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3-11 22:24
[한국사]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기병전과 전술 변화에 대한 고찰
 글쓴이 : 고이왕
조회 : 1,998  

 


지난 번 일본군의 장창병대가 조선에서 고전한 이유에 대해서 글을 올렸는데, 그만큼 조선은 기병을 중시한 군대를 조직했고 비교적 효과적으로 이를 운용했습니다. 아무래도 북방의 여진족이나 혹은 남방의 왜구를 빠르게 제압할 수 있는 병종을 기병으로 보았고, 보병은 기병을 보조하는 역할로 인식했으니 임진왜란 초기 전역에서 조선의 기병 활용은 매우 그 빈도가 높았을 겁니다.


초기 경상도 전역에서도 조선군은 기병대를 투입하여 기존의 왜구들에 대응하던 방법을 구사했습니다. 진주성의 김시민이 기병을 파견하여 황산잔도에서 일본군을 초기에 저지하고자 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을 보면 기병의 활용은 매우 높았죠.


또한 대구 벌판에 1만 규모의 조선군이 집결한 것도 나름대로 메뉴얼이 준비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대구 벌판에서 기병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군이 크게 활약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으나 문제는 이들이 중앙의 지휘관과 장교들이 오기 전에 와해당해버리면서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일의 상주 전투나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서도 조선군은 기병을 중시한 전술을 구사했으며, 상주 전투에서는 사근찰방이 휘하 역졸들을 기병으로 전환시켜 전선에 투입한 사례가 있고 탄금대 전투에서는 조선군 기병대가 초전에 일본군 선봉과 좌군을 기병전으로 격퇴시킨 적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상대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두 전투는 패배했으나, 보병으로 기병을 상대하는 것은 생각 외로 어려운 일입니다. 저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궁기병대를 상대하려면 일반적인 장창병+조총병 조합으로는 매우 어렵고, 기병대가 활동할 공간을 제약하면서 토끼몰이를 하듯이 전선을 옥죄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조선군 기병대를 상대로 저러한 전술을 구사했고, 조선군 기병대는 그대로 활동 공간을 상실하면서 표적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상주-탄금대에서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조선군 기병대의 전술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최악의 패전으로 일컬어지는 용인 전투에서도 삼도 근왕부대는 기병대를 앞세워 일본군에 공세를 실시했습니다. 이 때 권율은 조선군 기병대에 대응하여 방어진지를 요새화한 일본군을 공격하느니 차라리 임진강을 방어하여 서로를 굳게 사수하자고 건의했으나 전라감사 이광을 중심으로 한 지휘부는 이를 묵살합니다.


당시 일본군은 용인의 문소산과 북두문산에 600명이 나뉘어 배치되어 있었고 보루를 설치하여 조선군의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예하의 부대는 즉각적으로 한성의 일본군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한 편 적은 병력이지만 매복을 시켜서 조선군의 공세를 유인하도록 합니다.


속전속결을 선택한 이광은 이지시와 백광언에게 각각 1,000명의 기병을 내주어 공세를 퍼부었고, 일본군은 기습적으로 험준한 지형에서 동쪽 측면에서 조선군 기병들을 습격합니다.


난전이 벌어지자 보루를 방어하던 일본군이 목책 문을 열고 나와 응전했고, 이 와중에 선봉장 이지시와 백광언이 일본군에 의하여 전사하자 조선군 기병대는 그대로 패주합니다.


초전에 패배한 조선군은 충격에 빠졌고, 이후 전열을 재정비하려 했으나 일본군 본대가 공세를 걸자 와해되어 버리게 됩니다. 이 때 엿볼 수 있는 조선군의 기본 교리는 방어 보다는 공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교적 신중하게 방어를 주장했던 권율과는 달리 대부분의 조선군 지휘관들은 기병을 휘몰아쳐 적진을 기마 사격으로 혼란시키고 그 때를 노려 일제 돌격으로 전열을 붕괴시키는 공세 일변도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사실 그 동안 맞섰던 적들이 여진이나 왜구들이었기에 이들에게는 공세를 집중하여 전열을 붕괴시키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게 먹혔겠지만, 일본군을 상대로는 그것이 어려웠고 조선군 기병에 대응하여 방어진지를 요새화하는 이들에게 다른 방법이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해정창 전투에서도 초전에 한극함이 지휘하는 조선군 기병대가 일본군을 압도했음에도, 무리한 돌격 명령에 의하여 요새화된 방어진지로 공세를 퍼부었다가 기병대가 거의 격멸된 적이 있었으니 확실하게 다른 방법이 필요했죠.


