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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06 11:11
[기타] 오향청언(吾鄕淸彦) 가시마노보루의 위서 참회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410  

http://www.godemn.com/xe/index.php?mid=free_board&document_srl=614398
주:안원전의 21세기 담론

오향청언(吾鄕淸彦)이 환단고기를 아시아의 지보(至寶)라 평가한 바와 같이 일본판 환단고기(桓檀古記) 역자(譯者) 가시마 노보루(鹿島昇)는 서문(序文)에서 환단고기는 일한 역사의 창세기라 말하고 다음과 같이 일본서기 뿐 아니라 한국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도 신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뿐만 아니라 일한 병합과 역사의 위조, 메이지(明治) 정부의 역사파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모략 위서(僞書)이다.

일본이란 국호는 문무(文武)천황 이후의 것이다. 그래서 그 이전에 「일본기(日本紀)」라든가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실체가 있지는 않다.

또한 내용으로 봐도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위사(僞史)인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비미호(卑彌呼)도 왜의 5왕도 그리고 아메따라시히꼬의 견수사(遣隋使) 조차도 기록되어있지 않다.

「수서(隋書)」에는 '규슈(九州)의 왜국의 동방(이라는 것은 야마또(大和) 분지)에 진왕국(秦王國)이 있고, 그 동쪽에 십수국(十數國)의 소국이 있다고 되어 있고, 「서기(書紀)」의 주인공인 야마또(大和)왕조가 전적으로 창작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진실로 야마또(大和) 왕조는 환상의 왕조이고 그 왕들도 허상의 왕이었다.「일본서기(日本書紀)」는 「사기(史記)」와 닮은 구조적 위사(僞史)였다.

나는 좌담회 '천지(天智)는 풍장(豊璋), 겸족(鎌足)은 곽무종(郭務悰)이다'「역사와 현대」Vol. 2-2)에서 천지는 풍장, 겸족은 곽무종이라고 서술했지만, 「선린보국기(善隣寶國記)」는 곽무종을 당무종(唐務悰)으로 기록하고 있어, 이 당(唐)이 후에 등원(藤原)의 등(藤)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등원겸족은 내신(內臣)으로, 곽무종은 내신좌평이지만 후에 겸족도 곽무종도 거의 같은 시기에 대직관(大織冠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성덕태자(쇼토쿠타이시)도 대화개신(大化改新: 645)도 액전왕(額田王:누까다노 오오기미)의 로맨스도 백제왕조의 로맨스다.

또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의하면 백제왕의 조상은 민달(敏達) 천황이 되지만 이것은 민달 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천황도 백제왕이고 그중의 민달이 백제의 무령왕이라는 것이다.

(무녕왕릉 관재서 일본특산 삼나무가 검출(조선일보 97.06.30)되었음을 참고하라/지난 71년 발굴된 백제 제25대 무녕왕(武寧王)릉의 관재(棺材)가지금까지 밝혀진 일본특산의 金松 외에 역시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삼(衫)나무가 추가로 검출돼 무녕왕릉 관재가 일본에서 도입됐다는 사실이 30일 재확인됐다. 이에따라 무녕왕이 재위하던 6세기께 당시 동북아 강국으로 군림하던 백제와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과의 밀접한 외교관계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증거가 될 것으로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경북대 朴 相珍교수(임산공학)팀이 공주박물관에 보관중인 무녕왕릉 출토 목재의 재질을 조사한 결과를 최근 발간된 백제논총 제5호에 기고해 밝혀졌다. 朴교수는 지난 89년 1차 조사에서 무녕왕릉의 관재가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침엽수종인 金松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이번 2차 조사에서는 1차조사 때보다 훨씬 많은 11개의 표본을 이용,수종 분석은 물론 관재를 만드는데 소요된 목재의 양과 이 목재의 수령까지도 분석해냈다. 2차 조사에서도 대부분의 관재가 1차조사 때와 마찬가지로 金松으로 나타났으나 나무파편 1개는 역시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삼나무로 검출돼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관재는 모두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고 이 논문에서 朴교수는말했다. 수종과 함께 나이테(年輪) 조사를 통해 무녕왕과 왕비의 관을 만드는 데는 수령3백50년 내지 6백 년,직경 1백30㎝ 이상되는 거대한 金松들이 수십 본 가량 사용된 사실도 아울러 밝혀졌다.)

또한 졸저 「환무분서(桓武焚書)와 천(天)의 왕조」(「역사와 현대」Vol.3-1)에서 서술했듯이 백촌강(白村江:금강인 백마강) 패전 후(복신의 백제 부흥운동을 돕기위해 400척의 왜선을 천지가 보냈으나 연환계로 당군에게 몰살한 사실) 신라 문무왕의 아들인 고시(高市)황자가 다자이후(大宰府)에 진주하여 사정관(司政官)으로서 왜국을 지배했다.
참고: 백촌강 전투는 어디서 일어났죠? 일본인과 토론중에 백촌강전투가 어디서 일어났는지라는 질문이 나오네요...저도 몰라요 -_-어디죠?  

