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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1-04 13:16
[한국사] 영주(營州)와 고구려 서계(西界) 추적 09 - 2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398  

(앞의 글에서 이어집니다)



바. 수서 지리지 기주


1) 북평군(北平郡).


옛날(북위)에 평주에 설치했었다. 다스리는 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2,269이다.



2) 노룡현(盧龍縣)


옛날(북위)에는 북평군(北平郡)을 두었었는데 신창현(新昌)과 조선현(朝鮮) 등 2개의 현을 다스렸다.


북제(北齊)에서는 조선현을 없애고 신창현으로 편입시켰고 또한 요서군의 해양현을 없애고 비여현(肥如)으로 편입시켰다.


개황(開皇) 6년에 또한 비여현(肥如)을 없애고 신창현(新昌)으로 편입시켰다가 18년에 이름을 노룡현(盧龍)으로 바꾸었다.


대업(大業) 초에 북평군(北平郡)을 설치하였다.


장성(長城)이 있다. 관관(闗官)이 있다. 임유궁(臨渝宮)이 있다. 복주산(覆舟山)이 있다. 갈석(碣石)이 있다. 현수(玄水)로수(盧水)와 열수(湼水) 윤수(閏水)와 룡선수(龍鮮水)와 신량수(臣梁水)가 있다. 바다가 있다


# 15 수서 지리지 기주 북평군에 기술된 지리 정보를 한서 지리지부터 역대 사서 지리 정보와 비교, 대조하면 수나라 때의 북평군은 한서 지리지가 기술한 한나라 때의 해양현 지역과 영지현, 비여현 지역의 지리 정보만을 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수와 로수는 전한의 영지와 비여의 동북쪽에서 유수, 즉 현 난하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반면에 룡선수는 전한의 해양현에 있던 하천이다. 전한 시대 해양현의 위치에서 중요한 것이 한서 지리지에도 기술된 바 있는 염관(鹽官)이다. 아래의 신/구당서부터 독사방여기요에 이르는 역대 사서의 교차 정리 자료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소금을 채취하는 염관은 현 난하 서남쪽, 즉 석성현(수당 임유현) 영역에서 나타난다. 즉 전한 시대 해양현의 지리정보와 일치하는 것이다(염관, 룡선수)


# 16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수나라 북평군은 난하 서쪽 지역과 현 노룡현 지역을 다스린 게 다라는 말이다.




사. 신/구당서/통전/태평환우기/무경총요/요사/독사방여기요 교차



1) 평주 북평군


수 개황 초(수 문제, 581~ )에 우북평군으로 삼았다가 10년(수 문제, 590년)에 평주로 고쳤다. 양제가 즉위(604년)하자 다시 주를 폐지하고 군으로 삼았다. ㅡ 태



처음에 임유(臨渝)에서 다스리다가 무덕(武德) 원년(당 고조, 618년)에 노룡(盧龍)으로 옮겨 다스렸다. ㅡ 신


무덕(武徳) 2년(당 고조, 619년)에 평주(平州)로 고쳤고 임유현(臨渝)과 비여현(肥如)을 다스렸다. 이 해에 치소를 임유현(臨渝)에서 비여현(肥如)으로 옮겼고, 노룡현(盧龍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무녕현(撫寧縣)으로 고쳐 설치하였다. ㅡ 구


당 무덕 2년(당 고조, 619년)에 군을 폐지하고 평주로 삼았으며 임유현과 비여현 등 2개의 현을 거느렸다. 그 해에 치소를 임유현에서 비여현으로 옮겼으며 비여현을 노룡현으로 삼았다가 무령현으로 바꿔 다스렸다.  ㅡ 태


