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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16 13:38
[한국사] 요서 백제 추적(bc 3세기~ad 5세기)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5,216  

(요서 백제를 추적하고자 bc 3~ad 5에 이르는 관련 기록과 사실을 정리하였습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대여섯 시간을 밥도 안 먹고 담배만 태우며 이 짓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더군요 )





1.
서기전 3세기 이전, 부여, 건국
(상서대전, 산해경, 사기 화식열전, 한서 등에 부여 언급
연나라 (동)북쪽에 위치)

2.
서기전 206년, 부여, 한(漢) 건국에 참여
“북맥(北貉)과 연(燕)나라 사람이 와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으로 한(漢)을 도왔다 (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 <한서 권1>

3.
학계 주류설에서는 부여의 전신을 서기전 10세기에서 4세기까지 존재한 만주 길림성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로 봄. 청동기 문화인 서단산문화가 철기문화로 이행한 대해맹유형(大海猛類型,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전 2세기)의 주체를 건국기의 부여로 보고 그 후의 문화상인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 서기전 2세기부터 서기 3세기)의 주체 역시 부여로 봄

4.
서기전 1세기 초 현도군이 기존 요동군 지역인 심양ㅡ무순 일대로 교치됨(학계 주류설에서는 1현도, 2현도, 3현도 하는 식으로 현도군이 교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 압록강 중상류를 중심한 남만주~한반도 북부를 경유했다고 주장하나 고고물질문화상과 삼국사기 등으로 볼 때에 전혀 사실이 아님)

5.
고구려 건국과 말갈 정벌 및 복속

6.
한나라 왕망 이후 한나라(신~후한)는 장성 바깥의 수비를 오환 등 북방종족을 고용하여 맡기면서 현 노룡ㆍ창려 동쪽은 도로가 끊기는 등 실질 지배력이 상실되다가 점차 공손씨에 의해 점유돼 갔음

7.
서기 12년~14년, 고구려 유리왕, 한나라 변경 습격/약탈, 양맥 정벌, 현도군 고구려현 탈취

8.
서기 49년, 고구려 모본왕, 한나라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

9.
서기 55년, 고구려 태조대왕, 요서에 열 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병사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요수를 현 요하로 볼 시에 요서는 현 대릉하 일대, 대릉하로 볼 시에 현 난하~조양 일대, 난하로 볼 시에 노룡/창려 일대)

10.
서기 105년, 고구려 태조대왕, 한나라 요동군 6개 현 약탈하였으나 한나라 요동태수 경기와의 전투에서 대패

11.
서기 111년, 고구려 태조대왕, 예맥을 거느리고 한나라 현도군 공격

12.
서기 111년, 부여, 7천의 군사로 낙랑군 공격

13.
서기 118년, 고구려 태조대왕, 예맥을 거느리고 한나라 현도군 화려성 공격

14.
서기 120년, 부여, 후한에 사신으로 파견, 인수(印綬)와 금색 비단을 받아옴

15.
서기 121~122년, 고구려 태조대왕, 한나라 요동ㆍ현도군과의 전쟁
(고구려는 선비족 8천, 예맥과 마한 기병 1만 명을 거느림)

16.
서기 121~122년, 한vs고구려 전쟁에 부여 세자 위귀태가 2만 명을 파병하여 한나라 구원. 고구려 패배

17.
서기 136년, 부여왕 한나라 방문

18.
서기 146년, 고구려 태조대왕,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

19.
서기 167년, 부여, 부여왕이 직접 2만 병력을 이끌고 현도군 공격

20.
서기 168, 고구려 신대왕, 한나라 현도군 태수 경림(耿臨)이 침입해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고구려는 항복하고 현도에 속하기를 빎


21.
서기 169년, 고구려 신대왕,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현도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서 부산(富山)의 적도들을 토벌

22.
서기 172, 고구려 신대왕, 한나라가 고구려 침공,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우니 한나라 군사들은 크게 패하여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가지 못함(제1좌원대첩)

23.
서기 184년, 고구려 고국천왕, 한나라 요동 태수가 고구려 공격, 임금이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어 한나라를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함, 임금이 직접 날쌔고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사와 좌원(坐原)에서 싸워 물리침(제2좌원대첩)