송준희 (2004-01-05 18:16:14)   - 홈페이지 입장 : 산동성 독산호와 연결되는 "백마하"
- 중국 장수전전 : 호남성 “기양” 이자료는 우리역사 -> 백제 항목에 자세히 올려져 있습니다. 중국 고지도를 보다보면 산동성 독산호 자체가 백마강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도 있는데 연구해볼 문제 입니다.광서장족자치구 백제향에 거주하는 백제유민들이 "우리는 산동성 백마강 유역에서 온 백제의 후손이다"라고 증언한 부분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대사산책 (2004-01-06 03:09:43) :백촌강은 산동성 백마하, 백마강일 가능성이 많음. 백마을[白村]인데 한어 '마을'을 '말'이라고도 하므로 백말[白村]강, 백말[白馬]강으로 음이 같아서 같은 이름임. 일본고대사서에는 같은 이름인데 음은 같고 한자를 달리 쓴 이름이 무수히 나옵니다. 원래는 백말[白馬]강인데 일본서기 저자들이 한어의 음이 말[馬]과 말[村]이 같은 것을 이용하여 한자를 바꾸어 쓴 겁니다.-



앞서 사로잡은 백제의 왕족 선광(善光)은 근강(近江)으로 유배됐지만 후에 반란을 일으켜 고시(高市)의 군대에게 정벌당했다. 이것이 이른바 임신(壬申)의 난(천무가 천지를 꺾은 사건)의 실체로 선광(善光)이 대우(大友)황자(弘文천황)의 모델이었다.

결국 신라 문무왕의 손(孫) 김양림(金良琳)이 도래하여 문무천황이라 칭하고 나니와(難波:오오사카)에 진주하여 국호를 일본(日本)이라 정했다.

「속기(續紀)」원명(元明) 천황 화동(和銅) 원년 2월의 조(條)에 칭하여 가라사대 그런 즉, 경사(京師)는 백관(百官)의 부(府)로 하여 사해(四海)로 돌아가는 곳이 되고 그 거리를 용납한다고 되어있다. 등원궁(藤原宮)은 평성경(平城京)에서 5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나라(奈良)를 멀다고 한 원명(元明)은 등원궁에 있던 것은 아니다.

그 때 진(秦) 왕국의 진씨는 등원경(藤原京)에 있었지만 원명은 이것을 접수하여 인접지에 평성경(平城京)을 만들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평성경의 규모는 거의 현재의 궁성과 같고, 당시 인구 5백만의 일본국으로서는 실로 초대규모의 조영(造營)이고 과중한 착취였다.

약 10인의 고관의 년 수입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하여 2억 엔으로 추정되는 한편, 일본열도에는 아사(餓死)자와 굶주린 백성이 흘러 넘쳤다. 실로, 신라인에 의한 가혹한 정치이지만 이것을 해방한 것이 백제인인 환무(桓武)이다.

대저, 조정은 조선의 궁정으로 평성경의 이름은 평양(平壤)으로 나니와(難波:오사카)에 건설된 나성(羅城)도 신라성의 의미로 나라(奈良)는 한국어로 수도의 뜻이었다.

성무(聖武)는 일본의 전 국토와 인민은 짐의 것이라고 주장하여 대불(大佛)을 건립했지만 이 대불도 이집트에 있어서 피라밋의 경우처럼 방대한 수의 노예를 희생시킨 것으로 완성된 것이다. 성무(聖武)는 등원(藤原) 일족의 광명(光明) 황후와 함께 독립노선을 취했지만 한편 신라의 본국도 왕가의 내분에 의해 서서히 식민지 지배력을 잃었다.

그래서 백촌강 후에 반도에서 망명한 백제왕족의 자손인 백제왕 준철(俊哲)이 되는 것이 등원경(藤原京)을 근거로 하는 진씨(秦氏)와 결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결국 성공하여 환무(桓武)라 칭한 것이다.

그래서 환무왕조는 고래의 사서를 분서(焚書), 개찬(改竄)하여 「일본서기」,「속일본기」,「신찬성씨록」 등 일련의 위조문서를 창작하고 덧붙여 백제인의 가요집을 주로 하는 「만엽집(萬葉集)」을 바꿔 써 역사위조를 완전하게 했다.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는 '환무(桓武)때 천황가가 조선에서 도래했다는 문서를 태웠다 운운'한 기록이 있어 환무 분서(焚書)의 사실이 명기되어있다. 이때의 사정에 대해서는 종래의 역사상식은 근본적으로 그릇(誤)되어져 있다.

예를 들면 「속일본기」원명천황 화동(和銅) 6년조에 의하면 「풍토기(風土記)」찬집의 일이 정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비전풍토기(肥前風土記)」 송포군(松浦郡)의 조(條)는 「서기(書記)」의 신공(神功)의 권(卷)을 인용하고 있고, 제호(醍 ) 천황의 연희(延喜) 3년(925)의 「유취부선초(類聚符宣抄)」에 태정관부(太政官符)가 있어 5기내(畿內) 7도(道) 제 국사(國司)에 「풍토기(風土記)」의 감진(勘進:감정해 진본을 갖다바침)을 명령했다 한다. 이 해에 「연희식(延喜式)」의 찬수(撰修)도 독촉하고 있어 「서기(書記)」 맞추기의 일련의 작업였다는 것이 된다.

