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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25 16:03
[한국사] 임진왜란때 건립한 왜성에 대하여(서생포, 울산왜성)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2,581  

서생포왜성과 울산왜성 - 임진왜란 장기전 되자 加藤淸正, 일본식 성을 쌓다 


왜성.jpg

왜성2.jpg


조선 + 명 6만 연합군도 못 뚫어


임진왜란 당시인 1597년 조명연합군 6만 명이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한 울산왜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부산포와 서생포에 있던 왜군의 지원을 받은 울산왜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해자와 다층구조, 예각의 진입로 등을 갖춘 왜성은 특히 농성전에서 뛰어난 기능을 발휘했다. 왜성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서생포왜성과 울산왜성을 한번 살펴보자! 


 

왜성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서생포왜성 남문 입구.

일본에 조선식 산성이 있는 것처럼, 한국에도 일본의 왜성(倭城)이 남아 있다. 대마도의 가네다노키(金田城·금전성)는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퇴각한 백제 유민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예상하고 쌓은 성이다. 그들은 대마도에 1차 방어선, 이키시마(壹岐島)에 2차 방어선, 최후로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다자이후(太宰府)에 오노조(大野城·대야성), 사가(佐賀)현에 기이조(基肄城·기이성) 같은 조선성을 쌓아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해 전 국토를 유린하고, 명나라의 참전과 각지의 왜병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선전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서자 남해안 곳곳에 왜성을 축조하고 장기전에 돌입했다. 


이때 일본이 동·남해안에 쌓은 것이 왜성이다. 이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걸쳐 남해안에 연하여 수십 개의 왜성을 쌓았다.

그렇게 쌓은 왜성이 본성 12곳과 지성(支城) 6곳을 이르렀으며, 정유재란 때 또다시 8개의 성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서생포왜성·부산진왜성·가덕도왜성·안골포왜성·웅천포왜성·울산왜성·고성왜성·사천왜성·순천왜성 등이 그것이다. 

임진왜란과 왜성


임진왜란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지 정확히 200년 만인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일어난 전쟁이다. 여기에 명(明)나라가 조선의 원군으로 출전해 임진왜란은 동북아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임진왜란은 정유재란을 포함해 전후 7년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지속됐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랜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통일정권을 수립한 후였다. 도요토미는 반대세력의 군사력을 무마하기 위해 한반도 침략을 개시했다. 또한 조선과 명에 대한 무역 조건을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일본군은 국내에서 오랜 전쟁기간을 통해 전술에 능통했다. 특히 신무기인 조총을 대량생산하는 등 전쟁 준비를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일본이 임지왜란 때, 동원한 전체 병력은 20여만 명에 달했다. 


반면 조선은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로 민심이 이반하고, 국가 재정이 고갈돼 사실상 국방을 감당할 군사가 없었다. 

선조 25년(1592)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14일만에, 4월 30일 새벽 선조는 도성을 빠져나와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피신했고, 노비들은 장예원과 형조에 난입해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 왜성은 경사가 심하지 않은 대신 입구의 꺾임이 심해 함락하기가 쉽지 않다. 

오른쪽이 천수각터 이다.

왜군은 계속 북상해 6월에 평양을 점령, 본거지로 삼으니 선조는 의주까지 피란해 요동(遼東)으로 망명하고자, 사신들을 수 차례나 명나라로 파견했으나 유성룡 등의 반대가 있어 차마 압록강을 넘지는 않았다(물론 명나라도 거의 유배지와 다름없는 관성보를 선조의 망명처로 제공하려 하였다) 