권율은 병력 1만을 이끌고 수원 독산성으로 들어가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일본군에 맞서서 수성전을 진행했고, 체찰사 정철의 지원병력을 받아 한성으로 이들을 격퇴시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우리가 잘 아는 출성 전투가 자주 전개되는데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조선군 기병대가 한성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의 후방을 계속해서 교란했고, 적지 않은 사상자를 강요하는 식으로 전투를 전개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비슷한 식의 전투가 전개되었다고 추정됩니다. 물론 행주산성 전투에서 적의 사기가 떨어지는 시기에 기병대의 돌격이 행해졌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만,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조선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시체를 4곳에 모아 불태우고 한성으로 퇴각했다' 는 기록으로 우리는 어느 정도 추정은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록 자체가 조선군 기병대에 의한 출성 공격의 개연성을 암시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조선군 기병대가 방어 후 공세 작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따라서 행주산성 전투 이후 조선군의 전술형태는 수성전술로 고착화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서 조선 건국 이후 북방 여진족을 상대로 전개된 평원에서의 기병 전술은 임진왜란 이후 성에 의지하여 먼저 방어하는 수성전술로 대거 전환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병자호란 때까지 지속되었죠.


이러한 전투 방식은 평양성 전투에서도 비슷하게 전개되었으며, 평양성을 격파하고 성으로 진입하는 데는 각종 화기와 방패 등 근접전용 장비를 소유한 명군이 주도했다면, 조선군은 성문이 돌파된 이후 성 안에서의 전투와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이 때 조선군은 역시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토굴을 파고 저항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화공을 펼쳐 이들을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화공으로 일본군이 압도당하자, 조선군은 즉각 기병대를 투입하여 평양성 내의 일본군을 상대했고, 일본군이 밀려나자 곧바로 평양성 외곽에 기병 예비들을 차출하여 철수하는 일본군을 철저하게 쫓아다닙니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과 우방어사 김경로는 중화와 황주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추격을 떨쳐내려는 일본군과 퇴로를 차단하고 이들을 격멸시키려는 조선군 기병대의 교전은 매우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이여송이 일본군과의 항전을 염려하여 일로에 배치한 조선군 기병대를 철수케 하고, 황해도 순찰사 유영경이 자신을 호위할 목적으로 해주 주둔군을 차출함으로써 조선군 기병대는 이들을 완벽하게 일소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뭐, 그래도 조선군 기병대의 전력 자체는 상당히 위력적이긴 했습니다. 특히 함경도에서 벌어진 전투들을 보면 조선군 기병대에 일본군이 굉장히 시달렸거든요. 단천 전투의 경우 조선군 기병한테 일본군이 완전히 말려들어 거의 전멸을 하기도 했고, 노원평 전투에서도 끈질기게 따라붙은 조선군 기병대가 일본군 제2군과 6군을 상대로 행주산성 전투에 필적할 만한 전과를 올리고 야전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보면 무시할 정도의 그런 약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다만 결론을 내자면 조선군 기병대의 전술은 초기부터 내려오던 평야에서의 기마 사격 이후 기병 돌격을 통한 전열 붕괴를 노리던 것에서부터 잘 구축된 방어 진지에 있다가 적이 방심하거나 혹은 패배하여 철수할 때를 노리고 기습 출성으로 전과 확대를 하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는 병자호란 때까지 이어졌으며, 용골산성 전투에서 조선군 경기병들이 후금군 기병들을 상대로 맹공을 퍼부었던 것이나, 철옹성 전투에서 부원수 신경원이 청군을 상대로 기병 500명을 이끌고 일제 돌격을 감행했던 것이 그 사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약

1. 조선군은 임진왜란 초기 전역에서 기병을 중심으로 한 공세 교리를 통하여 반격을 가하고자 했다.

