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3-21 11:15
[한국사] 광개토대왕 비문분석...최신해석 정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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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비에 대해,,,먼저 알아야 하는 바는, 비문에 새긴 문장이 중국식 해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즉 문자는 한자이나, 글을 전개하는 방식은 독특한 고구려식 방법이기에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나, 주어를 고구려로 놓고보면, 사실 쉽게 해석이 되고, 임나일본부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1) 6년조 전문(前文) : 1면 8행 34열~9행 24열 이 기사가 1889년 최초 발표 당시부터 일본인들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의 삼한지배설인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이용하기 위하여 어떤 글자는 변조하고, 어떤 글자는 쪼아내어 없애고, 어떤 글자는 탁본을 수정한 후, 자기들에게 유리한 자의적 해석을 통해 대륙 침략과 식민지 교육의 역사논리를 만들어서 활용하고 있는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신묘년 기사’로 알려져 있으나 옳지 않다. 연도별로 기술된 비문에서 5년에 비려를 공격하고 돌아왔다는 기사 뒤, 6년 출병 사이에 들어가 있는 기록으로서 호태왕 원년인 신묘년에 일어난 일이나 공적을 기술할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존 학자들의 의견도 다양하고, 연구회의 토의도 매우 치열했으며, 결론은 ‘6년 기사’의 전문(前文)으로서 내용상으로 1면 9행 6열의 글자를 다른 사람들은 모두 ‘倭’자로 읽었으나 이형구만이 ‘後’자로 보았으며, 11~13열도 다른 사람들은 거의 모두 ‘來渡海’로 해독했으나 이형구만 ‘不貢因’으로 읽어 공격의 이유를 ‘조공을 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이를 설명한 그의 책의 내용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기사에는 백제만 공격하였으므로 ‘백잔··신라를 파하여 이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과도 앞뒤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속민’과 ‘신민’이 다르다고 해도 이미 ‘예부터 속민(舊是屬民)’인데 다시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 등이 다소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져 채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17~18열의 글자가 탁본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학자들(김덕중, 서영수~왕건군)은 해독하지 못했고, ‘隨破’(영희, 김택영, 조용은), ‘聯侵’(이덕수, 이유립), ‘倭寇’(이형구)로 다르게 읽었다. 뒤에 나오는 문장과의 연결성 등으로 보아 이유립은 근거 제시가 있고, ‘隨破로 볼 경우 주어는 호태왕이 되는데 그러면 영락 1년조에 들어가야 한다’는 왕건군의 주장에 일리가 있으므로 ‘聯侵’을 취하기로 했다. 다음 19줄 글자(‘羅’자 앞)도 아래 그림처럼 석문에서는 완전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0개의 석문에서 ‘新’자로 판독했고, 광개토태왕광장의 비문과 회여록 석문이 우측에 斤자가 있는 것으로 읽은 점으로 미루어 ‘新’자로 읽는 것이 무난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출병의 이유를 이렇게 하여 1차로 완성한 석문은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聯侵[隨破]新羅以爲臣民 이 부분은 일본인들이 1889년 처음 발표할 때부터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신경을 써서 논리적인 반박자료를 모았다. 먼저 일본 측 해석의 시초인 1889년 회여록에 실린 요코이(横井忠直)나 1894년 『단군론』에서의 백조고길 등 일본 측 통설을 알아야 반박을 할 수 있다. 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 碑文 중에 日本과 크게 관계된 부분이 있으니 “辛卯年AD 391에 바다를 건너가 百濟와 新羅를 破하고 臣民을 삼았다.”는 몇 구절이 그것이다. 古來로 한국과 中國의 歷史書에는 우리나라(日本)가 나라의 변경을 도적질했다든가 통빙(通聘)했다는 것은 써 왔지만, 백제와 신라가 우리 일본의 臣民이라고 쓴 것은 없다. 2) 6년 백잔 정벌 이유 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聯侵[隨破]新羅以爲臣民 a)윤덕원 : 백제와 신라의 예전부터 지금까지 왕을 따르던 사람들은 길로 와서 조공을 바쳤지만 왜는 辛卯부터 수년간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을 바쳐)야 했다.(新羅 百濟는 이미 긴 세월을 조공했고 倭는 辛卯부터 조공했다. 辛卯는 永樂 元年이다.) 百殘□□□(隨破新)羅를 破하여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b)이유립 : 백잔과 신라는 예전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이때까지 조공해왔는데 왜가 신묘에 침범해 오니 왕께옵서 바다를 건너가서 깨뜨리시었더니 백잔이 왜를 끌어넣어다가 신라를 침노하게 되었다. 왕께옵서 말씀하시기를 ‘모두 우리의 신민이었다’고 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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