7년(624년)에 임유현(臨渝)과 무녕현(撫寧)을 없앴고 북평군(北平郡)으로 고쳤다. ㅡ 구


무덕 7년(당 고조, 624년)에 임유현과 무령현 등 2개 현을 없앴다. ㅡ 태


천보 원년(당 현종, 742년)에 북평군으로 고쳤다. ㅡ 태


건원(乾元) 원년(당 숙종, 758년)에 다시 평주(平州)라고 하였다. ㅡ 구


건원 원년(당 숙종, 758년)에 다시 평주로 삼았다 ㅡ 태


가구수는 3113이고 인구수는 2,5086명이다. 현은 3개이다. ㅡ 신


옛날에 다스리던 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603이며 인구수는 2542명이며 천보 년간(당 현종, 742~756년)에는 다스리는 현이 3개이고 가구수는 3,123이며 인구수는 25,086명이다. 경사에서 동북으로 2,650리 떨어져있고 동도까지는 1,900리이다. ㅡ 구


온구(温溝)와 백망(白望)과 서협석(西狹石)과 동협석(東狹石)과 록주(緑疇)와 미부(米磗)와 장양(長楊)과 황화(黄花)와 자몽(紫蒙)과 백랑(白狼)과 창려(昌黎)과 요서(遼西) 등의 12 수(戍)가 있다. 애천(愛川)과 주기(周夔) 등의 2개의 진성(鎮城)이 있다. 동북쪽에는 명질관(明垤闗)과 골호성(鶻湖城)과 우모성(牛毛城)이 있다. ㅡ 신



2) 노룡현


본래 비여현(肥如)인데 무덕(武德) 2년(당 고조, 619년)에 이름을 바꾸었다. 또한 무녕현(撫寧縣)을 설치했었는데 7년(624년)에 없앴다. ㅡ 신


후한(後漢)의 비여현(肥如縣)으로 요서군(遼西郡)에 속했으며 수(隋)에 이르기까지 고치지 아니하였다. 무덕(武徳) 2년(당 고조, 619년)에 노룡현(盧龍縣)으로 고쳤는데 개황(開皇) 년간(수 문제, 581~600년)의 옛 이름으로 되돌린 것이다. ㅡ 구


본래 한의 비여현이다. 당 무덕 3년에 임유현을 없애고 평주를 이곳으로 옮겨 설치했(평주 치소를 옮겼다는 뜻)으며 (그 해에) 비여현의 이름을 노룡현으로 바꿨다. 수 개황 년간의 옛 이름으로 되돌린 것이다 ㅡ 태


비여성이 영평부(노룡현 신창성) 서북쪽 30 리에 있다. 수 개황 6년에 비여현을 없애고 신창현에 통합시킨 후에 그 이름을 노룡현으로 고쳐 불렀다. 당나라 초기에 비여현의 이름을 되살려 부르다가 다시 노룡현으로 고쳤다. ㅡ 독


람산(藍山)이 있다. 갈석산이 노룡현 남쪽 23 리에 있다. 임여산이 있는데 본래 임유산으로 (유)가 여가 된 것이다. 관(關)이 있는데 오랑캐 지역으로 통하는 문으로 노룡현 동쪽 180 리에 있다. 신부산이 있다. 로수(盧水)가 있는데 일명 대저수로 지금은 소유수(小濡水)로 불리며 영주 유성현 계에서 유입된다. 황락수, 황락성, 소하수, 노룡도, 조선성 등이 있다 (생략) ㅡ 태


명질관이 구당서(?) 지리지에서 말하길 (노룡현) 북쪽/(무령현) 북쪽에 있다고 했다. 당회요에서 말하길 평주에 명질관이 있는데 임유관과 더불어 나란히 험한 곳의 요충지라고 했다. 지금은 명질관으로 가는 길이 풀숲이 우거지고 막혀서 유관이 동쪽면의 방비를 독담당 하고 있다. ㅡ 독


# 17 노룡현의 지리정보는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평주, 또는 북평군에 속현이 노룡현 1개일 때의 지리정보와 여러 현이 있었을 때에 노룡현 영역에만 해당하는 지리정보가 혼재하는 양상을 띤다. 따라서 매우 엄밀하고도 예민하게 그것을 가려야 한다. 수나라 때와 당나라 때 둘 다 속현이 노룡현 1 개일 때가 있었다. 속현이 노룡현 1 개일 때는 북평군, 또는 평주가 관할하는(그것이 실제든 아니든) 지역의 지리정보가 모두 노룡현 지리정보로 기술된다