한편, 환무 분서에 의한 「일본서기」의 작성에는 환무 왕조 성립의 흑자(黑子:사마귀, 협소한 토지)인 진씨(秦氏)의 의향이 움직이고 있다. 진씨는 (동이족) 진(秦)의 시황제의 자손이지만 이때 선조들이 분서갱유에 의해 역사를 위조한 구실을 재현했다.

이렇게 하여 망명 백제인과 진씨에 의한 왕조가 만든 「일본서기」는 백제왕가를 주인으로 하고 규슈(九州)의 왜국 왕가를 종으로 하여 2 개의 왕가를 합성한 가공의 왕조가 야마또(大和) 분지에 있었다는, 세상에도 이상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반복하지만, 「隋書」에 의하면 야마또(大和)에 있던 것은 진왕국(秦: 伊國)이다. 시황제의 진(秦)국이 멸망한 후 장성(長成)과 남월(南越)에서 기씨(箕氏) 조선에 망명한 진씨는 낙랑군 제해(提奚)에서 반도남단의 진(辰:秦)한(韓)으로 도망친 후, 2회에 걸쳐 일본열도로 이동하여 동탁(銅鐸) 국가와 고분국가를 만들어 기내(畿內) 야마또(大和) 분지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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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잔소리: 필자는 진시황의 뿌리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여불위의 혈통과 진의 황실 영(瀛)씨 가문의 혈통을 통해 밝혔다. 가시마 노보루의 일본뿌리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고증하고 있지만 환단고기를 근거로 일본족 서래설을 끌어대고 있는 것은 그의 일본 학자적인 한계로 보여진다.

그러나 반도사에 머무르고 있는 한국내 강단사학자들의 좁은 소견머리와 비교하면 대단히 탁 트인 일본사의 대륙사관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사의 백제왕조 종속사는 일본 속의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밝힌 것이지만 다음의 견강부회 학설 소위 이집트라든가 박트리아 서래설은 임혜상 등이 밝힌 것처럼 사실무근임을 참고하고 보기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마의 학설이 일본의 진보적 학설인 서래설을 일부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상고사학자들이 반도사관으로 웅크리고 있는 한국의 우물안 개구리보다 한층 깨어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향후 한국 상고 대륙사의 나침반 역할을 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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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저 「반첸·왜의 뿌리」에서 서술했듯이 시황제의 진(秦)국은 실은 박트리아의 대진국(大秦國)의 식민지로 시황제는 그레꼬 박트리아 왕 디오도토스이다. 「궁하문서(宮下文書)」의 계도(系圖)에 의하면 그 핏줄은 남조(南朝) 유다의 자손이 되고 또 시황제가 매장해 죽인 유자(儒者)도 유대인으로 유다인 랍비였다.

진(秦)이 위(魏)를 쳐부쉈기 때문에, 제철기지였던 남양(南陽:宛)의 철부족의 서씨(徐氏)는 요하(遼河) 유역으로 도망가 예(濊)국을 만들고, 후에 부여(夫餘)에 합쳤지만 그 왕은 페니키아 계의 니기하야히 왕가이고, 그 수군(水軍)은 <북왜(北倭)>였다.

그리고 이들은 원래 갠지스 유역에서 말레이 반도를 거쳐 북상하여 일본열도에 산와(山窩:움집)와 에타라는 카스트를 가져왔다. 한편, 역사를 위조하는 것은 수고가 들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작업은 더욱 힘이 든다. 위조자는 항상 진실을 말살하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秦)은 왕가의 계도(系圖) 은폐를 목적으로(만일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동이족의 계도를 은폐하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안원전) 분서(焚書)를 행하고 결국 산와(山窩:움집) 출신자의 풍신수길은 자분(自分)의 계도(系圖)를 전한 북산성(北山城)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모두 죽여 출신을 은폐했다고 한다.

또한, 히틀러의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도 유대계라는 스스로의 출신을 말살하기 위한 수속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에는 모두 공통의 원인과 결과-즉, 계도 (系圖) 위조와 분서(焚書)라는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역사가 위조되어 있는 이상,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분서(焚書)와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종족학살)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허구를 바로잡고,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일한(日韓) 양 민족의 창세기(創世記)라고 할 수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여기 공개되는 것의 의의는 실로 크다.


북왜(北倭)와 남왜(南倭)

가시마의 설명을 듣기 전 보조설명을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대륙 내 왜인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면서 문제제기를 한 뒤 가시마의 북왜설을 보기로 한다.(반도내 왜인설, 대륙내 왜인설, 메뚜기사건 첨부예정)

「일본서기」가 감추려 한 것은 천황가-정확히는 환무(桓武)가 백제 망명자였다는 사실이지만, 이 역사위조의 원점에 만주에 있던 왜인(北倭)라는 문제가 있었다. 「산해경」<해내북경>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개국(蓋國)이 거연(鋸燕)의 남쪽, 왜(倭)의 북쪽에 있다.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 조선(朝鮮)이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다. 열양(列陽)은 연(燕)에 속한다. 열고야(列姑射)가 바다 가운데의 섬 속에 있다.