왜군은 함경도에 들어가서는, 백성들에 의해 끌려나온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삼았다. 백성들이 왕자를 붙잡아 왜군에 인도한 일이나 도성에 방화를 자행한 행위는 왕실에 대한 백성의 민심이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선조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명은 요양부총병 조승훈의 국경수비병 5000명을 보내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왜군의 기습으로 대패했다. 명나라는 다시 12월 이여송을 제독으로 삼아 4만3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 이듬해(1593) 조선군과 연합해 평양성을 공격해 겨우 수복할 수 있었다. 평양성을 수복한 조명연합군은 벽제관전투와 행주산성대첩을 통해 왜군과 승패를 주고받으면서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한편 수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활약으로 개전 초기부터 제해권을 장악했다. 조선 수군은 선조 25년(1592) 5월부터 옥포·합포·사천·당포·당항포 등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왜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왜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하고 8월에는 왜 수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격, 전선을 대파했다. 이후부터 왜수군은 해전을 기피하고 배에서 내려 육지에서 총포로 대항하는 육상전투로 전환했다

전쟁이 일어난 지 몇 달이 지난 선조 25년 6월부터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했다. 의병은 양반계층에서 승병을 비롯한 천민계층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익숙한 지형을 이용해 유격전술로 왜군을 격파하기에 이르렀다.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화의를 모색하는 한편 선조 26년 4월 도성에서 철수해 남쪽으로 후퇴했다. 왜군은 서생포에서 웅천에 이르는 남해안의 요지에 왜성을 쌓고 주둔하면서 화의의 결과를 기다렸다.

도요토미는 명나라 사신 심유경에게 화의의 조건으로 

(1) 명의 황녀를 일본 왕의 후비로 줄 것 

(2)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3) 조선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보낼 것 

(4) 일본과의 무역을 인정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러한 화의 조건은 대부분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에 따라 승군 의병장 유정(사명당)은 울산 서생포왜성에서 왜장 가토를 세 차례나 만나 적정을 염탐하면서 일본 측의 요구사항이 실현 불가함을 역설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방어 기능이 뛰어난 성곽구조를 갖게 된다. 그 특징으로 우선 성곽을 둘러싸고 깊은 해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성곽을 다층구조로 하여 연결통로마다 90° 각도로 꺾이게 만들어 적이 일직선으로 성안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농성전에 유리하게 축성했다.


한국 산성의 경우 성문 하나라도 뚫리면 성 전체가 함락되는 구조와는 다른 형태다.

한국의 성곽에서 치와함께 옹성 구조가 발달한 것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다. 


또한 일본의 성은 대체로 평지성 또는 평산성이면서 수많은 전쟁을 통해 전투 기능이 극대화된 다중방어 기능으로구성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한 울산왜성을 조명연합군 6만 명이 공격했지만 끝내 함락하지 못한 것처럼 왜성은 특히 방어전에서 뛰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1. 서생포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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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 초기인 선조 26년(1593) 가토 기요마사가 울주군 서생포에 있던 조선 수군의 만호가 머물렀던 만호진성을 함락한 후 그 해 5월부터 이듬해에 걸쳐 축성한 일본식 석성이다. 


이 왜성을 축성할 때 인근 조선의 산성과 수군 만호진성의 돌을 가져와 쌓았다고 전한다.회야강 입구의 작은 포구를 끼고 해발 133m 고지의 산정에 산을 깎아 본성인 내성을 쌓고 동쪽의 경사면을 이용해 2단, 3단의 부곽(副廓)을 축성했다. 


경사면 아래로는 길게 외성을 배치하고 성 밖에는 2~3중의 호를 둘렀다. 성의 전체 면적은 15만1984m2(약 4만5000평)로 동서가 870m, 남북이 370m다. 규모 면에서는 남해안 왜성 가운데 가장 큰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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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가 가팔라지면서 내성 입구가 나타난다. 서생포왜성은 정상부에 내성을 쌓고, 평지에 외성을 쌓은 평산성(平山城)이다. 평산성은 본성을 산성이나 구릉에 두고, 외곽을 평탄한 개활지에 두는 형태의 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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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형태의 산성이기 때문이다. 수직에 가까운 우리 산성과 달리 60~70도의 경사를 이루며 큰 돌 사이로 작은 돌을 끼워 넣은 축성으 하였다.