3) 석성현(石城縣)


본래 임유현(臨渝)인데 무덕(武德) 7년(624년)에 없앴다. 정관(貞觀) 15년(당 태종, 641년)에 다시 설치하였다가 만세통천(萬嵗通天) 2년(측천무후, 697년)에 이름을 바꾸었다. ㅡ 신


한(漢)의 현이고 우북평군에 속했다.

정관(貞觀) 15년(당 태종, 641년)에 옛 임유현성(臨渝縣城)에다 임유현(臨渝)을 설치하였다. 만세통천(萬嵗通天) 2년(측천무후, 697년)에 석성현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옛 이름을 취한 것이다. (한나라 때 우북평군에 속했던 석성현의 예에서 이름을 취했다는 말)  ㅡ 구


석성현은 노룡현 서쪽 140리에 있다.

한나라의 옛 현으로 갈석산이 성처럼 서 있는 모습에서 그 이름을 취했는데 우북평군에 속했다.

당 정관 15년에 옛 임유현성에 임유현을 설치했다. 만세통천 2년에 이름을 석성현으로 고쳤다. ㅡ 태평환우기


난주는 의풍현에서 다스린다. 동북쪽에 난하가 있고, 서쪽으로 석성현까지 90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210리, 북쪽으로 평주(노룡현)까지 40 리이다. ㅡ 무


난주는 영평부(노룡현 신창성)에서 남쪽 40 리에 있다. 동쪽으로 산해관까지 170 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110 리, 서북쪽으로 순천부 계주까지 320 리이다 의풍폐현이 지금의 주 치소이다 석성폐현이 주(난주, 의풍현) 남쪽 80 리에 있다. ㅡ 독


임유관(臨渝闗)이 있는데 또한 임여관(臨閭闗)이라고도 한다. 대해관(大海闗)이 있다. 갈석산(碣石山)이 있다. 온창진(温昌鎮)이 있다. ㅡ 신  


갈석산이 있다. ㅡ 태


난주 동남쪽에 역시 대염백(염백은 소금을 채취할 수 있는 소금 호수, 즉 염호를 뜻한다)과 소염백이 있으며 그 남쪽이 송나라의 경계와 접한다. ㅡ 무


원래 옛 황락성인데 난하(灤河)가 고리처럼 두르고 있으며 노룡산(盧龍山) 남쪽에 있다. 진(秦)에서는 우북평군(右北平)이 되었다. 한(漢)에서는 석성현(石城縣)으로 삼았는데 후에 이름을 해양현(海陽縣)이라고 하였다. 한(漢) 말기에 공손도(公孫度)가 가졌던 곳이다. 진(晉) 이후로는 요서(遼西)에 속했다. 임유산(臨榆山)이 있는데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높이가 천여 길이나 되고 아래에는 임유하(臨榆河)가 있다. 현은 2개이다. ㅡ 요


의풍현(義豐縣 : 난주 치소가 있는 곳)은 본래 옛 황락성(黄洛城)이다. 황락수(黄洛水)가 노룡산(盧龍山)을 북쪽으로 나가 흐르다가 남쪽으로 흘러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한(漢)에서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는데 오래전에 폐하였다. 당(唐) 말기에 거란(契丹)에 편입되었고, 세종(世宗)이 현을 설치하였다. ㅡ 요


석성현(石城縣). 한(漢)이 설치하여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소속시켰는데 오래전에 폐하였다. 당(唐) 정관(貞觀) 년간에 이곳에 임유현(臨榆縣)을 설치하였고, 만세통천(萬歳通天) 원년에 석성현(石城縣)으로 바꾸었다. 난주(灤州) 남쪽 30리에 있다. 당(唐) 의봉(儀鳳) 년간에 새긴 비석이 있다. 지금의 현은 또한 그 남쪽 50리에 있는데 요(遼)에서 옮겨 설치하여 취염관(就鹽官)으로 하였다. ㅡ 요