2. 일본군은 전장에서 조선군 기병대의 활동 공간을 제약하거나 혹은 방어진을 요새화하는 방식으로 조선군 기병대를 상대했고, 이는 상당히 유효한 전략이었다.

3. 조선군 역시 일본군의 전략에 맞서 공세작전에서 기병을 투입하기 보다는 선방어 후 철수하는 적을 상대로 기병을 출격시켜 전과 확대를 노리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꾸었고, 이는 매우 유효하여 호란 당시에도 상당히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출처

임진왜란초기 조선군의 기병전술, 이홍두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촐라롱콘 18-03-11 23:16
   
기병대의 위력 또는 기병전술만 한정해서 놓고 보면
조선군이 적어도 일본군에 비해서는 월등히 우월했습니다.

일본군은 전국시대 또는 세키가하라전투 같은 자기들의 내전의 경우에서 보듯이
비록 기병대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정작 전장까지 이동시에는 기병대로서의 전열을 유지했다가
막상 전투에 돌입해서는 하마해서 보병과 다름없이 교전하는 삽질 또한 여러 번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일본말들이 조선을 포함한 대륙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기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기병 특유의 충격력과 위력이 반감되었던 배경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그리고 임진왜란과는 관련없는 여담이기는 하지만... 조선후기 일본으로 파견되는 통신사행에는
거의 필수적으로 마상재를 시연하기 위한 말과 기수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조선통신사행에서의 마상재는 당시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블루님 18-03-12 07:02
   
백병전 보다는 원거리 무기가 인명피해가 컸다고합니다. 정규 일본군을 상대로 기마전술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했냐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선 최고의 장수란 사람 신립만 보더라도 기병이 활동할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선택했어야 하는데 배수진으로 싸워다고 하고 기병이 활동하기에는 지리적으로 어려움이 있어다고 합니다. 이미 일본군은 매복하고 있고 목책을 세워 대비하고 적을 유인하기 위해 소수병력이 이동했는데 조선군이 막강한 기동력만 믿고 전진하다가 매복에 걸려서 비참하게 집니다. 단순한 왜구들이 아니고 내전으로 다져진 정규군을 너무 과소평가 했을겁니다. 후방에 물자 수송부대에게는 기습적인 기마전술은 통 했다고는 생각합니다. 모여서 싸우는 제승방략도 관찰사에게 재량을 줘서 신속하게 대응해야 합니다.적이 적 지휘부 올때까지 기다려줍니까? 그래서 지방군사가 와해됩니다. 싸울건지 후퇴할껀지 알려주지 않고 중앙군 지휘부 올때까지 기다리라고만하니 적은 코앞이고 멘탈이 나갈겁니다.
관심병자 18-03-12 12:28
   
우리 민족이 수성을 잘했다고 하지만,
수성의 방식이 조금 다르죠.
일단 성을 이용해 방어를 하다가 성문을 열고 기병으로 돌격해서 격파하는식이 기본 전략이었습니다.
이런 전술을 즐겨 사용한것이 고구려였고,
이런 기병 중심의 전술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가까운 조선시대의 기병을 예로들면,
조선 기병은 창혹은 편곤과 활, 환도를 장비했습니다.
이는 한사람에 3가지 무기와 말까지 있으니, 여러 임무를 수행할수 있게 돈들인 정예였다는 얘기고,
활+환도+창(편곤) 에서 보듯이,
유목민 경기병이 주로쓰던 궁기병 능력과,
기병의 근접전투까지 생각한 무장이라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즉, 유목민 기병들(몽골)에 비교해도 조선 기병이 최정예라는것을 알수있죠.
거기다 활의 능력도 가장 발전했었고, 화약무기까지 갖고 있었으니.
거란, 여진등의 중원을 쓸던 동북의 강자들이 고려, 조선에 빌빌거리던게 이런 고려, 조선의 강한 군사력 때문입니다.