야고국(射姑國)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데 열고야(列姑射)에 속하며 서남쪽을 산이 에워싸고 있다.…봉래산(蓬萊山)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대인(大人)들의 저자(市場)가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또한 「산해경」<해내동경>에는 거연(鉅燕)은 동북의 변두리에 있다고 했다. 이것을 백기소일랑(白崎昭一郞)은 다음 그림과 같이 비정(比定)했다.

(왜의 위치 도표그림)
연(燕)의 동북에 거연(鉅燕), 거연의 남쪽에 개국(蓋國), 다시 그 남쪽에 왜(倭)

「왜인흥망사」 제 24장은 진운은(辰 殷:箕氏朝鮮)을 지회씨(智淮氏) 연(燕)으로 하고, 소연(邵燕)과 별도의 것으로 하기 때문에, 거연(鉅燕)은 기씨 조선의 지회씨(智淮氏) 연(燕)으로, 개국(蓋國)은 기씨조선의 영역, 즉 대능하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된다.

다음에 동서 제 31장은 '이것보다 앞서 완(宛)의 서(徐), 바다를 건너 박진(舶臻)씨, 은(殷:辰 殷:箕氏朝鮮)에 의지하여 완난(宛難:塔子河)에 머물고 땅을 격한 것이 수 천리, 현모달(弦牟達:摩天嶺)에 성을 쌓고, 곤막성(昆莫城)을 칭하고, 나라를 서가은(徐珂殷)이라 부른다'고 되어있고, 또한 서가은은 후에 부여(夫餘)에 합친 것으로 되어, 개국(蓋國)이 거연(기씨조선)에 있다는 것은, 개국이 서하은 후의 부여인 것을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역시 '개국은 거연에 있다'고 읽어야 하고 '거연의 남에 있다'는 해석이 틀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남왜, 북왜란 도대체 무엇일까. 평야방웅(平野邦雄)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규슈(九州)에 있어서의 고대호족과 대륙」「고대 아시아와 규슈(九州)」에 수록)

-송촌무웅(松村武雄)씨는 규슈의 아담(阿曇)씨는 남양계 민족으로 준인족( 人族)과 함께 인도네시아 계일 것으로 보고, 우원우길(羽原又吉)씨는 찌꾸젠(築前)을 본거로 하는 안담(安曇)족 계통의 해인족(海人族)을 야마또(大和)족으로 구별하여, 이 양 족을 매개로 한 것이 안담기량(安曇磯良)으로 상징되는 인물로, 해인족(海人族)의 본원지는 인도네시아 섬들이고,

그들은 복건, 광동의 민월( 越:전통적 동이족 거주지) 지방으로 이주하여 단민(蛋民)이 되고, 북상하여 남서 여러 섬에서 규슈에 걸쳐 있고, 금관장부(金關丈夫)씨는, 아마도 일본에 미생(彌生)문화를 옮긴 것은 그들 해인족(海人族)의 조상으로, 수전가일랑(藪田嘉一郞)씨는, 아담(阿曇)족 즉, 일본의 월족(越族)은 남지나에서 우리 서남 지방으로 도항한 족속으로,

해인(海人)을 백수랑(白水郞)으로도 쓰는 것은 남지나 천주(泉州)의 수인(水人)이라는 의미의 샘 천(泉)의 의미를 백(白)과 수(水)로 나눈 것으로 생각되고, 그들은 원래 물속으로 잠수하여 진주를 캐던 백성으로,

월(越)족의 용사(龍蛇) 토템(복희씨 토템)을 갖고, 이들 남방 민족은 무수히 조선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도래했지만, 후에 소수집단의 북방민족(조선족)에게 압도되어, 농천정차랑(瀧川政次郞)씨는 준인족( 人族), 아담족(阿曇族)이 그 원주지인 화남(華南)에서 초래한 집돼지, 즉, 돼지를 기르는 것이 저감부(猪甘部)로,

이 양 종족은 원래 동일종족으로, 공히 문신의 풍속이 있고, 용사(龍蛇)의 토템을 갖고, 단민(蛋民), 결국 민월( 越)족과 같다. 아마 기원 전 1, 2 세기에 백월(百越:임혜상에 의하면 동이족이다) 백성은 한무제에 의한 한(漢) 족 남진에 의해 해상으로 도망가, 흑조(黑潮)를 타고 북규슈에 도착한 아담(阿曇)족과 남규슈에 도착한 준인족( 人族)으로 나뉜 것으로,

삼품창영(三品彰英)씨는, 해인족(海人族)의 고기잡이법이나 문신의 습속은 직접적으로는 남조선에서 도래한 것으로, 한족(韓族) 가운데에서도 진한(辰韓)과 변진(弁辰)의 부족간에는, 남방 해양 제 민족에 계통한 문화요소를 전승하고 있는 면이 적지않지만, 이것은 해류 기타 지리적 조건으로 볼때 이살한 것은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농천정차랑은 화남(華南)에서 왔다는 <저감부(猪甘部)>가 한무제를 피해 일본으로 이동했다고 하는데, 이들을 이끈 것이 진(秦) 왕조의 일족으로 우리 나라의 원전언(猿田彦)이다.