요사 지리지에서 난주 남쪽 80 리에 있는 석성현에 취염관을 설치했다고 했는데 이곳은 현재 개평중둔위 자리로 생각된다. 즉 요나라의 옛 (석성)현 치소이다.  ㅡ 독


온천책이 폐지된 석성현 동북쪽에 있다. 옛날에 둔영(수수 戍守)으로 삼았던 곳이다. 당나라 광덕 초에 사조의가 패배한 후 해와 거란 지역으로 달아나고자 온천책에 이르렀을 때 추격병이 그곳에 다급히 닥치자 스스로 목을 매서 죽은 곳이다. ㅡ 독


당나라가 임유현을 설치했는데 훗날 석성현으로 고쳤다. 원나라에서 관청(마을)을 두었다. 옛성이 지금 란현 서남쪽에 있다. ㅡ 중국고금지명대사전


# 18 우리는 지금 수나라 임유현의 위치를 찾고 있다. 수나라 임유현 자리에 임유관이 있었고, 여기에서 수나라 군대가 598년과 612년에 고구려 대원정을 출진하였다. 물론 역사가 기술한대로 대패배를 당하고 수나라는 쫄딱 망했다. 전한 시대 임유현의 위치가 어디었느냐는 이 추적에서 중요하지 않다. 당나라 석성현은 당나라 임유현이며 당나라 임유현은 624 년에 폐지한 임유현 자리에 641 년에 재설치했으며, 624 년에 폐지하기 전의 임유현은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선 518~519 년간에 북평군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며, 그 치소를 당나라 임유현에서 비여현으로 옮겼고, 그 비여현을 수나라 때의 이름인 노룡현으로 고쳤다고 사서들은 분명히 적고 있다


# 19 당나라 임유현이자 수나라 임유현인, 노룡현 서쪽 140 리에 현성이 위치한 석성현에는 임유관이 있고, 갈석산이 있고, 온창진이 있다고 신당서 지리지는 적고 있다. 태평환우기도 이 석성현에 갈석산이 있다고 적고 있다. 당나라 8세기 인물인 두우 역시 통전을 쓰며 갈석산이 좌갈석과 우갈석 등으로 2 개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 20 온창진이 또 중요한데 신당서 지리지는 평주 기술조에서 온구(温溝)가 있다고 적었고, 석성현 기술조에서는 온창진(温昌鎮)이 있다고 적었다. 그런데 후대의 사서인 독사방여기요 북직 8에서는 폐석성현(당나라 시기 석성현 치소 위치에서 훨썬 남서쪽) 동북쪽에 온천책이 있다(溫泉柵在廢石城縣東北,舊為戍守處。)고 적고 있다.



4) 마성현(馬城縣)


옛 해양성(海陽城)이다. 개원(開元) 28년(당 현종, 740년)에 설치하여 물로 운반하는 것을 통하게 하였다. ㅡ 신


개원(開元) 28년(당 현종, 740년)에 노룡(盧龍) 등 2개의 현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ㅡ 구


마성현은 노룡현 남쪽 172 리에 있다.

당 개원 28년에 노룡현을 쪼개어 설치했다. ㅡ 태


원래 노룡현(盧龍縣) 땅이다. 당(唐) 개원(開元) 28년에 쪼개어 현을 설치하여 물길로 운반이 가능하도록 했다. ㅡ 요


천김야성(千金冶城)이 있고 동쪽에는 무향진성(茂鄉鎮城)이 있다. ㅡ 신


동북쪽에는 천금야(千金冶)가 있고, 동쪽에는 무향진(茂鄉鎮)이 있다. 요(遼)에서 나누어 난주(灤州)에 예속시켰다. 난주(의풍현)의 서남쪽 40리에 있다. ㅡ 요


