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이긴 일본 찬양했는데 식민지 조선은 ‘타고르 짝사랑’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년).
1912년 영문시집 『기탄잘리(Gitanzali)』가 영국에서 나온 지 7개월 만에 그는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다. “그의 운율은 평생 내가 꿈꾸던 세계를 보여 줬다.” 시집의 서문을 쓴 예이츠의 극찬에 힘입어 그는 동양의 시성(詩聖) 자리에 올랐다.
기다란 흰 수염에 흰 천을 도포처럼 두른 사진 속 그의 풍모는 ‘바라만 봐도 거룩하고 고요한 기풍’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서구인들의 눈에 그는 물질만능주의에 찌든 서구에 동양의 지혜를 전해 줄 성자나 예언자로 비쳤다.
“우리 타고르 선생이 가장 영예 있는 노벨상을 받았으니 실로 동양 사람으로는 효시라. 선생으로 말미암아 인도의 면목이 일신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동양인 전체의 명예라 할지로다.” 그의 시를 이 땅에 처음 소개했던 진순성은 그를 ‘우리’로 불러 동일시했다. 강한 서구를 선망한 이 땅의 독자들도 서구가 인정한 그의 시 세계에 환호를 보냈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는 등촉(燈燭)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주요한의 번역으로 실린 ‘동방의 등촉’이란 그의 시는 일제 치하 이 땅 사람들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 준 격려의 송가로 해석됐다. 희망을 잃은 암울한 그때 우리의 문화적 저력을 인정해 준 이 시구 하나로 그는 오늘까지 이 땅의 사람들 뇌리 깊숙이 ‘우리 편’으로 살아 숨 쉰다.
그러나 ‘바다 기슭에 밤은 밝고
핏빛 구름의 새벽에
동녘의 작은 새
소리 높이 명예로운 개선을 노래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을 찬양한 이 시는 타고르는 우군이었다는 고정관념과 충돌한다. 그는 식민지 인도가 영국을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을 러일전쟁에서 봤다.
“일본은 아시아 속에 희망을 가져왔다.
우리는 해 돋는 이 나라에 감사한다.
일본은 수행해야 할 동양의 사명이 있다.”
그때 그는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을 응원한 일본 편이었다. 그에게 일본은 서양에 필적하는 강자로 존중의 대상이었지만 식민지 조선은 동병상련의 동정심을 자아내는 패배자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을 세 번이나 방문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갔던 그는 조선 땅에는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타고르의 ‘일본 찬가’는 그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아전인수식 짝사랑에 지나지 않았음을 명증한다.
[허동현 /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