한무제때 창오(蒼梧)의 진왕(秦王)이 이끈 남월(南越)의 백성이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도망간 것에 대해서는 필자도 「반첸·왜인의 뿌리」에서 상세히 서술했다. 여기서 삼품창영(三品彰英)이 한반도로부터 왜인이 왔다는 것은 <북왜>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북왜인 것과 함께 부여(夫餘)의 저가( 加)로, 우리나라의 저가부(猪加部), 안담수군(安曇水軍)으로, 왜의 수군과는 원래 니기하야히의 예국(濊國)-부여에 속해 있던 아마쯔마라의 수군으로 생각된다.

곽박의 「산해경」<대황동경> 대인지국(大人之國)의 조주(條注)에, '고회(高會)는 말하길, 왜국 사람이 모두가 바람을 만나, 바람에 불려 대해 밖으로 건너, 일국을 봤지만, 모두 키가 크고 형상은 호(胡)와 닮았다고 되어있다. 적송문삼우(赤松文三祐)는 이것을 인용하여, '고회(高會)는 평주(平州)의 양평(襄平)에서 왜인으로부터 이것을 듣고, 건강(建康)에 도착해 곽박에게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쓰고 있다.

「후한서」<동이열전>은 '단석외(檀石 ), 왜망포(倭網捕)를 도와준다고 듣고, 동쪽 사람이 왜인국을 공격하여 천여가(千餘家)를 얻다. 따라서 진수(秦水)의 위에 놓고 고기를 잡다'라고 쓰여있다.

그런데,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일본이 가장 오래고 또한 크다. 그 땅 흑룡강의 북에서 시작되고, 제주의 남에 도달하여 오끼나와와 서로 접한다.'고 쓰여있다. 따라서 <북왜>의 영토는 흑룡강의 북에 이른다.

력도원( 道元) 「수경주(水經注)」대요수고평천(大遼水高平川)의 조(條)에, '물은 서북 평천(平川)으로 나오고, 동류하여 왜성(倭城)의 북을 지난다. 단 왜지의 사람은 이것에 따른다' 고 되어있고,

「원경(元經)」진(晋) 태원 7년의 조는 '왕통(王通)이 9월 동이 5국에 와 조공하다'고 기록하고 그 설목(薛牧)의 전(傳)은 '동이 5국이란 부여, 3한, 숙신(肅愼), 왜인, 비리(裨離)이다. 현토(玄 )의 동북에 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발해의 시대 흑룡강의 유역에는, 흑수물길부(黑水勿吉部)가 있고, 물길 7부족 가운데 가장 정예롭고 강하다(精强)고 한다. 흑수부는 후에 고려의 망명자를 왕으로 하여 거란(요)을 멸하고 금(金)국을 세웠다.

「산해경」이 쓴 북왜는 이 흑수부나 백산부(白山部)에 섞여 들어간 것(混入)이 아닌가. 이 백산부가 우리 예다(穢多:えた)의 뿌리인 것 같다.

거란의 사서 「왜인흥망사」는 기씨(箕氏) 조선사가 바탕이 되지만, 부여, 고구려, 왜국의 건국사가 첨부되어 있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봐도, 거란의 가운데에 <북왜>가 있었던 것은 인정된다.

더욱이 「고려기」대명홍무(大明洪武) 21년조에, 수척(水尺:무자리), 재인(才人), 경종(耕種:농사)을 일로 하지 않고 산 계곡(山谷)에 모여 왜적이라 칭하다. 그 힘이 무섭다. 운운' 되어있다.

또한 거란군이 고려에 침입하면, 백정들이 우리는 왜인이라 하고 호응했다 한다. <백정(白丁)>은 백정준인(白丁 人)과 같고, 조선의 예다(穢多:えた)이고, 수척재인(水尺才人)은 조선의 산와(山窩:움집)이지만, 함께 반도잔류의 <북왜>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도 신용할 수 없다.

일연 저 「삼국유사」의 제 1권 모두(冒頭)는 <고조선(왕검조선)>에서 시작되어, '위서(魏書)에 말한다. 즉 2천 년(載)을 거쳐 단군왕검이라는 것이 있다.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칭한다.

고(高)와 같은 시기이다.(與高同時, 환단고기에 與堯同時로 나오니 고신씨, 요와 같은 시대이다) 고기(古記)에 말한다. 옛날에, 환인(桓因: 帝釋天이라 한다)의 서자(庶子:서출이란 뜻이 아니고 支孫, 支派를 말함`) 환웅(桓雄)이 있었다.
참고; 桓雄에 대한 역사적 기록으로 중 일련이 쓴 삼국유사에 桓國(因)의 서자庶子 桓雄이란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庶子라는 글자를 우리나라 학자들이 무식하고 게으름으로 인하여 첩실의 자식이라 해석을 하는 경향이 대부분인데, 이는 참으로 부끄럽고 엉뚱하다고 아니할 수가 없다. 위에서 말한 중국의 辭源이라는 대백과사전격인 책에는 중국의 古語, 古史를 잘 설명해 놓고 있다. 여기에 庶子란 1. 첩의 아들, 2. 많은 아들, 3. 옛부터 있는 높은벼슬 이름을 가르키는 3가지 뜻이 있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羅 唐연합에 협력하여 백제 멸망에 공을 세운 당나라 사람 유인궤劉 仁軌는 웅진도독부雄津都督府 (공주, 마한-익산, 東明, 金漣, 덕안-恩津)를 거느리다가 귀국해서 좌서자左庶子의 벼슬을 받는다. 당시에는 右庶子라는 벼슬도 있었다. 그 당시 王世子의 스승같은 공이 있는 이 에게도 庶子의 벼슬을 내려 주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역사의 진실과, 진실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 고서 桓雄을 桓國(因)의 첩실자식이라 해석하고, 여기에도 모자라 그 옛날 당시 지배계층 사회의 남녀관계가 어지러워서 그렇게 될수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설명을 덧붙이고 있으니, 이 한심함을 바로 잡고자 한다.(최태영 박사)