해양성이 영평부(노룡현ㅡ신창성) 남쪽 30 리에 있다. 한나라가 해양현을 설치하고 요서군에 속하게 했다. 한 고조가 공신 요부여(?)를 해양후로 봉했는데 즉 이곳이다. 후한 역시 해양현이라 했다. 위토지기에서 영지성 남쪽 60 리에 해양성이 있다고 했다. 진(晉)과 북위가 요서군에 속하게 했다. 북제가 군을 폐하고 또 해양현을 비여현에 통합시켰다. 신당서에서 마성현은 옛 해양성이라 한 것은 오류이다. ㅡ 독


마성폐현이 난주 서남쪽 40 리에 있다. 한나라 석양현으로 철관(鐵官)이 있으며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이 폐지했다. 수나라 노룡현 땅이(되었)다. ㅡ 중략 ㅡ 신당서에서 옛 해양현을 마성현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석양현을 (해양현으로 오해해서) 그릇되게 덮어씌운 것이다. ㅡ 독


천금야가 폐지된 마성현 동북쪽에 있는데 옛날에 철을 제련하던 곳이다. 한서 지리지에서 (우북평군) 석양현에 철관이 있다고 했다. 신당서에서는 마성현에 천금야가 있다고 했다. 명승지에서는 천금야가 난주 남쪽 20 리에 읺다고 했으니 즉 옛 석양현에 있던 철관이다. ㅡ 독




아. 갈석


# 21 갈석을 표제어로서 삼은 심층 분석, 즉 갈석고는 이번 영주와 고구려 서계 추적에서 별도의 게시글을 통하여 다루겠으나 임유현과 임유관 추적에 맞물려 간단히 언급함으로써 수나라 임유관 추적의 매듭내지 이정표를 짓고 가고자 한다.


1) 통전


상서에서 갈석을 오른쪽으로 돌아(끼고) 황하로 들어온다고 했는데 즉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에 다다른 곳으로 지금(8세기, 두우 당시) 북평군(노룡현) 남쪽 20 여 리에 있고 즉 (옛) 고구려 땅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按尚書云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髙麗中為左碣石


# 22 통전은 보면 볼수록 엉터리에 억지가 난무하는 사서이다. 당나라가 내우외환으로 위축되는 상황에서, 더구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도 고구려땅을 경영하기는 커녕 모조리 잃고 그 와중에 거란도 날뛰고, 고구려 유민들은 발해를 건국하여 당나라의 등주까지 공격하여 점령하는 상황에서, 더구나 두우 당시 당나라의 영주는 평주에 있었다(이는 후에 다룰 것이다), 중화주의자 두우의 홧병에, 중국인 특유의 개돼지 심뽀가 발동해서 편찬한 것이 두우의 통전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두우야, 황하가 이 새끼야, 언제 평주 지역까지 흘렀냐? 어?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던 곳은 현 천진시인데 이 새끼야!


# 23 아무튼 두우 당시에도 갈석이 두 곳, 또는 여러곳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고구려 서쪽 국경, 즉 고구려 영토의 서부에 갈석산이 있었다는 인식을 역시 가지고 있었다 하는 증거가 이른 바 두우의 좌갈석이다.


2) 독사방여기요 북직1


신당서 지리지에서 평주에 동협석과 서협석의 2 수가 있다고 했는데 협석은 곧 갈석을 잘못 이른 것이다.


《唐志》:平州有東、西硤石二戍。硤石即碣石之訛也。


# 24 본인은 가탐 도리기 제 2도의 항로와 그 경유지를 교차 분석에 의하여 심층 고찰하여 그것을 논증하였고, 이를 토대로 가탐 2도 상의 압록강이 현 요하~동요하인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 항로가 연안을 시계 방향으로 따라 도는 항로라는 것을 밝혔다. 이에 이를 당 태종의 고구려 침략상 속에서 재차 검층하는 과정에서 2차 침략의 전장지, 또는 침략지 가운데 하나가 가탐 2도 상에 등장하는 오호도의 수장 고신감이 고구려군과 전투를 버린 역산이었고, 이 역산이 갈석산이라는 것을 고증하기에 이르렀다. 본인은 처음 산동 무체현의 갈석산을 오호도 고신감의 그 역산, 고구려 서쪽 경계의 그 역산으로 비정했으나 무리가 따라서 진황도 갈석으로 추정을 수정하였고 신당서 지리지 평주에서 기술된 동협석과 서협석이 실상은 갈석산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추론에까지 도달하였다.