내성은 경사면을 이용해 2단, 3단의 부곽(副廓)을 쌓고 출입구 부분은 갈지(之)자 형태로 만들었다. 이것은 성 안으로 침입하는 적을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한국산성의 출입구인 기역자 형태보다 꺾임이 급하다. 


서생포왜성4.jpg



2. 울산왜성 (가등청정을 사로잡을 수 있을 뻔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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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JPG


우리 산성은 성벽이 무너지면 일거에 지휘부까지 함락되는 구조인 데 반해 왜성은 복잡한 2중, 3중의 저지선을 만들어 장수가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비 위주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곽 외부에는 돌출부를 만들어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우리나라 고구려 성의 특징인 치(雉)를 연상시킨다. 내성이 자리한 경사 지형에는 진입로를 좁고 길게 만들어 침입하는 적을 쉽게 제압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미로(迷路) 같은 통로를 만들어 일단 진입한 적군이 방향감각을 잃게 하는 등 왜성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산성의 정상부는 천수각(天守閣)이 있던 곳이다. 천수각은 주장(主將)이 위치하면서 전투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부와 망루 역할을 겸했을 것이다.

일본에 현존하는 일본성의 경우 천수각은 대체로 2~5층 높이로 조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천수각 옆에는 장군수라는 우물 터가 있는데, 가토 기요마사는 물이 부족하자 말을 죽여 그 피를 마셨다고 한다. 


가토는 울산왜성에서 격심한 물과 식량 부족을 겪은 경험을 되살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 돌아가 구마모토성을 축성하면서 먼저 수십 곳에 우물부터 파고, 고구마 줄기로 일본식 다다미를 만들어 유사시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우리 전통 성인 학성으로 잘 못 알려진 울산왜성. 일본인들은 학성을 헐다가 이 성을 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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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성곽이다. 산 정상의 흙을 깎아 평지를 조성한 후 산허리에 성을 쌓아 3단의 성곽을 만들어 각각 개별적인 전투를 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3단의 성곽이란 본환(本丸), 이환(二丸), 삼환(三丸)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왜성의 구조를 말한다. 울산왜성의 본환은 49m, 이환은 35m, 삼환은 25m 높이로 축성되었는데 각 성은 한 변이 40~50×100m 내외의 장방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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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도산성)전투는 정유재란 때 일어났다. 

화의가 결렬되자 선조 30년(1597) 도요토미의 재침 명령에 따라 조선은 다시 전쟁에 휘말렸다. 이 해 1월 가토가 이끄는 선봉군은 부산포의 경상좌수영과 울산의 서생포로 쳐들어왔다. 


이어 3월에는 육군과 수군이 대규모로 바다를 건너와 울산·동래 등 해안과 진주·사천 등을 침략했다. 그러나 전황은 임진년과 달라 조선군도 조직화되었고, 명나라에서도 재차 원병을 파견했다. 다만 이순신이 무고죄로 물러난 수군은 곳곳에서 대패해 제해권을 상실했다. 남원을 거쳐 전주를 점령하고 공주와 진천을 거쳐 직산에 이른 왜군은 명나라 군사에 대패했다. 


조선은 이순신이 다시 기용되면서 해상에서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왜군은 후퇴해 남해안 각지에 성을 쌓고 장기 주둔을 계획했다. 가토는 울산읍성의 석재를 옮겨와 도산에 왜성을 쌓았다. 성 남쪽은 태화강으로 연결해 배가 성 아래까지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왜성이 거의 축조될 무렵인 그 해(1597) 12월 명장 양호·마귀, 조선군 도원수 권율 등이 이끄는 조명연합군 5만 명이 울산에 이르렀다. 이로써 성을 쌓던 1만6000여명의 왜군과 조명연합군은 두 차례에 걸친 도산성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전투는 시종일관 조명연합군의 공성전과 왜군의 수성전으로 이어졌다. 3단의 성곽을 갖춘 도산성의 외성은 개전 초기에 돌파되었다. 하지만 내성은 험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석축을 쌓고 토굴과 방옥(房屋)을 적절히 배치해 조총전에 매우 유리하게 축조되었기 때문에 공성기계와 기구를 준비하지 못한 조명연합군은 화포 공격 등 화공전만으로 별 힘을 쓰지 못했다. 