24.
서기 189년, 공손도 요동태수가 됨, 후에 왕을 자처, 204년 사망

25.
공손도(? ~ 204년)와 부여(기록상 위구태)의 결혼동맹

26.
서기 2세기 말 ~ 3세기 초 후한 유주, 기주, 평주 지역에서 수많은 유이민 고구려 유입

27.
서기 207년, 공손강, 조조의 위나라에 귀부

28.
서기 238년, 공손연, 위나라로부터 독립 선포, 왕을 자처, 같은 해 위나라(사마의)와 고구려(동천왕) 연합군에 공손씨 정권 멸망

29.
서기 242년, 고구려 동천왕,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림


30.
서기 246년, 고구려 동천왕,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에서 나와 고구려 침입(낙랑태수와 대방태수의 군대도 함께 현도에서 출정)

31.
서기 246년, 백제 고이왕,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32.
서기 247년, 고구려 동천왕, 환도성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천도.

33.
서기 259년, 고구려 중천왕, 위나라 장수 위지해(尉遲楷)의 침입,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여 명 참수(고구려의 대승)

34.
서기 280년, 고구려 서천왕, 양맥(서)과 숙신(동북)의 난 평정과 복속

35.
서기 285년, 모용외의 부여 침공(1만여명이 포로로 잡혀 끌려감, 부여왕 의려 xx)

36.
서기 3세기 말, 287년 이전, 백제 책계왕,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37.
서기 3세기 말, 모용선비를 비롯한 선비족의 서진 침략

38.
서진 당빈, 노룡 방면의 장성 보축

39.
서기 302년, 모용선비의 우문선비 공격

40.
서기 291~306년, 팔왕의 난

41.
서기 307~312년, 영가의 난

42.
서기 293~296년, 고구려 봉상왕, 모용외의 침입과 화친(침략지 북부 신성, 고국원)

43.
서기 298년, 백제 책계왕,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44.
서기 302년, 고구려 미천왕,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김


45.
서기 304년, 5호 16국 시대 시작( ~ 439년)

46.
서기 304년, 백제 분서왕,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47.
서기 311년, 고구려 미천왕,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음

48.
서기 311년, 서진의 실질적 멸망(유총에 의한 낙양 함락, 서진 군사 10만여 명 몰살)
 
49.
서기 313년, 고구려 미천왕,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음


50.
서기 314년, 고구려 미천왕, 대방군(帶方郡)을 침공

51.
서기 315년, 고구려 미천왕,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음

52.
~ 서기 319년, 고구려 미천왕, 진나라(진나라는 이미 망한 상태) 평주자사 최비와 공모하여 우문선비, 단선비와 연합해 모용선비의 극성을 공격하려다 실패, 모용선비의 장통이 고구려 침략

53.
고구려는 계속하여 모용선비의 요동지역을 공격

54.
서기 339년, 고구려 고국원왕, 모용황(慕容皝)이 침입하여 그의 병사가 신성에 이르렀다. 임금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곧 돌아감


55.
서기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
봄 2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음,
가을 8월, 임금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김,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김,
11 월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입해)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궁궐 창고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물을 훔쳤으며,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운 뒤에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감

56.
서기 345년, 고구려 고국원왕,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에게 우리나라를 침공케 하여 남소(南蘇)를 무너뜨린 후 수비군을 남겨두고 돌아감

57.
서기 346년, 부여, 백제의 공격을 받은 뒤 서쪽으로 모용선비 영역 근처로 이동

58.
서기 346년, 모용황의 부여 공격(부여왕 현을 포함 5만여 명이 전연으로 끌려가고 사실상 부여 붕괴)

59.
서기 355년, 고구려 고국원왕, 모용선비와 화친, 모용선비는 고구려왕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함

60.
서기 366년, 백제 근초고왕, 가야 정벌, 마한의 실질 정복(전남권까지 지배력 확대)

61.
서기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 백제의 치양(雉壤) 침략(고구려와 백제의 사상 최초의 군사충돌)

62.
서기 369년, 백제 근초고왕, 왜왕에게 칠지도 하사

63.
서기 370년, 고구려 고국원왕,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격파, 모용선비 (연나라)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로 쫓겨 옴, 고구려가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냄