이러던 차에 이번 영주와 고구려 서계를 집중 추적하면서 사서를 다시금 상세히 독술하게 되어 독사방여기요의 고조우 역시 본인과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갈석을 기술하고 있는 대목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상기에서 갈석산이 한나라 당시 우북평군 려성현과 요서군 루현, 이렇게 두 곳에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후한 시대에 이르러 요서군과 우북평군이 축소되면서 임유현이 루현을 흡수하고, 요서군이 우북평군의 동부지역을 파고들면서 려성현이 임유현에 흠수된 상황을 파악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고구려 서쪽 경계에 있던 역산이자 두우가 말한 좌갈석은 실상은 두우가 우갈석이라 말한 진황도 창려현 갈석이며, 우갈석, 즉 한나라 우북평군 려성현에 있던 갈석이자 신당서와 태평환우기에서 석성현에 있다는 갈석은 현 당산시 동북쪽에 위치한 산자락이다.




자. 수 임유관 추적의 마무리


수나라는 40 년이 못 되어서 망했다. 당나라의 동북지역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직후부터 골치를 썩이기 시작하여 8세기에 들어서면 거란을 간접 통치하는 방식으로 겨우 건사를 하고 있었고, 9세기 들어서면 점차 거란의 영역으로 고착된다.


수나라 당시의 평주 지역의 실상을 독사방여기요 북직 8 영평부 연혁 서술 중의 한 대목으로 설명을 대신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선비족이 다투어 일어나니 노룡의 사방이 모두 전장이 되었고 중국의 말과 가르침이 영주와 평주에 다시 도달하지 못 하길 수백 년이 되었다. 수나라가 비록 주현을 설치하였으나 황폐하게 두고 다시 경영하지 못했다.


及鮮卑競起,盧龍四境皆為戰地,中國聲教不復達平、營者數百年。隋雖置州縣,而荒略未改。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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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11-04 13:40
 
<수ㆍ당 평주 북평군 연혁 >
ㅡ 군보다 주가 더 큰 행정단위이다
ㅡ 주에서 군으로 축소되는 것은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내지 지배력의 축소, 또는 가치 하락으로 인한 것이다
ㅡ 군에서 주로 확증되는 것은 그 반대이거나 그 지역에 대한 행정적 장악력내지 지배력 확대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ㅡ 현이 폐지되는 것은 영토 축소를 의미한다
ㅡ 인근 현에 흡수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ㅡ 해당 지역에서의 실질 영역내지 지배력은 속현의 수와 인구수에 비례한다


북제(北齊, 550~577 년)에서 조선현을 없애고 신창현으로 편입시켰고 또한 요서군의 해양현을 없애고 비여현(肥如)으로 편입시킴

수 개황 초, 즉 수나라가 건국하며 (우)북평군으로 삼음

586 년, 비여현을 없애고 신창현으로 편입시킴

590 년, 북평군을 폐지하고 평주 설치

598 년, 신창현의 이름을 노룡현으로 개명

604 년, 수 양제가 즉위하며 평주를 폐지하고 북평군 다시 설치

618 년, 당나라가 건국하며 임유현에서 비여현으로 치소를 옮김

또는

619 년, 당나라 건국 이듬해에 북평군을 폐지하고 평주를 다시 설치하면서 임유현에 있던 치소를 비여현으로 옮겼고 임유현과 비여현 총 2 개 현을 다스림

