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5-19 13:43
[기타] [제시] 신립 충주/탄금대전투의 조선군 규모 이설(異說).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515  

https://blog.naver.com/halmi/221173569096

-전략-

1) 선조실록은 해당 부분에 아예 병력 숫자 없음.
나중에 1596년 1월 비변사에서 하삼도 방비책을 건의하는 기사에서 10만설이 나오는데... 
이는 본문이 아니라 주석으로 『신립이 험조한 곳에서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평원 광야(平原廣野)로 영입(迎入)함으로써 좌우에 적이 가득 차서 미처 교전도 못하고 10만의 정병(精兵)이 모두 패하고 말았다』 며 통탄한다고(通哉) 적고 있음. 단순한 수식으로 봐야 함.

2) 선조수정실록에는 신립이 떠날 때 류성룡에게 8천명을 받아서 서울에서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 밖에 없음.

3) 정작 신립한테 병력을 줬다는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신립이 얼마 못 데리고 가서, 현지에서 모았다고 했음. 
임진왜란 당시 전시수상을 했고, 신립에게 약간의 병력을 넘겨줬던 당사자인 유성룡의 말이 신빙성 있음.

4) 난중잡록은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라고 적혀 있음.

5) 코니시일행기(小西一行記)에는 신립이 한양에서 이끌고 온 37,500명에, 충청도에서 먼저 모은 12,500명이라고 되어 있음(총 5만명).
그런데 이 책은 코니시 유키나가를 주인공으로 한 군기물(군담소설)임.
군기물을 역사책으로 취급하면 안됨.
이미 이 문헌도 김시덕 교수가 연구를 했음.

6) 태합기에 '군세 6,7만(軍勢六七万)'이라고 적혀 있지만, 태합기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책이 아니라, 사료를 취합해서 이야기꺼리로 만든 것(브리태니커 재팬 표현으로는 '준 군기물')임.
그러다보니 조선군이 농성하는 걸로 나옴. 그것도 믿을래?

7) 그리고 8만명이라고 써놓은게 프로이스 일본사.
앞서 말한대로, 자기가 직접 본 게 아니라, 건너 건너 들은 것임.

8) 임진전란사(이형석), 임진왜란사(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등, 정상적인 대부분의 연구결과는 8~9천명이라고 명시하고 있음. 학자들은 바보가 아님.
(당장 네이버에 탄금대전투라고 검색해서 각종 백과사전 살펴보면, 전부 8~9천명)

신립이 당장에 5만~10만을 모으고 내려갈 수 있을 정도라면, 왜군이 어떻게 조선팔도를 유린할 수 있나?
그 정도 많은 병력이 죽었다면, 조선의 벼슬아치들도 그만큼 죽어서, '탄금대에서 죽음'이라는 프로필을 가진 인물들이 엄청나게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
써져 있는 대로 믿을거 같으면 왜 실록의 8천명은 왜 안 믿고, 징비록은 왜 안 믿나?
사료는 교차검증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나?

-후략-

https://blog.naver.com/halmi/221173569096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감방친구 18-05-19 13:49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늘 왜란과 호란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제대로 붙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텐데
당시 개나리님들의 유비무환이 아니라 무비유환 정신이 환란을 자초했고 이후 400 년 역사를 결정지었습니다
뭐꼬이떡밥 18-05-19 15:05
   
저걸 믿는다면 적벽대전의 100만 대군도 믿어야.
촐라롱콘 18-05-19 15:22
   
신립보다 앞서 한양을 출발해 상주 북천전투에서 4월 25일 고니시군에게 패배한 이일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한양에서 출발시 50명의 군관과 300명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예정된 숫자의 군관과 병사들을 즉시 차출하지 못해.... 예정출발시각보다 만2일(날수로 3일)이나 지나서야
군관 50명에, 병사들은 정예병은 커녕 온갖 어중이떠중이 죄다 모집해서 겨우 숫자만 맞추고서야
한양을 출발할 수 있었고...상주에 도착하고나서 현지에서 모집한 농민군 수 백명을 더해 총합계 1,000명이
미처 안되는 병력으로 일본군을 맞았다가 순식간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정상적으로 시스템이 돌아갔다면 이일이 상주 또는 대구에 도착했을 당시 제승방략에 의해
소집된 경상도 중북부 지역의 적어도 최소 만 단위가 넘는 병력들이 집결해 있어야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일본군의 진격속도와 이일의 영남지역으로의 늦장도착,
제승방략을 비롯한 국방시스템의 혼선과 붕괴로 인해... 이일이 거느릴 수 있었던 현지병력은
상주지역에 한정된 병력에 불과했습니다.