64.
서기 371년,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사살

65.
서기 371년, 백제 근초고왕, 한성으로 천도

66.
서기 372년, 백제 근초고왕, 동진과 교류

67.
서기 377년, 백제 근구수왕, 고구려 평양성 공격

68.
서기 385년, 고구려 고국양왕,
여름 6월, 임금이 병사 4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 왕 모용수(慕容垂)가 대방의 왕 모용좌(慕容佐)에게 용성(龍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모용좌는 우리 병사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우리 병사가 이들을 격파하였다.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 11월, 연나라의 모용농(慕容農)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요동과 현도 두 군을 회복하였다. 예전에 유주(幽州), 기주(冀州) 등지에서 다수의 유랑민이 우리에게 투항했었는데, 모용농이 범양(范陽)의 방연(龐淵)을 요동의 태수로 삼아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69.
391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임금이 병사를 보내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이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395)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광개토대왕비문>”

70.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봄 정월, 임금이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연나라 왕 모용성(慕容盛)이 우리 임금의 예절이 오만하다는 이유로 직접 병사 3만을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그들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두 성을 빼앗고, 7백여 리의 땅을 점령하여 그들의 백성 5천여 호를 이주시켜 놓고 돌아갔다.


71.
서기 402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임금이 병사를 보내 연나라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였다. 연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주


72.
서기 404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겨울 11월, 군사를 출동시켜 연나라를 공격
 
73.
서기 405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봄 정월, 연나라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성이 함락될 즈음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에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면 내가 황후와 함께 가마를 타고 들어가리라.”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서는 삼엄한 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끝내 성을 빼앗지 못하고 물러갔다.


74.
서기 40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겨울 12월, 연나라의 왕 모용희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형북(陘北)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가 많은 것을 겁내어 돌아가려 하다가, 수레의 무거운 군수품을 버리고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들을 데리고 우리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연나라는 3천여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병사와 말이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 병사들이 길에 줄을 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75.
서기 408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후연 멸망,
봄 3월, 북연(北燕)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예를 베풀었다. 북연의 왕 모용운(慕容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모용운의 조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방계 혈족인데, 자칭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 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보(慕容寶)가 태자가 되었을 때 모용운이 무예가 뛰어나서 태자를 모시도록 하였는데, 모용보가 모용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다.


76.
서기 41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동부여 원정

77.
서기 427년, 고구려 장수왕
평양(平壤)으로 천도


78.
서기 435년, 고구려 장수왕,
여름 6월, 임금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의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제들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으며,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임금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임금이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였다. 위나라의 사람들이 연나라를 자주 공격하였기 때문에 연나라의 형세가 나날이 위급해졌다. 연나라 왕 풍홍(馮弘)이 말하였다.
“만일 사태가 위급하면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에 잠시 의존하며, 미래를 위한 대책과 방법을 세우겠다.”
비밀리에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우리나라에 보내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


79.
서기 436년, 고구려 장수왕,
연나라왕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자제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병사를 동원하여 연나라를 침입하기 직전에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름 4월, 위나라가 연나라의 백낭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임금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에게 병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 사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에 가서 연나라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연나라의 성에 들어가, 병사들에게 헌 옷을 벗게 하고, 연나라의 무기고에 있는 정교한 의장을 내주어 입게 하였다. 그들은 대규모로 성을 약탈하였다.

5월, 연나라왕이 용성(龍城)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이주하도록 하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동하는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행렬의 안쪽에 서게 하고, 양이 등은 병사를 거느리고 행렬의 바깥 쪽에 서게 하였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행렬의 끝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몰아 진군하였다.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위나라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고구려에 보내 연나라왕을 위나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임금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에게 편지를 바치면서, 연나라왕 풍홍과 함께 위나라왕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하였다. 위나라왕은 임금이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는 농우(隴右) 지방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으나, 유혈(劉絜)ㆍ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반대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80.
서기 472년, 백제 개로왕, 북위에 고구려 협공을 제의, 북위가 거절하며 외교관계 단절

81.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한성 함락, 백제 웅진 천도

82.
서기 488년, 백제 동성왕, 북위의 백제 침략, 백제의 대승(삼국사기, 자치통감)

83.
서기 490년, 백제 동성왕, 북위의 백제 재침, 백제의 대승(남제서)

84.
서기 494년, 부여, 물길의 침입을 받고 완전히 멸망, 고구려(문자왕)에 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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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06-16 13:43
   
# 4세기 말, 전진, 후연 등에서 활동한 부여계 인물
ㅡ 여울, 여화, 여숭, 여암 등(부여 계 인물들은 346년 모용선비 전연의 부여 침공 시에 끌려간 부여왕 여현과 포로 5만여 명의 후손들로 전진, 전연, 후연, 북연, 남연 등에서 두루 활약함)
감방친구 18-06-16 13:44
   