무척 천하를 꿈꿔, 몹시 인간세상을 구해(탐구인세), 부(父), 자(子)의 뜻을 알다. 즉 천부인 3개를 받고 태백산정에 내리다....이것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우두머리로.....「통전(通典)」 또한 이의 설명과 같다.

본서(「환단고기」)에도 등장하지만 고려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은, 요(거란)의 성종(聖宗)이 소손녕에 명하여 고려를 공격시켰기 때문에, 고려의 성종(成宗) 문의(文懿)대왕의 신하 서희(徐熙)가 사절이 됐다.

그때, 소손녕이 '너희나라는, 신라의 땅에 흥한 것이다. 고구려의 땅은 내가 갖는다. 운운' 하고 말한 것에 대하여, 서희가, '아니다. 아국 고려는 즉, 고구려의 후예다. 그래서 고려라 한다.'고 대답했다는 경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가 요(遼)에 대항하여, 고구려의 계승권을 주장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요(遼)의 야율우지(耶律羽之)가 편찬한 「왜인흥망사」도, 신화편 뒤에 태조왕 시대의 고구려 역사를 기록하고, 요가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와 요의 견해는 어느 것이 옳은가. 옛날부터 대진국(大震國:발해)이라는 국가가 있어, 처음 "후 고구려"라 칭했지만, 요(遼)는 이것을 멸하여 "동단국(東丹國)"이라 하고, 후에 합병해 버렸다. 따라서 발해를 흡수한 요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도 결코 엉터리는 아니다.

이와 같이 말하자면, 본가쟁탈을 위한 사서조작이기 때문에, 고려의 수사(修史:역사편찬)는 그 위기탈출이기도 하고, 또한 형세의 나쁜 부분을 말소하는 작업도 했다.

  한편, 반도충부(飯島忠夫)는 「삼국사기」에 쓰여진 신라 본기의 141년 9월, 186년 5월, 201년 3월,789년 8월, 고구려 본기의 178년 10월, 백제 본기의 73년 5월, 87년 8월, 221년 6월의 일식은 모두 조선반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은 '지나의 기사를 무비판적으로 도입한 결과로써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썼다(다이쇼(大正) 15년 6월 동양학보15권 3호) 대저 신라에는 당시 동양 제일이라는 천문대가 있어, 「삼국사기」를 만든 고려시대, 신라의 사료가 남아있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려에는 그것이 없어 중국사료에 의해 「사기」와 「유사」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유사」의 모두(冒頭)의 <고조선> 조(條)에서도, 위서(魏書)의 인용이 처음으로, 「고기(古記)」가 뒤로 되어있다. 또한 종래도 백촌강(白村江:금강)의 기록이 「당서(唐書)」를 모방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다음에, 「삼국유사」에 기씨(箕氏) 조선과 부여사(史)가 적은(少) 것도 문제이다.

이들 수사(修史:역사개찬) 마인드에 감히 그것들을 제외하려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발해에 대한 기사 게재가 적은 것도 이상하다. 본서(「환단고기」)에 의하면, 대진국 발해야말로 고구려와 고려를 잇는 국가임에도, 「삼국유사」는 이것을 왜 경시한 것일까.

이와같이 생각하면, 종래, 한반도사의 고전적 텍스트로 여겨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로서도, 반드시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삼국유사」의 원문에 '옛날에 환국이 있다(昔有桓國:昔桓國あ り)'고 한 것을 경대장본(京大藏本)에서는 그것이 먹(墨)으로 지워지고 '옛날에 환인이 있다(昔桓因あり)'로 글자가 고쳐져(改竄) 있는 사실이다.

또한 「삼국사기」를 읽으면, 백제 본기 가운데, 누누이 흠락된(欠落:빠지고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그것이 「일본서기」의 허구-백제사의 번역을 입증하는 듯한 부분에 많은 것은 왜일까.

메이지(명치) 정부의 위조자들은, 「유사」와 함께 「사기」의 내용도 개찬한 것은 아닌가.(일본판 환단고기 서문을 쓴 가시마는 금 희종의 명을 받든 김부식이 인종을 따돌리고 10여명의 편찬 팀을 구성해 사대사서로 입맛에 맞게 꾸며 받친 삼국사기가 일본에 의해 또다시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안원전)

나는 지금 이들 문제에 답하는 대신에, 그러한 권력이 말살하려 하고, 그것에 저항하여 몰래 전해진 본서-「환단고기(桓檀古記)」를 들고 싶다. 이 경우, 우선 독파하는게 모든 것에 선행하는 것이다.