연합군은 서생포성과 연결을 차단하고 수원(水源)을 고갈시켰다. 왜군은 식량이 없어 군마를 잡아 피를 마시고 오줌을 받아 마시거나 벽의 흙을 끓여 먹을 정도로 고전했다. 그러나 서생포와 부산포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이 울산으로 접근하고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 (宇喜多秀家)의 병력도 울산 부근으로 속속 집결했다. 이들 총 6만 명이 힘써 도산성을 구원하니 연합군은 할 수 없이 경주로 철수했다. 이로써 1차 공성전은 실패했다. 


연합군은 이듬해(1598) 9월 2차 공격을 개시했지만 조총을 쏘면서 대항하는 왜군 때문에 성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후 왜군은 방어에만 주력하고 응전하지 않아 또다시 공성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보다 앞서 그 해 8월 도요토미가 사망하고, 그의 철수령에 따라 가토는 11월 밤을 틈타 성을 불태우고 성의 동남쪽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후퇴함으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막을 내렸다.

울산왜성은 시루를 엎어 놓은 형상이라 하여 증성(甑城),섬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도산(島山城)으로도 불렸다. 한편으로는 학성(鶴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원래 학성은 신라의 계변성이던 곳이다. <경상도지리지> ‘울산조’에 따르면울산군은 본래 계변성인데 신라 때 신학성(神鶴城)이라고 고쳤다는 것이다. 이는 신라 효공왕 5년(90) 학 두 마리가 신상(神像)을 물고 계변성 신두산에서 우는 것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학성이라 한 데서 연유한다고 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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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드르 18-04-25 16:37
   
우헤이(X)→우키타 히데이에
그런데 일본에 있는 조선식 산성이란 게 어떤 거죠?
히스토리2 18-04-25 17:12
   
아 네 우키타 가 맞구요.....제가 오타가 원래 좀 많은데 항상 죄송하게 생각합니다...글구 조선식 산성은 백제 멸망후 일본이 나당 연합군에 맞서, 쓰시마와 큐슈일대에 지은 백제식...즉 조선식 산성을 말합니다.. 좋은 하루 되식고,,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꼬이떡밥 18-04-25 21:31
   
도요토미는 반대세력의 군사력을 무마하기 위해 한반도 침략을 개시했다. 또한 조선과 명에 대한 무역 조건을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이건 잘못 된겁니다 대부분이 히데요시에게 일찍 항복한 서쪽 영주들이고 동쪽 영주들은 얼만 안오거나 적은 병력만 보냈습니다

왜성은 우리나 명나라 군이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성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본성을 남겨두고 지성을 점령한 시점에서 공성장비도 없다면 천천히 농성전으로 갔다면 쉽게 항복을 받았을겁니다
왜냐면 원래의 영지에 새워졌다면 영지서 거두운 양식도 충분하고 여러 마을의 무리들의 도움을 받을수도 있지만
조선의 땅에 세워진 성에서 무슨 성밖의 도움을 다른 왜군 말고 어디서 도움을 받겠습니까

결국 6만이나 되는 원병이 오니 조명군에서 병력의 부족으로 철군할수 밖에요
히스토리2 18-04-25 23:00
   
일반적인 의견을 생각없이 적었는데,,일리있는 말씀 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반대세력의 군사력을 무마하려면 도쿠가와가 어떠한 구실을 내세워도 데리고 왔어야 합니다....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요...일부 히데요시 쪽 사람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줄 목적도 있었으니 그러나 무역부분은 당시 일본에게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조공무역이라는게, 중국의 무역적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요.......!!!

왜성도 우물이 부족해서 말피를 먹고 난리를 친 것 보면, 수비력이 강했지, 거대한 규모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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