요서 백제 관련 사서 기록
감방친구 작성일 : 18-06-09 04:06 조회 : 889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73209&sca=&sfl=mb_id%2C1&stx=cellmate
감방친구 18-06-16 13:45
   
모용선비의 도읍변천

     
감방친구 18-06-17 00:05
   
고구려 도읍 변천

A 동명성왕
ㅡ  졸본(卒本)/흘승골성(紇升骨城)/비류수(沸流水)

B 유리왕 22년 (서기 3)
ㅡ 국내성(國內城)/위나암성(尉那巖城)

C 산상왕 13년(서기 209)
ㅡ 환도성(丸都城)

D 동천왕 21년(서기 247)
ㅡ 평양성(平壤城)

E 고국원왕 12년(서기 342)
ㅡ 환도성(丸都城)

F 고국원왕 13년(서기 343)
ㅡ 평양 동쪽 황성(平壤東黃城)

G 장수왕 15년(서기 427)
ㅡ 평양성(平壤城)

H 평원왕 28년(서기 586)
ㅡ 장안성(長安城)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0396&sca=&sfl=mb_id%2C1&stx=cellmate&page=21
감방친구 18-06-16 13:47
   
#백제 동성왕의 이름

모대(牟大), 마모(摩牟)
<삼국사기>
말다(末多)
<일본서기>
감방친구 18-06-16 13:48
   
#백제 유민 난원경 묘지명

[唐故宣威將軍難元慶墓誌

 
君諱元慶 其先即黃帝之宗也 □餘之爾類焉. 昔伯仲枝分 位居東表. 兄弟□□ 爰國臣韓. 妙以治民之難 □□姓矣 □丘序舜典 所謂歷試諸難 卽其義也. □祖珇 仕遼任達率官 亦猶今宗正卿焉. 祖汗 入唐爲熊津州都督府長史□□中大夫、使持節支潯州諸軍事、守支潯州刺史 遷忠武將軍、行右衛翊府□郎將. 並仁明識遠 在政□□ □□詞宏 邦家共達. 君幼而聰敏 無所不精. 尋□游擊將軍、行檀州白□府右果毅、直中書省.
(중략)
以開元十八年六月廿八日 □於□州龍興縣之私第 春秋六十有一.
(중략)
乃爲銘曰:
(중략)
其一 達率騰華 遼陽鼎貴 德邁將軍 □□衝尉. 其二 氣蓋千古 譽重三韓. 子孫孝養 恭惟色難.
(하략)
http://contents.nahf.or.kr/id/NAHF.gg_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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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06-16 13:51
   
진나라(동진) 시대, 구려가 앞서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였다. 지금(당나라 당시)의 유성(현 조양)과 북평(현 노룡) 사이이다. 晉時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 今柳城北平之間
 <통전 185권 변방 동이 상>
감방친구 18-06-16 13:58
   
남조 사서에만 "약유요서"가 등장함을 들어서 위사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부여계 유민의 여울~여암 등의 활약을 백제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4세기 이래 남조와 활발히 교류하였으므로 백제의 사정에 밝았을 것은 자명, 이를 착각했다 보기 어렵다

또한 그 후대의 사서인 통전에서 보다 통전 구체적으로 지배지역까지 제시되는 것을 어찌 볼 것인가?
감방친구 18-06-16 14:01
   
3세기 난하 동쪽, 낙랑/대방 서쪽에 등장한 백제가
4세기 모용선비보다 앞서서 부여를 서쪽으로 몰아내고 그 직후 모용선비가 부여를 거의 멸망시킨다 (부여왕과 5만여 명의 포로)
그리고
5세기
북위와 외교라인을 개설해 고구려를 견제하려다 좌절한 뒤에
475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고
488, 490년에 북위로부터 대규모 침략을 받아 대승을 거둔다
감방친구 18-06-16 14:03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에 강병이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주와 연나라, 제나라, 노나라를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좀이 되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삼국사기 46권 열전 최치원 >

이는 최치원이 작성한, 신라가 중국에 보낸 외교문서에 적은 문구이다
최치원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감방친구 18-06-16 15:53
   
백제의 서기 3~5세기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선비족을 자세히 탐구할 필요가 응당 있다

한나라가 멸망하는 3세기 초까지
고구려와 싸운 한 요동ㆍ현도의 군병력 거개는
오환ㆍ선비 등 한나라 용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는 왕망 이후 이들 용병을 고용하여 장성 바깥의 수비를 맡겼기 때문이다