신립의 경우에는 물론 경상도 일대에서의 병력지휘권에 한정된 이일의 경우보다는 더욱 권한과 지위가 높은
삼도도순변사(경상-전라-충청 3도의 병력지휘권을 지닌)에 임명된지라....

게다가 한양출발시 신립에게 배속된 군관도 80명 규모로 이일보다 많았고.. 한양을 떠나 충주로 남하하면서
한양과 남하하는 주변 고을들의 병력들을 일부 배속받았고.. 충주에 도착해서는 충주를 비롯한 충청도 병력
(대체로 충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오늘날의 충북일대의) 8,000명까지 휘하에 거느렸기 때문에....

충주 탐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거느릴 수 있는 병력의 최대치는.... 충청도 병력 8,000명 +
한양과 신립이 남하하는 경로상의 경기도 주변고을에서 차출된 병력 + 상주전투에서 패배한
이일 휘하의 패잔병들의 총합이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 이일의 패잔병들은 규모가 겨우 기백명 수준으로 알고 있으며,
충청도 병력 또한 여러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거의 동일하게 8,000명 규모로 언급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한양-경기지역에서 차출되어 남하한 병력규모가 어느정도가 되는 지가 총병력수의 변수가
될 것입니다.
신립의 조카로 탄금대전투에 참가했다고 생존한 신흠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충주에 도착할때 거느린
병력규모를 수 천명으로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기록에는 또한 신립이 거느린 한양-경기일원에서 소집된 병력규모가 충추에 집결한 충청도군과
비슷한 8,000명 규모라고 언급되기도 했으니....
.
.
결론적으로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 총 병력규모는 최소 1만여 명에서
최대 1만 6천명 규모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대치 1만 6천명이라고 한다면 고니시의 일본군에 비해서도 비등비등한 병력규모였을 것입니다.
(1만 8천여명의 고니시군이 부산-동래-밀양-상주 전투를 거치며 충주까지 북상하는 동안 발생한
전사자와 부상으로 인한 낙오병들로 인해 다소 마이너스된 병력들까지 감안한다면....)

일본군과 서로 비슷한 병력규모라면... 충주성의 한정된 공간에 1만여 병력을 쑤셔넣어 수세적으로
임하기보다는... 신립이 대회전으로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결심을 했던 것도 어느정도 이해는 가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신립이 북방에서 공을 세울 당시에 신립 휘하에는 조선에서는 최정예병이라 할만한
6진 병력들이 그의 곁에 있었지만.. (임란 당시에도 6진병사들은 함경도에서 일본군 제2군인 가토군을
맞아 뛰어난 기마술과 궁술로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충주에 집결한 조선군들은 여러 고을에서 소집된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농민출신 징집병들이
대다수라는 점이었습니다.
     
뭐꼬이떡밥 18-05-19 16:46
   
뭐 비등한 숫자로...

야전을 했다는게 문제아니면 문제죠

이겼으면 아무탈 없었습니다만.

졌을때도 상정을 해 넣었어야죠.

