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 남쪽 강변에 아주 오래된 고분들이 널려 있습니다.”
1909년 10월, 통감부 고건축 촉탁이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평양일보 사장인 시라카와 쇼지(白川正治)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세키노는 당장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부랴부랴 현장으로 달려갔다. 과연 시대를 알 수 없는 고분이 군집해 있었다. 세키노 일행은 서둘러 고분 2기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발굴 결과는 흥미진진했다. 벽돌(塡)로 만든 무덤방에서 청동거울 2점과 각종 무기, 토기, 그리고 오수전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이 ‘석암동 전실분’이다. 발굴유물둘은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됐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1월 말, 도쿄대 교수인 하기노 요시유키(萩野由之)와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이끄는 발굴단도 똑같은 형식의 무덤을 조사했다.(석암동 을분) 이곳에서는 ‘王×’명 칠기부속금구와 청동거울, 금동식기, 귀고리, 팔찌 등이 확인됐다. 이 유물들 역시 일본으로 반출된 뒤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소실됐다.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 평양 대동강변 고분 2기를 조사한 세키노 다다시와 하기노 발굴팀의 판단은 둘 다 ‘고구려 고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1910년 2월,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즉각 반론을 폈다. 1903년과 1905년, 자신(도리이)이 지안(集安)에서 확인한 고구려 고분들과 이 석암리 고분의 구조는 명백하기 다르다는 것이었다. 특히 벽돌로 만든 전실묘(塼室墓)가 중국 한나라의 무덤과 흡사하며, 출토유물 역시 랴오둥(遼東) 지역의 한나라 무덤과 닮았다는 것이었다. 도리이는 “이것은 낙랑고분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쏟아지는 낙랑유물(이상한 유물들의 폭증)
그로부터 2년 뒤인 1912년, 인류학자 이마니시 류가 ‘고구려설’을 폐기하고 도리이의 학설을 좇아 ‘낙랑설’을 제시한다.
자신이 1909년 발굴한 석암동 을분에서 나온 칠기 부속금구의 명문, 즉 ‘王×’ 명을 ‘낙랑 왕씨’와 관련시킨 것이다. <후한서> ‘왕경전’을 보자.
“왕경은 낙랑 남한인이다. 왕경의 8세조는 왕중(王仲)이라는 인물이었다. 제북왕 흥거가 반란을 난을 일으키면서 왕중에게 병사를 맡기려 했지만, 왕중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바로 동쪽바다를 건너 낙랑 산중으로 달아났다. 이에 낙랑군에서 집안을 이루게 되었다.”
낙랑 왕씨가 바로 <후한서>에서 일컫는 왕중-왕경의 집안이라는 것이다. 도리이의 ‘낙랑설’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세키노도 슬그머니 ‘낙랑설’을 인정한다.
이렇게 해서, 왕경전을 통해 세키노도 평양을 낙랑으로 인정하였고, 평양은 뜬금없이 낙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