 봉토를 받는 친왕(親王)의 신분으로 만들어 높은 지위를 즐기며 살게 한다. 실제로 중국 왕조의 친왕들이 흔히 봉토의 수입을 가지고 한가롭고 호사스런 생활을 영위했으나, 모용씨 왕의 형제나 아들들은 정부 내의 가장 중요한 직책을 부여 받았고, 모두가 다 군대의 장군으로 봉직했다. 연나라가 성취한 정복들의 거의 대부분이 왕의 형제나 삼촌들의 탁월한 전략과 지도력 덕분이었다.

모용외와 그 후계자들은 느슨한 연맹체 형태의 부족 집단을 이원적 통치체제의 국가로 변모시켰다. 15세에 족장이 된 모용외는 일직이 농업과 관료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국식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은 모용황(慕容?, r.333-49)은 337년에 스스로 전연(前燕)의 왕이라 칭하면서, 유목민과 농경민 모두를 지배하였다.  연은 전국시대에 중국대륙 동북방에 있었던 왕조의 이름이었다. 모용 선비는 오늘날의 북경을 포함하는 하북성의 북부지역까지 강역을 확장하였다. Schreiber(1949-55: 378)에 의하면, 모용
선비족이 최초에 점거한 지역이 고대 연나라 영토와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연이라는 이름이 부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모용선비가 352년에 중원을 정복하자, 모용씨 조정의 한족 관료들이 제일 먼저 모용준(r.349-60)에게 황제라 칭할 것을 권했다. 황제의 조정 형태가 되면 한족 관리들 자신이 좀더 높은 칭호의 직위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권유를 한 것이다.  모용준이 360년에 죽자, 유능한 동생인 각(恪) 대신에 11세湄涌?의하면, 연나라 말기에 병사들이 부패한 조정에 너무나도 실망을 했었기 때문에, 모용평(慕容評)이 [아무리 훌륭한 지휘관이었더라도] 죽기로 공격을 해오는 부견의 군대를 격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Schreiber (1956: 125)는, “모용씨가 중국화 되자 한족 고위 관료들뿐만 아니라 남조 까지 모용씨를 존경을 했다”고 말한다. 얼마나 비꼬는 찬사인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중국: 황금시대의 여명 - 200년부터 750년까지”라는 주제로 (2004. 10. 12. - 2005. 1. 23.) 전시회를 열었는데, 오늘날 요녕성의 서부에 위치한 조양(朝陽)과 북표(北票) 지역에서 발굴되고 모용 선비 고유의 유물로 확인된 상당수의 청동기와 금동제품들이 전시되었다.
전시 내용을 책자로 펴낸 Watt(2004: XIX)등은 모용 선비의 예술품에 나타난 전형적인 도안 형태들을 얼마 후에 중국대륙의 북위와 한반도의 신라 예술품에서 다시 보게 된다고 말한다.

조양에서 발굴된 한 쌍의 말 안장에 새겨진 (새와 다른 동물들을 품은 6각형들의) 투과형 문양은 모용 선비 고유의 기법인데, 후에 북위로 전파된다. Watt(2004: 125)등은, 이 문양이 같은 시대에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신라왕국의 한국사람들에 의해서도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사실 이런 문양들은 신라에서만 채택된 것이 아니라, 가야에서도, 또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일본열도의 야마토 왕국에서도 채택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양식과 문양에 아주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유물들이 선비족의 유적지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370년, 선비족의 연나라는 부견(?堅)의 전진(前秦, 351-394)에 의해 정복된다. 부견을 흔히 탕구트(티벳)족 출신이라 하지만,0)을 정복하려고 남쪽에서 대규모 전쟁을 벌였지만, 383년의 비수(肥水)전투 패배로, 전진 왕조를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탁발이란 이름의 선비족은 그들 본거지인 성락(盛樂)으로부터 병주(幷州)로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북위를 세운 탁발규(拓拔珪)는 398년에 만리장성을 넘어 산서성 북쪽으로 쳐들어와 평성(平城, 오늘날의 大同)에 수도를 정했다.


5   Schreiber (1949-55: 374-5, 424) 참조. 모용외는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가령(家令)들을 제정했는데, 그 중 하나는: “농업은 국가의 근본이므로 농업의 진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晉書 卷一百八 載記 第八 慕容? … 太康十年 … 敎以農桑 法制同于上國 … ?…言曰 稼穡者 國之本也 不可以不急

7   Schreiber (1956: 121-2) 참조. 모용황은 자신의 부친이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을 대한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대했다. 그는 황태자를 앞장 세우지 않았고, 유능한 왕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어느 왕자이든 높이 존경했다. 모용황은, 한족 관료들이 맹렬히 반대를 안 했다면, 태자 준(儁)을 제쳐놓고 수(垂)에게 제위를 승계시킬 생각까지 했었다. 당시 모용준은 42세에 제위를 승계했다.

8   Barfield (1989: 109-111) 와 Gerhardt Schreiber, “The history of
former Yen dynasty,” Monumenta Serica, Vol. 14 (1949-55: 374-480) and
Vol.15 (1956: 1-141) 참조. 모용외가 아들에게 훌륭한 중국식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모용황은 중국 고전에 능통했고, 중국의 전통적 교육방법을 존중하게 되었다. Schreiber가 李昉 (925-96)의 太平御覽에서 인용.
晉書 卷一百八 載記第八 慕容? … 太康十年 … 敎以農桑 法制同于上國
晉書 卷一百九  載記第九 慕容? … 尙經學
魏書 列傳 慕容? ...父涉歸...遷邑遼東…死 ?代領部落 ...死
子元眞代立…自稱燕王 置官如魏武輔漢故事 …征高麗[341]
大破之…子儁統任…建國十五年[352] ...置百官

9 그러자 모용준은 한족 관습을 흉내 내, “우리 본향이 사막과 목초지이며 우리는 본래 야만인이었다”고 말하며 한족 신하들의 권유를 물리치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주다가, 353년 1월에 “나는 중국 백성들의 권유로 부덕하나마 제위에 오른다”며 자신을 황제라 칭했다. Schreiber (1956: 31-35) 참조.

10 Schreiber (1956: 54-5) 참조. 360년 정월, 모용준이 병석에 누어있을 당시, 359년 겨울까지 지연되었던 새로운 군대의 징집이 본격적으로 집행되고 있었다. 모든 주와 군으로부터 징집된 장정들이 수도로 집결하면서, 작당한 도둑떼가 들끓었고, 산적들이 새벽부터 해 질 때까지 습격을 하여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

晉書 卷一百十 載記第十 慕容儁 儁于是復圖入寇 兼欲經略 關西
乃令州郡校閱見丁 精覆隱 漏率戶留一丁 餘悉發之欲使步 卒一百五十萬
期明年大集 將進 臨洛陽 爲三方節度 武邑劉貴 上書極諫 陳百姓凋弊 召兵非法 恐
人不堪命 有土崩之禍... 乃 改爲三五占兵… 是時兵集 ?城 盜賊互起 每夜攻劫
晨昏 斷行

  晉書 卷一百十一 載記第十 慕容暐 其尙書左丞申紹上疏曰 …弓馬之勁 秦晉所憚
雲騎風馳 國之常也 而比赴敵後機 兵不速 濟者何也 … 遂致奔亡 ... 退離
蠶農之要 兵豈在多 貴於用命 宜嚴制軍科 務先饒復 習兵敎戰 使偏伍有常
從戎之外 足營私業 Schreiber (1956: 82-6) 참조.



동아시아 역사 강의: 1-9 (2005. 2. 19.)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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