서진 역시 팔왕과 영가의 난 시절의 혼동 상이
이렇게 조성된 각지역 군벌들에 의해 발생하였다
이는 어쩌면 고용되었던 게르만 용병들에 의해 본진이 털리던 로마의 분열기와 비슷한 양상이다
감방친구 18-06-16 15:59
   
선비족은 초기에 그 일부가 고구려에 복속돼 있었고
신라, 백제, 심지어 일본열도까지 흘러간 것으로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가난한서민 18-06-1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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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06-16 17:27
   
백제가 요서에  진평군, 요서군 등 2군을 두었을 시기는
전연이 계로 천도하여 업을 거쳐, 후연이 돼 용성으로 돌아온 때인
348년 ~ 396년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통전은 이들 백제군이 노룡과 유성 사이에 있었다고 했다
     
감방친구 18-06-16 17:30
   
이 348 ~ 396 년간의 사실을 본문에서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ㅡㅡㅡㅡㅡㅡ

55.
서기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
봄 2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음,
가을 8월, 임금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김,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김,
11 월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입해)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궁궐 창고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물을 훔쳤으며,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운 뒤에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감

56.
서기 345년, 고구려 고국원왕,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에게 우리나라를 침공케 하여 남소(南蘇)를 무너뜨린 후 수비군을 남겨두고 돌아감

57.
서기 346년, 부여, 백제의 공격을 받은 뒤 서쪽으로 모용선비 영역 근처로 이동

58.
서기 346년, 모용황의 부여 공격(부여왕 현을 포함 5만여 명이 전연으로 끌려가고 사실상 부여 붕괴)

59.
서기 355년, 고구려 고국원왕, 모용선비와 화친, 모용선비는 고구려왕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함

60.
서기 366년, 백제 근초고왕, 가야 정벌, 마한의 실질 정복(전남권까지 지배력 확대)

61.
서기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 백제의 치양(雉壤) 침략(고구려와 백제의 사상 최초의 군사충돌)

62.
서기 369년, 백제 근초고왕, 왜왕에게 칠지도 하사

63.
서기 370년, 고구려 고국원왕,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격파, 모용선비 (연나라)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로 쫓겨 옴, 고구려가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냄

64.
서기 371년,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사살

65.
서기 371년, 백제 근초고왕, 한성으로 천도

66.
서기 372년, 백제 근초고왕, 동진과 교류

67.
서기 377년, 백제 근구수왕, 고구려 평양성 공격

68.
서기 385년, 고구려 고국양왕,
여름 6월, 임금이 병사 4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 왕 모용수(慕容垂)가 대방의 왕 모용좌(慕容佐)에게 용성(龍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모용좌는 우리 병사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우리 병사가 이들을 격파하였다.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 11월, 연나라의 모용농(慕容農)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요동과 현도 두 군을 회복하였다. 예전에 유주(幽州), 기주(冀州) 등지에서 다수의 유랑민이 우리에게 투항했었는데, 모용농이 범양(范陽)의 방연(龐淵)을 요동의 태수로 삼아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69.
391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임금이 병사를 보내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이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395)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광개토대왕비문>”


ㅡㅡㅡㅡㅡ
     
감방친구 18-06-16 17:38
   
백제는 이미 3세기부터 모용선비와 커넥션을 형성한 관계였다는 추정이 선다
감방친구 18-06-17 00:18
   
백제가 중국 대륙에 근거지를 둔 시기는 다음과 같다

ㅡ 3세기 : 낙랑군과 대방군의 서쪽에 위치,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 시 낙랑군 서쪽을 약탈하기도 했으며 대방군과는 혼인동맹을 맺었다(한편으로 부여는 공손씨 정권과 2세기 말 혼인동맹을 맺었다)

ㅡ 4세기 : 백제가 약유요서한 시기를 중국의 여러 사서는 진나라, 즉 동진 말기로 적고 있다 이 시기는 백제 근초고왕~근구수왕 시기이다

ㅡ 5세기 : 북위와 488 (삼국사기), 490 (남제서)에 이르는 두 차례의 대전쟁을 하였고 이 위치는 기존 요서가 아니라 산동지역이다
감방친구 18-06-17 00:24
   
서기 355년, 고구려 고국원왕, 모용선비와 화친, 모용선비는 고구려왕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함