이런 기병 중심의 편제가 바뀌는것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총을 접하게 되면서 부터이고,
전술의 중심이 기병에서, 조총병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조선군은 기동력을 잃게 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총병 중심으로 편제한 조선군은 기병중심 편제의 청군에게 우회를 허용하게 되고 이로인해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주, 한반도의 힘의 균형이 뒤바뀌게 됩니다.
청나라는 조선의 조총병의 위력을 경험한후
이후 러시아와의 분쟁에서 조선의 조총병을 요청하고
러시아에 고전하던 청군은 조선의 조총병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 세력으로부터 만주를 지켜냅니다.
이를 나선정벌 이라고 합니다.
 
 
Total 20,01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8760
7133 [일본] 일본 사서에 기록된 신라구 기록은 사실일까? (3) 고구려거련 12-22 2003
7132 [기타] 남북모두공감할 신세대표어 (6) fuckengel 05-17 2002
7131 [기타] 아직도 중화주의자들이 많네요 (33) 전쟁 08-30 2002
7130 [중국] 과연 연변조선족이 말하는 민족심은 무었일까?? 삼… (3) 삼천리강산 09-29 2001
7129 [다문화] 제가 다문화 정책과 외노자들을 반대하는 이유 (6) 심심하구나 05-14 2001
7128 [기타] 여기 환단고기 지지자분들께. 한가지 한자병용 질문 … (7) ㅣㅏㅏ 10-19 2001
7127 [중국]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사실인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6) 인간성황 06-22 2001
7126 [일본] 일본, 소녀상 도발 계속…한국 "합의에 없다" 블루하와이 04-30 2001
7125 [한국사] 고구려 연개소문 vs 고려 최충헌 (9) 허브민트 06-14 2001
7124 [한국사] 고구려 대무신태왕대 만주 지역 판도 (9) 위구르 06-03 2001
7123 [중국] 연나라, 갈석산의 위치에 대하여 (2) 도배시러 03-11 2001
7122 [한국사] 조선 전기 강역 변천 시각화(지도) 감방친구 04-15 2001
7121 [한국사] 夷(이)의 어원 ㅡ 추가 및 수정 (6) 감방친구 12-11 2001
7120 [다문화] 국적세탁에 허위난민신청까지…파키스탄 일당 검거 (2) 뿍엑스 12-26 2000
7119 [중국] 아시아판 NATO라니, 中·러 겨냥한거냐… 對中무역 비… (4) Shark 10-23 2000
7118 [중국] 동북공정 (9) 메론TV 09-29 1999
7117 [기타] 전설이 입증하는 배달국의 한반도 진출! 치우비 11-24 1999
7116 [일본] 아베, '국제공헌' 생색...'사죄'는 생략 (1) 블루하와이 04-23 1999
7115 [기타] 발해에 대해서.. (7) 막걸리한잔 10-18 1999
7114 [한국사] 유라시아의 동쪽, 한반도가 가장 앞선 지역이었던 이… (5) 행복하라 10-15 1999
7113 [한국사]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기병전과 전술 변화에 대한 … (3) 고이왕 03-11 1999
7112 [중국] 조선족님 님 나라로 빨리 도망가 주세요. (1) 대략난감 06-11 1998
7111 [일본] 日나가노에 바이올린 명장 故 진창현 기념비 건립 doysglmetp 07-23 1998
7110 [다문화] 서울시 거주 외국인 예비창업인, 오피스 신청하세요 (1) 내셔널헬쓰 04-25 1998
7109 [기타] 백두산 물 독점나선 중국,"수자원 보호한다" (2) 스쿨즈건0 06-22 1998
7108 [기타] 과거 동아시아국가들은 유럽풍들을 선호했죠 (2) 타마 06-23 1998
7107 [한국사] 마고 어머니를 아시나요? (6) 북명 04-27 1998
 <  471  472  473  474  475  476  477  478  479  4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