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는 1902년 6월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이 황제 직속으로 설립한 비밀정보기관이다. 이 기관은 정부고관과 서울 주재 외국 공관원의 동정, 국사범과 외국인의 간첩행위를 탐지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제국 익문사 비보장정’에 비밀활동지침을 규정하였다. 제국익문사는 근대적 형태의 정보기관이며, 표면적으로는 '매일 사보를 발간해 국민들이 보도록 하고 국가에 긴요한 서적도 인쇄'하는 현대판 통신사 기능을 담당했다.
화학비사법을 사용하라는 명령서
요원은 총 61명으로, 수장은 독리이고, 그 아래 사무, 사기, 사신이 있었으며, 상임통신원 16명이 있었다. 요원들은 고종에게 정보를 보고할 때 화학비사법(化學秘寫法)이라는 특수한 방법으로 보고를 하였다.
1. 설치배경
대한제국 선포 후에도 일본인들은 궁안에 군대를 배치해 고종을 감시하고 친일 관료들을 통해 정보를 빼내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 정보 조직이 절실한 상황이였다. 조선시대 왕실의 책들이 보관되어 있는 장서각에 고종의 비밀 정부 조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바로 제국익문사비보장정. '제국익문사'의 익문사는 당시 중국에 있던 언론사의 이름이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목적을 드러내면 안되니 언론사를 가장해 활동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한테 통신사나 언론사라는 익숙한 용어를 일부러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비보 장정'이라는 것은 '비밀을 보호한다'는 의미로 황제에게 직접 비밀리에 보고하는 체계에 관한 규정이란 뜻을 갖고 있다. 1902년에 창설된 것으로 알려진 제국익문사 조직의 운영방식과 규정을 기록을 보면 조직원의 구성과 임무가 자세히 나와 어떻게 활동 했는지 알 수 있다.
<제국익문사 조직의 운영방식과 규정 및 구성와 임무>
수도의 경성에는 보통 정보원이 지방에는 상임 정보원이 항구와 외국을 담당하는 정보원까지 총6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외국인들의 왕래가 잦은 국내 개항장(인천항, 원산항, 옥구항, 목포항, 부산항)과 일본, 중국, 러시아의 개항장(북경, 여순, 상해, 블라디보스크, 나가사키, 오사카, 도쿄 중국, 러시아, 일본)까지 진출해있었다.
파견된 지역
제국 익문사와 일본정보 당국의 보고서 (치열한 정보전이 벌어진 대한제국시기)
2. 제국익문사 정보원들의 주요 임무
a) 바로 일본인과 접촉하는 고위관료들의 감시했다.
b) 개항장을 비탐하는 것이였다. 정보원들은 항구에 드나드는 각국의 군항과 사람들의 동정을 파악하기도 하기도 하고, 외국 군대의 침공 움직임이나 당시 일본인들이 자주 저질렀던 가짜화폐 유통 등을 감시를 했다.
c)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일이였다. 특히 주한외국공사관은 각국의 고급정보를 탐지할 수 있어서 정보원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기도 했다.
제국 익문사 요원의 동향 보고서
또한 제국익문사는 당시 대한제국과 수교를 맺고 있던 11개 나라 중 한반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2명), 청나라(3명)그리고 일본(4명)에 총 아홉명의 외국정보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제국익문사는 한마디로 국가 기밀과 외국의 정세의 변화를 탐지하는 정보 기관이였다. 이 당시에 대한제국이 겪고 있는 현실 중에 정부 내에 중요한 정보들이 밖으로 흘러 나가고 있었다. 특히 일본 측에서 굉장히 강한 치밀한 첩보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 정부 기밀 유지에 목적도 있었고 동시에 세계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바른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 될 수 있었을테니 이 두 가지를 실행시키기 위해서 1900년대 들어와서 황제 직속기관으로 비밀리에 구성해서 가동을 했다. 특히 일본에는 4명이나 되는 정보원을 배치한다. 이들은 주요 도시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정책 방향 군부대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주력한다.
3.익문사의 재정확보
최초의 정보 기관이였던 제국익문사에 정보원들은 국내는 물론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또 멀리 유럽에 까지 파견돼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이만한 조직을 운영하자면 그 정보원들의 활동비나 체류비등 비용 및 조직 운영비는 어디서 조달이 됐는지 알아보려면, 왕실 운영비를 기록한 내장원 회계 체계를 보면 알 수 있다.
1903년(대한제국기)이 되면서 1897년 약 17만냥에 불과했던 왕실수입이 대한 제국 중기에는 180배 가까이 늘어난다.
불과 7년만에 수입이 180배나 상승했다(이는 재정을 호조에 일원화 되어있던 것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탁지부와 내장원으로 2원화 한 결과이다)
예로, 전분 3만냥을 괴짜표에 의거해서 궁궐로 매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로 들어갔다고 기록만 되어 있고 전체 지출 내역에 40%를 차지 하고 있는 내입은 황제의 명령으로 사용된 자금인데 다른 지출 항목과 달리 출처를 적지 않아 어디에 쓴 돈인지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 역사학자들은 바로 매입된 자금 중에 상당부분은 금괴 또는 은괴로 저장이 되었거나 아니면 외국 은행에 저장된 것이 많다고 추정한다.
또한 외국 은행에 예치를 시켜 놓은 이유는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한 비자금과 같은 기능을 했을 것이다. 즉 제국익문사가 자유롭게 자금의 압박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외국 은행에 저장해둔 자금이 활동 자금으로 쓰였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황실 자금 중에는 아예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돈도 있다. 바로 외국은행에 예치된 예금일 것인데, 당시 대한제국 황실은 상해 로청 은행에 40만냥, 덕화 은행 25만불 예금을 갖고 있었는데 이 돈 역시 제국익문사의 비자금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국 익문사의 비밀 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