신립이 어떤 생각으로 야전 했을지 모릅니다만
농성을 했더라면 조선군은 시간을 벌어서 더 많은 병력을 충청도로 내려 보냈을것이고

더욱더 많은 숫자를 바탕으로 유리한 전세로 싸울수 있었겠지요
상식4 18-05-19 23:44
   
전투에서 패했다고 그 군대가 다 죽는 건 아닙니다.
전투에 패해 도망가는 병사가 무거운 무기들고 튄답니까?
적이 튈때, 무서운 게 기동력 좋은 기병이죠. 학살타임,
일본군의 경우 기병의 비율이 매우 적었고, 대규모 전투에서 졌다는 게
그 병력이 다 죽은 걸 의미하진 않습니다.
1/3만 죽어도 군대로서 기능을 상실한다고 전멸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살수대첩이나 귀주대첩 같이 극소수 남기고 전멸시키는 전투는 드뭅니다.
탄금대 전투 병력이 10만이고 그 숫자가 대부분 죽었으면 나라가 휘청하고 그냥 전쟁 끝나는 겁니다.
대규모 병력이 중앙에서 사령관이 내려오기 전에 왜군과 맞닥드려 와해된 경우도 있었죠.

조선이 반격시점에 10만 병력이란 건 생짜베기를 10만 모은 게 아니라 와해된 군대를 수습한 게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겁니다.
 
 
Total 20,013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8813
4218 [한국사] 단군 말살에 앞장 선 「한겨레 21」 (2) 마누시아 06-24 1517
4217 [한국사] 고구려, 백제, 신라, 부여, 예맥, 옥저, 비류 - 모두 단… (11) 꼬마러브 11-01 1517
4216 [한국사] 고대사 상념 (27) 감방친구 11-06 1517
4215 [기타] 식민사학이 끼치고 있는 해악 (26) 관심병자 12-06 1517
4214 [일본] 일본의 천황제 1 히스토리2 04-21 1517
4213 [한국사] 새왕조를 거부한 고려 충절들의 최후 [펌] (1) 가난한서민 09-03 1517
4212 [한국사] 북한학계가 정리한 고구려 태왕의 연호 보스턴2 09-04 1517
4211 [한국사] 삼한(三韓)의 탄생 배경 (3) 백운 03-22 1517
4210 [한국사] 조선시대에도 키스를 했을까????? 소유자™ 04-16 1517
4209 [한국사] 서악 華山 이동과 馬邑山 즉 평양성 (2) 구르뫼 07-18 1517
4208 [북한] 신격화를 한 사례는 있지만 북한의 신격화엔 유별난 … (4) 인간성황 04-30 1516
4207 [한국사] 한민족관 (4) 관심병자 08-01 1516
4206 [한국사] 역사만화 바람따라 물따라 <김신국 편> (1) 설민석 05-25 1516
4205 [세계사] 세계 고인돌 dolmen 모음 (1) 도배시러 11-09 1516
4204 [일본] 사이토 바루 고분군 신무동정기의 출발점? or 식민사… (2) 풍림화산투 05-02 1516
4203 [기타] [제시] 신립 충주/탄금대전투의 조선군 규모 이설(異… (5) 관심병자 05-19 1516
4202 [한국사] 수(隋) 임유관(臨渝關, 臨榆關) 추적 01 (2) 감방친구 10-27 1516
4201 [일본] (팩트 체크) - 군함도에서 차별없이 잘 먹고 잘 살았… (1) mymiky 07-06 1516
4200 [기타] 옛날 서양 지도의 아시아 (3) 관심병자 10-11 1516
4199 [한국사] [쓸모없는 에세이] 멋진 스타일의 옷 - 철릭 (1) 떡국 11-11 1516
4198 [한국사] [FACT] 황현필 -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은 거란의 1차 … 아비바스 12-02 1516
4197 [다문화] 충남도민 10명 중 1명이 국제결혼 doysglmetp 11-17 1515
4196 [일본] 왜국 따위가 조선을 씹으면 안되지 (9) 화난늑대 03-01 1515
4195 [일본] 태풍 '위파' 북상..후쿠시마 오염수 유출 우려 스쿨즈건0 10-16 1515
4194 [다문화] 저출산, 인구감소 때문에 이민이 들어오면 위기 증폭 (5) 보리스진 03-06 1515
4193 [기타] 쩝 마음대로 남의 글 이렇게 퍼와서 자기 글인 마냥 … (3) 콜라캔 07-08 1515
4192 [일본] 비극적 역사! 결국 매국노 친일파는 살아남다 (2) 5minutes 06-24 1515
 <  581  582  583  584  585  586  587  588  589  5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