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
주로 조선의 국왕이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정조 이외에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평소에는 수원 부사 또는 유수가 집무하던 관아로서도 활용되던 곳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행궁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수원 화성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다.화성행궁은 조선 후기 정치와 군사 및 사회문화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며 발굴조사 및 복원정비사업을 통해 조선시대 행궁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주로 수원화성을 건설하는데 관심을 기울이던 정조 시기에 많이 증축되었다. 이 때문에 각 건물마다 지어진 시기가 다른데, 그 과정이 화성성역의궤에 잘 기록되어 있다.정조 사망 직후인 순조 1년(1801)에는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했다.일제강점기 동안 행궁의 건물들은 무참히 헐려나갔으며, 그 부지에는 신풍초등학교를 비롯한 많은 근대 건물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97년에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로는 수원시에서 1999년부터 복원사업을 펼쳤고, 꾸준하게 화성 행궁지의 건물들을 매입하여 철거한 뒤 행궁 건물들을 복원해 나갔다. . 2007년 6월 8일에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엄청난 훼손을 당했지만 지금은 복원사업을 통해 옛 모습을 상당부분 되찾았다. 현재도 복원이 진행중이며 2003년 7월 말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을 완료한 1단계 공사가 끝났다.
1. 일제에 의해 훼손된 화성행궁
수원군청이 되버린 '낙담헌'
영조의 어진을 보관한 봉수당을 헐고 지은 경기도립병원(1929년)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이된 '이아'
수원공립학교로 변한 우화관(1915년)
정조의 어진을 보관한 화령전의 모습(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다)
2. 복원공사가 진행된 수원 화성행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