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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2-12 10:02
[한국사] 울루스부카의 아들 이성계, 조선을 개국하다(펌) 1 (원나라 중국역사 아님)
 글쓴이 : 고이왕
조회 : 930  

http://shindonga.donga.com/3/all/13/1207958/1


  • 이성계 일가는 원나라 지방군벌 테무게 왕가의 가신(家臣)으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지위를 세습하면서 함경도 일대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다. 1392년 조선 건국은 원나라 지방군벌과 고려 성리학자의 합작품이면서 명나라와 만주의 몽골 세력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한 것이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의 중국 지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중국은 원나라를 중국 왕조의 하나로 보나, 몽골은 원을 유라시아 대부분을 지배한 칭기즈칸 제국의 일부로 본다. 몽골족이 세운 여러 나라 중 원나라만 하더라도 중국 본토뿐 아니라 몽골과 만주, 티베트, 북베트남, 고려 등을 직·간접 지배했다.


청말(淸末) 황흥, 장병린, 추용 등 많은 한족 출신 혁명가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중국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나라 또한 중국이 아니라 몽골 왕조의 하나로 봐야 한다. 중국은 아전인수(我田引水)에서 벗어나 원과 요(遼)의 역사를 몽골에 돌려줘야 할 것이다. 현재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중국 역사라는 베이징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도 거란족의 요나라나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에 대해 역사적 권리의 일부를 주장할 수 있다. 요나 금(金), 원은 함경도와 평안도 일부를 영역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원나라 이전 화북을 정복한 흉노, 선비, 저·강 등과 달리 몽골인은 중국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중앙아시아 문명국 호레즘의 사마르칸트, 부하라 같은 대도시를 보고 온 후 중국에 진입한 까닭에 중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을 갖지 않았다. 몽골족은 오히려 ‘땅에 엎드려 밭이나 가는’ 한족을 경멸했다. 4세기 모용선비 전연(前燕) 황제 모용준이 생포한 한족 염위(冉魏) 황제 염민을 노복하재(奴僕下材)라고 경멸했듯이 몽골족도 한족을 멸시했다. 

쿠빌라이(1215~1294)는 몽골인을 1등급, 서역인을 2등급, 한인(거란, 여진, 금나라 치하 한족)을 3등급, 남인(남송 치하 한족)을 4등급으로 구분하는 등 민족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장관에는 몽골인이 임명되고, 차관에는 서역인이 임명됐으며, 한인이나 남인에게는 말단직만 주어졌다. 유교(儒敎)의 정치·사회적 지위도 격하됐다. 한화파(漢化派)가 권력을 잡았을 때만 겨우 몇 번 과거가 치러졌다. 이처럼 민족차별 정책은 소수 몽골인이 다수 한족을 통치하기 위한 몽골판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단이었다. 한인(漢人)과 남인(南人) 간 차별도 심했는데, 이는 남인의 수가 한인의 7~8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의 명령으로 옌징(베이징)에 막부(幕府)를 차린 무칼리는 잘라이르부 살레타이에게 고려 공략을 맡겼다. 무칼리는 칭기즈칸과 ‘발주나 호수’의 흙탕물을 함께 마신 사구(四狗), 사준(四駿) 중 하나로 칭기즈칸에게는 형제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사구, 사준은 충견 넷과 준마 넷을 뜻하는 말로, 칭기즈칸을 도와 몽골제국을 이룬 8명의 장수를 가리킨다.

고려는 결국 몽골에 항복해 쿠빌라이가 세운 원(元)에 편입됐다. 쿠빌라이는 만주 일대를 영지(領地)로 받은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 옷치긴 가문 세력을 견제하고자 남쪽의 고려를 이용했다. 충렬왕 이후 고려왕들은 원나라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았으며, 원칙적으로 정비에게서 난 아들을 왕세자로 봉했다. 고려 왕들은 세자 시절 대도(베이징)에서 인질로 체류하다가 즉위했다. 고려 왕들은 몽골식 이름을 갖고, 몽골식 변발에다 몽골어를 주로 사용했다. 충렬왕의 아들 이지리부카(충선왕)는 원나라 내부 권력투쟁에도 가담했다. 몽골 지배기 고려의 왕은 제후왕으로 격이 낮아졌다. 제후왕으로 전락해 조(祖), 종(宗)을 붙여서 묘호(廟號)를 지을 수 없었다.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충렬왕’ ‘충선왕’ ‘충혜왕’처럼 왕호에 ‘충(忠)’을 덧붙였다.  