일한병합과 역사의 위조

메이지(明治) 시대, 제정 러시아는 만주에 침입하여, 요동반도를 뺏고 여순항에 요새를 만들고, 더욱이 남하하려는 기색을 보였다. 메이지 37년 2월, 일본정부는 결국 대(對) 러시아 개전을 결정하고, 이어서 일한의정서에 조인했다. 5월, 육군은 한반도를 북상하여 압록강을 넘어 구연성(九連城)을 점령하고, 요동반도에 상륙했다.

일러 전쟁은 이듬해 38년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때 한국은 일본과 동맹하고, 영미는 일본을 지원하고, 청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그런데, 메이지 정부는 38년 9월, 포츠머드에서 러시아와 강화한 후, 조약중의 한국보호조항에 근거하여 11월, 제 2차 일한 협약을 맺고, 한국의 외교권을 뺏어 반도 전토에 확대된 반일운동을 억압했다.그리고 메이지 43년, 마침내 한국을 병합하여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일한 양민족간의 융화하기 어려운 감정의 골은 실제로 이때 시작되었지만, 이 시대 일본 제국의 생명선이 압록강에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북위 38도선에 비교하면, 역사의 흐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일러전쟁이 끝난 후, 일본이 한 편이었던 한국의 국토를 약탈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 싸운 것은 2회의 대전(大戰)에서 독일과 싸운 미합중국의 입장과 닮아있지만, 미국은 동맹국 영국으로부터 국토를 뺏기지 않았다. 이 차이는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미국인에 대해 영국이 모국인 것처럼 일본인에 있어서도 한반도는 모국(母國)였다. 그러나 미국인은 이주의 역사를 자각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지만, 일본인은 그 역사를 말살하고, 반도인을 경멸했다. 이것이 명암 2 양상의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닐까.

물론, 일본인은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로 이주한 것은 아니다 하는 논자도 있다. 실제, 이러한 논자에 의해 한국병합의 근거가 만들어져 일한(日韓)의 불행한 역사는 실로 역사의 진실을 버린 때에 시작됐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메이지(明治) 정부의 역사파괴

앞에서 서술했듯이, 백촌강 사건 후에(복신의 백제부흥운동에 제명여황과 그 아들 천지천황이 4백여척의 구원부대를 보냈다가 금강(白馬江:신채호에 의하면 백마의 말은 마을(村)에서 왔다)입구에서 연환계로 불타 백제부흥운동이 매듭지어진 사실) 조선반도로부터 망명해 온 백제인들은, 신라왕가의 혼란에 편승하여 준철(俊哲)을 왕으로 하여 신라계의 지배를 전복시켜, 결국 환무(桓武)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일본열도 고유의 왕조로서 신격화하여, 중세 샤머니즘을 창조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 댓가로 진실한 일본사는 없어져 버렸다. 비미호(卑彌呼)도 아메타라시히꼬의 견사(遣使)도 말살되었다.

  덕천(德川) 막번(幕藩) 체제가 압도적으로 강대한 외압에 의해 붕괴된때, 일본민족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창조한 샤머니즘에 의해 민족 아이덴티티를 과장하고, 통일국가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앞서 중국 제 왕조가 보통  전(前) 왕조의 사서를 분서(焚書)했듯이,

덕천(德川) 씨가 천황가의 「일본서기」를 분서했다면, 덕천씨가 망할때도 천황가가 아닌 별도의 왕조가 생겼을 수도 있다. 덕천씨는 각보기일( 保己一)의 유족에게 별도의 6국사를 만들도록 한 흔적도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은 사사라 계(系)의 덕천씨 자신, 백정(白丁)이라는 북왜이민였던 것은 아닐까.  

   「일본서기(日本書紀)」는 결코 일본열도의 사서가 아니고, 그 실체는 백제사를 빌린 천황가의 주술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의 왜인이 북왜이고 반도 이주자였기때문에, 이러한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 덕천 말기이지만, 물리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압력에 대해서는 샤머니즘 이외에 유효한 저항수단은 없었다.

아즈테카인은 샤머니즘에 의해 패배했지만 일본인은 행운아였다. 메이지(明治) 정권은 이른바 성공한 아즈테카이고, 성공한 호메이니 정권였다. 그러나 만일 천황가의 조지(祖地) 인 한반도에서 정당한 사서가 발견되었다면 천황 샤머니즘은 일순간에 붕괴하는게 약점이다.

천황가에는 위조문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필두로 한 「육국사(六國史)」 외에, 문외불출(門外不出)의 사서가 있고, 천황가가 조선반도로부터 망명해온 역사를 몰래 전하고, 메이지 이래 한반도로부터 고래의 사서가 출현한 것을 무척 두려워 한 게 아닐까.

「서기(書紀)」의 허구을 유지하지 않으면 천황 샤머니즘은 존속 못하고, 통일 국가도 붕괴된다는 심각한 위기감에 의해 메이지(明治) 정부는 반도 전(全) 사료의 약탈을 계획하고 흑판승미(黑板勝美), 금서룡(今西龍)의 어용학자를 동원하여, 악명높은 위사(僞史) 신디케이트-역사 마피아를 조직시켰다.

그래서 충실한 학노(學奴)들은, 반도를 샅샅이 수색하여 전(全) 사료를 약탈하고 더욱이 대마(對馬)의 종가(宗家) 문서까지도 매수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 흑판(黑板)은 후에 암파문고(岩波文庫)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내용까지 개찬하는 파렴치한 범죄를 행했다.