서기 357년에 모용선비의 전연은 계(현 북경)에서 업(현 하북성 최남단 한단시)으로 천도를 한다

서기 370년, 고구려 고국원왕,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격파, 모용선비 (연나라)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로 쫓겨 옴, 고구려가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냄

서기 384년, 전진에 의해 전연이 멸망하면서 모용수에 의해 후연이 건국되고 현 북경과 한단시 중간지점인 현 정주시, 즉 중산에 도읍한다

서기 385년, 고구려 고국양왕,
여름 6월, 임금이 병사 4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 왕 모용수(慕容垂)가 대방의 왕 모용좌(慕容佐)에게 용성(龍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모용좌는 우리 병사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우리 병사가 이들을 격파하였다.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 11월, 연나라의 모용농(慕容農)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요동과 현도 두 군을 회복하였다. 예전에 유주(幽州), 기주(冀州) 등지에서 다수의 유랑민이 우리에게 투항했었는데, 모용농이 범양(范陽)의 방연(龐淵)을 요동의 태수로 삼아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감방친구 18-06-17 00:42
   
고구려와 백제의 최초의 군사충돌은 369년

서기 355년, 고구려 고국원왕, 모용선비와 화친, 모용선비는 고구려왕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했는데

영주는 현 조양에서 더 동쪽으로 움진인 적이 없으므로,
또한 낙랑공의 작위로 볼 때에
전연은 고구려의 대릉하~요하 지역의 지배권을 재신임 및 위임하면서 일족을 이끌고 하북성으로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후에 백제는 근초고왕에 의해 활발한 정복사업을 개시한다
369년 첫 군사충돌 이후 두 번이나 고구려 평양을 공략하고 고국원왕까지 전사시킨다

이를 우연의 일치라고 봐야 할까
369 군사충돌은 백제 건국 이후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사상 첫 교류이자 군사충돌이다

3세기와 4세기 초는 고구려의 계속적인 요동ㆍ현도ㆍ낙랑ㆍ대방 공격이 있었던 시기이고
이 시기에 백제는 낙랑ㆍ대방의 서쪽에 위치하며 우호관계를 맺고 특히 대방과는 혼인동맹까지 맺었다

낙랑ㆍ대방에게 그들의 서쪽에 있는 백제는 고구려의 대방 공격시 대방왕이 백제에 구원병을 요청한 것에서 보듯 고구려에 대항할 지원세력으로서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와의 직접적 충돌을 회피하며 교묘히 이득만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3세기에는 이미 선비족 제집단이 난하~대릉하 지역에 가득하게 내려와 있었다
     
감방친구 18-06-17 00:48
   
3세기에 백제ㅡ모용선비 커넥션은 이미 형성돼 있었다

본인은 이미 십수 년 전부터 독자적으로 소위 요서백제의 성격이 조선과 일본 사이의 대마도와 같은 성격이라고 추정해 왔다

즉 모용선비~남조에 행정적으로 속해 있으면서도 구성원 자체는 백제인민이며 또한 실질적으로는 백제에 속하였다는 말이다

또한 이들은 점차 군사적으로 남조를 압도하면서 형식적으로는 을, 실제적으로는 갑이었다고 판단되며 과거 신ㆍ후한~서진이 군사실무를 오환ㆍ선비를 고용하여 맡긴 것과 같이

모용선비 및 후일의 남조 역시 백제를 그렇게 활용했던 것이다

서진이 요동까지 영토로 삼았던 것처럼 겉으로는 보이나
실제적으로는 노룡을 넘지 못 했고 노룡 동쪽은 선비족들이 차지했던 것처럼
     
감방친구 18-06-17 00:52
   
서기 385년, 고구려 고국양왕,
여름 6월, 임금이 병사 4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 왕 모용수(慕容垂)가 대방의 왕 모용좌(慕容佐)에게 용성(龍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ㅡㅡㅡ 이 기사에서 보이듯 385에 후연은 대방왕 모용좌로 하여금 용성을 수비하게 하고 있었다 용성을 현 조양 일대로 본다면 통전에서 백제의 요서ㆍ진평 2군의 위치가 노룡~유성이었다고 한 것과 일치한다
감방친구 18-06-17 02:37
   
247 동천왕의 평양은 현 평양일 가능성이 높다
이 평양은 임시수도로서의 성격이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위구르 18-06-23 18:19
   
태조대왕대에 한나라에게 대패했다니. 몰랐던 사실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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