원은 고려 영토 내에 쌍성총관부(함경도 일대), 동녕부(평안도 일대), 탐라총관부(제주도)를 뒀다. 원나라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심양왕(瀋陽王)에 고려 왕족을 임명했다. 고려 왕족을 심양왕으로 임명한 데는 남만주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고려인 통제에 편리했을 뿐 아니라 만주의 지배자인 테무게 가문과 고려왕을 동시에 견제하는 목적도 있었다. 고려왕과 심양왕은 수시로 대립했다. 이는 원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 제대로 기능했음을 말해준다.

원나라 지배기 고려는 등뼈를 꺾인 장사(壯士)처럼 독자성을 잃어갔다. 원나라 말 고려 신진사대부가 성리학(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수용하면서 고려와 뒤를 이은 조선의 한족 중심적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가 심화됐다.  

원나라 시기 중동-중앙아시아로부터 선진 과학기술이 도입됐다. 역학(曆學)과 수학에도 괄목할만한 발전이 이뤄졌다. 강남에서 생산된 쌀과 소금, 직물이 운하와 바다를 통해 대도로 운송됐으며, 이에 따라 조선과 항해술이 크게 발달했다. 명나라 초기 정화의 인도양 항해(航海)도 이때 발전한 조선과 항해술에 힘입은 바 크다. 한편 쿠빌라이를 계승한 황태손 성종 이후 제위(帝位) 다툼을 둘러싼 권신(權臣)들의 발호로 인해 원나라 궁정은 음모의 소굴(巢窟)이 됐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지도부는 제대로 된 통치철학을 갖지 못했다. 몽골족은 싸우고 빼앗는 데는 천재적이었으나, 1억 명에 가까운 인구를 다스리는 데는 금방 무능을 드러냈다. 쿠빌라이 재위 기간 이미 허난과 안후이(安徽)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원나라는 재정 담당에 압둘 라흐만, 상가, 아흐마드 등 상인 기질의 중앙아시아인을 주로 기용해 입도선매(立稻先賣) 방식으로 세금을 거뒀다. 거의 착취 수준이었다. 그들은 원(元)이라는 대제국을 공공(public)이 아니라 사업(business)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았다. 한마디로 통치철학 부재였다.  

수·당(隋·唐) 이래 화이허(淮河) 이남이 경제중심지가 됐으며, 인구도 강남이 화북에 비해 월등히 많아졌다. 남·북조(南北朝), 수·당, 5대 10국, 송나라를 거치면서 중국의 중심이 황하 상류 시안과 뤄양에서 카이펑을 중심으로 하는 중하류로 바뀌었다가 마침내 창장 하류로 옮겨온 것이다. 특히 항저우(杭州)를 수도로 한 남송은 강남을 집중 개발했으며, 이후 왕조들인 원· 명·청 등은 국가 재정을 주로 강남에 의존했다.  

1351년 황허 둑 쌓기 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농민들이 백련교(白蓮敎) 주도로 허난에서 봉기했다. 원나라군은 송(宋) 휘종의 후손을 자처한 백련교 교주 한산동(韓山童)이 주도한 농민 반란군을 공격해 초기에 격멸했으며 한산동을 붙잡아 처형했다. 백련교는 조로아스터교를 개혁한 마니교(摩尼敎)의 중국 버전으로 명교(明敎)로 불렸으며, 허난과 안후이를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백련교도 봉기군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하고 있어 홍건적(紅巾賊)이라고 불렸다.

홍건군의 봉기를 필두로 반란이 밀물처럼 일어났다. 소금거래업자인 저장(浙江)의 방국진(方國珍)에 이어 안후이의 곽자흥(郭子興)과 장사성(張士誠), 후베이의 서수휘(徐壽輝) 등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빈농 출신 걸승(乞僧) 주원장(1328~1398)은 1351년 곽자흥 군단에 가담했다. 주원장은 고향 안후이성 후저우(濠州)에서 서달(徐達), 탕화(湯和)와 같은 죽마고우들을 포함한 지휘관급 병사 700여 명을 모집했다. 영민한 자질에다가 우수한 장교까지 거느린 주원장은 곧 두각을 나타냈다. 원나라군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백련교도 유복통은 1355년 안후이의 박주(亳州)에서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추대해 송(宋)을 세웠다. 홍건군 본류에 속한 곽자흥과 주원장 등은 형식적으로나마 송(宋)을 받드는 모양새를 취했다. 