앞서 메이지(明治) 천황은 헌병장교 주*(酒 ) 모(某)에게 특명하여 멀리 압록강 북방의 고구려의 영주(英主) 광개토 대왕의 석비(石碑)를 손괴시켰다.
위사(僞史) 공작의 증거는 극히 명확하다. 위사(僞史) 신디케이트는 더욱이 「육국사(六國史」의 허구를 사수하기 위하여, 천황가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야마또(大和) 고분군을 폐쇄했다.

이보다 앞서, 정부는 몰래 인덕(仁德) 능(陵) 등의 내부를 조사하여, 이때 정부고관이 도굴한 출토품은, 오늘날 보스톤 박물관에 진열되어있다. 그들은 그것이 인덕(仁德)천황과 상관없는 능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속의 부장품을 훔친 것이다.

반복해 말하지만, 이들 놀랄만한 역사의 진상은, 만약 조선 반도로부터 한 권의 사서가 발견되었다면 모두 명백해지고, 샤머니즘의 허구는 일순간에 붕괴되어 버린다. 그래서 메이지(明治) 정부는 필사적이 되어 반도의 사서를 약탈했지만,

더욱이 이른바, "조선인 차별"을 행하여, 이렇게 조선인을 열등시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조선망명자일리가 없다-고 강조해 보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악몽같은 일한(日韓)병합도 본래의 목적은 샤머니즘의 허구를 지키기 위한 사서 약탈에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변호사다. 형사법정에서는 Crime does not pay라는 속담을 인용했다.

메이지(明治) 정부가 장삼이사(張三李四:쓰리, 탈취 등)와 같은 더러운 소악당(小惡黨)을 학자로 내세워, 천황가의 조상 땅인 한반도의 역사를 전하는 신성한 사서를 약탈한 범죄는, 결국 일본인민을 늪과 같은 전란에 끌어들여, 결국 2 개의 원폭이 샤머니즘의 허구를 산산이 파괴한 것이다.

1억의 신민(臣民:천황제가 있는 일본의 국민)은 위사(僞史) 신디케이트에 연좌되었다. 지상의 어떤 권력이라도 역사의 여신 쿠리오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일제 황실(皇室) 도서관인 궁내청(宮內廳) 쇼료오부(書陵部)에 비장된 우리 고문서를 일본이 공개하지 않는 한, 「환단고기(桓檀古記)」나, 「단기고사(檀奇古事), 「규원사화(揆園史話)」보다 우리의 역사를 상세히 밝혀주는 더 이상의 문서는 아직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도매금으로 위서라 매도하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위서(僞書)임을 알고 있으면서 그 날조성에 대해서는 하등의 의문을 제기 안 하는 자가 정작 자신의 역사성에 맹목적인 시비를 거는 우매함과 같다.

이는 분명히 지소선후(知所先後)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얼빠진 지식인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일본판 「환단고기」의 간행사를 쓴 오향청언(吾鄕淸彦)이 간행사 서문에 기기(記起)사관의 위조서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日本書紀)」의 신무동정 기사가 위서(僞書)임을 말하고 「환단고기」의 위대성을 조목조목 거론하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일본의 원로사학자 하타다 다카시(旗田 魏)는 <「일본서기(日本書紀)」로 본 고대 일본인의 한국관>이란 논문을 통해 신공황후 신라정벌 설 등의 임나일본부 등의 허구성과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허구성을 까발린 바 있다.

그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허구성에 대해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당시 천황제 국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내용들이 많다. 그러나 문제는 잘못된 내용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훨씬 후대까지 일본인의 의식 속에 남아있다는 점이다."고 밝힌 바 있다.


필자가 보기에, 성경에 비록 문제가 있어도 기독교인들이 위서(僞書)라 할 것 같지 않고, 유가 경전이 다소 문제가 있어도 유림들 역시 사서삼경을 경전이 아니라 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일본 역시 「일본서기(日本書紀)」나 「고사기(古事記)」가 왜곡 위서(僞書)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결코 일본 역사가 허구라 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황실 도서관 궁내청(宮內廳) 쇼료오부(書陵部)에 비장(秘藏)된 한국고대사 사료들을 천지개벽이 오지 않는 한, 결코 쉽사리 공개할 것 같지 않다.

이는 일본 황실을 떠받치고 있는 세력이 바로 일본 교과서 왜곡의 주범인 일본 우익세력이고,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바로 임나일본부 등 한반도 경영설을 주장하는 자들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우익의 기본시각을 뒤집고 묘혈을 팔 청천 벽력같은 한국고문서를 그들 스스로 공개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주:안원전의 21세기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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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시러 18-03-06 18:31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모략 위서(僞書)이다.
일본이란 국호는 문무(文武)천황 이후의 것이다. 그래서 그 이전에 「일본기(日本紀)」라든가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실체가 있지는 않다.
또한 내용으로 봐도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위사(僞史)인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비미호(卑彌呼)도 왜의 5왕도 그리고 아메따라시히꼬의 견수사(遣隋使) 조차도 기록되어있지 않다.
===> 교차검증의 결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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