원나라 조정은 유복통, 한림아의 반란을 원의 국기(國基)를 흔드는 중대사로 판단했다. 원 조정은 톡토와 차칸테무르를 사령관에 임명해 반란에 대처하게 했다. 원나라군과 한족 지주들은 연합군을 편성해 홍건군을 공격했다. 유복통은 원나라군에 정면으로 대응하기보다는 4로(路)로 분산해 대응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잘못 판단했다. 유복통은 자신이 중로(中路)를 맡아 허난을 점령하는 한편, 제1로의 관선생(關先生)은 허베이, 제2로의 모귀(毛貴)는 산둥, 제3로의 대도오(大刀敖)와 백불신(白不信)은 관중으로 진격하게 했다. 관선생이나 대도오, 백불신을 비롯한 홍건군 지도자 다수는 가족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가명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복통은 카이펑을 수도로 삼고, 사방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그는 이런 이유로 원 조정의 목표가 돼 당대 제일의 명장 차칸테무르가 지휘하는 원나라 정규군의 공격을 받았다. 1359년 카이펑이 차칸테무르군(軍)에 점령되자 유복통은 한림아와 함께 벽지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허베이로 진출한 관선생은 타이항 산맥을 넘어 산시성 다퉁(大同)을 약탈한 후 동북진(東北進)해 원나라 하계 수도인 개평부(금련천)를 점령했다. 관선생은 원나라군이 추격해 오자 동쪽으로 달아나 랴오양(遼陽)을 함락하고, 압록강을 건너 1359년과 1361년 2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했다. 홍건군은 베이징 부근을 우회해 근거지인 허베이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으로 탈출로가 막히는 바람에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남하한 것이다. 홍건군의 제2차 침공 시 고려는 개경을 빼앗기고, 왕(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해야 했다. 고려는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이 모집한 의용병의 분전에 힘입어 겨우 개경을 탈환했다.

고려 동북면의 원나라 지방군벌 이성계(1335~1408)도 기병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성안으로 돌입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홍건군은 4로로 분산된 끝에 봉기 10여 년 만에 소멸됐다. 홍건군은 통일된 이념과 군율을 갖지 못했다. 홍건군이 급히 소멸된 것은 △당대 제일의 명장 차칸테무르가 지휘하는 원군의 공격도 공격이지만 △홍건군을 4로로 나눈 유복통의 전략적 실수와 함께 △뚜렷한 이념을 갖지 못한 홍건군 지도자들끼리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자괴작용(自壞作用) 때문이었다.  

특히 산둥 지난(齊南)에 일시적으로 뿌리내린 모귀 군단의 자괴작용은 목불인견이었다. 모귀는 부하인 조균용에게 살해당했으며, 조균용은 속계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모아놓은 미인과 재산을 차지하고자 싸운 것으로 보인다. 톡토가 이끄는 원나라군은 장사성과 서수휘를 비롯한 반란군에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톡토는 권력투쟁에 패배해 실각하고 반란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세를 불려나갔다.  

1356년 안후이, 허난, 양저우 등에 큰 흉년이 들었다. 장사성 군단은 원나라군의 공격에다가 기근도 겹쳐 강남으로 탈주했다. 운 좋게도 그는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 등 강남의 경제중심지를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장사성과 방국진은 유사시에 대비해 고려에 조공했다. 쑤저우와 항저우는 곡창지대이자 상공업도 발달한 ‘천하 2개의 과실’이었다. 곽자흥이 죽은 후 그의 군단을 이어받은 주원장도 남쪽으로 탈주해 장쑤성의 중심지 집경(난징)으로 들어갔다. 유기(劉基)와 이선장(李善長) 등 명망 있는 지식인을 거느리게 된 주원장의 위세는 집경 입성 후 한층 더 높아졌다.  

1360년 서파(西派) 홍건군의 수장이던 서수휘의 부하 진우량(陳友諒)이 후베이, 후난을 포함한 창장 중류 지역에서 한(漢)나라를 건국하고, 창장의 흐름을 따라 동진하기 시작했다. 중국 통일의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천하는 ①창장 중상류의 진우량 ②중류의 주원장 ③하류의 장사성 등 3자 대결로 판가름 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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