619 년, 비여현을 노룡현으로 개명하고 곧 이어 무령현으로 개명함 즉 평주 소속현 2 개 현
(또는 비여현을 노룡현으로 개명하고, 무령현을 더 설치하여 3 개 현을 거느림)

624 년, 임유현과 무령현을 폐지하고 평주를 북평군으로 다시 변경
(소속현은 노룡현 1 개)

641 년(당 태종 정관 15 년), 임유현을 재설치

697 년(측전무후 만세통천 2 년), 임유현을 석성현으로 개명

740 년, 노룡현을 쪼개서, 혹은 기존의 2 개 현(노룡현, 석성현)을 쪼개서 마성현 설치

742 년, 평주를 폐지하고 북평군 재설치

758 년, 북평군 폐지하고 평주 재설치
감방친구 18-11-04 23:35
 
감방친구 18-11-04 23:43
 
수나라 북평군은 현 난하인 유수로 동북쪽에서 흘러드는 로수와 현수가 있던 서한 시대 비여현 지역과 서한 시대 난하 서쪽, 바닷가에 있으면서 봉대수, 룡선수 등이 있던 서한시대 해양현 지역, 그리고 서한 시대 우북평군 려성현이었던, 해양현 북서쪽, 현 당산시 동북쪽 산자락이 있는 지역만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방친구 18-11-05 00:27
 
수서 지리지 중국역사서데이타베이스 상에는

"有臨渝宮。有覆舟山。有碣石。有玄水、盧水、溫水、閏水、龍鮮水、巨梁水。有海。"

라고 돼 있다

다시 쓰는 유기 수록 판에는

"장성(長城)이 있다. 관관(闗官)이 있다. 임유궁(臨渝宮)이 있다. 복주산(覆舟山)이 있다. 갈석(碣石)이 있다. 현수(玄水)와 로수(盧水)와 열수(湼水) 윤수(閏水)와 룡선수(龍鮮水)와 신량수(臣梁水)가 있다. 바다가 있다"

고 돼 있다
     
감방친구 18-11-05 00:36
 
복주산은 북위 때에 양락현에 있었다고 위서 지형지는 적고 있는데 북위 때의 저술인 수경주는 역시 북위 때의 저술인 위 토지기를 인용하여 양락현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북위 시대 저술인 수경주의 기록을 보면 “위 토지기에 따르면 해양성 서남쪽에 양락성이 있다 《魏土地記》曰:海陽城西南有陽樂城。”, “위 토지기에 따르면 영지성 남쪽 60리에 해양성이 있다 《魏土地記》曰:令支城南六十里有海陽城者也。”고 적고 있다. >

북위 때는 전한 시대의 해양현이 현 진황도시 창려현, 무령현이 있는 지역으로 교치된 상황으로 전한 시대와 달리 난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위 시대 양락현은 요나라 시대 난주(당나라 석성현, 마성현) 지역과 현 노룡현 일부를 포함한 영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방친구 18-11-05 00:38
 
현수와 로수는 비여현 동북쪽에서 유수, 즉 현 난하로 흘러드는 큰 지류이다
     
감방친구 18-11-05 00:41
 
룡선수는 전한 시대 해양현에 있던 하천이다
전한 시대 해양현은
위에 링크로 제시한 중국역사시도집 전한시대 요서군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현 난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감방친구 18-11-05 00:50
 
중국고서데이타베이스에는 온수溫水라고 돼 있고 다시 쓰는 유기 판에서는 열수湼水 라고 돼 있다 한자는 다르지만 뜻은 같은 것으로 이 하천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독사방여기요에서 말한 온천책, 신당서에서 말한 온구, 온창진과 밀접한 것으로 조사의가 목을 매 죽은 곳 근처임에 틀림이 없다

독사방여기요에서 난주 남쪽 80리, 폐지된 석성현 동북쪽에 있다고 했다 이 온천책은 수수, 즉 둔영/병영을 두었었다 하니 신당서의 온창진과 통한다

독사방여기요의 온천책도 난하 서쪽 석성현 지역, 신당서의 온창진도 난하 서쪽 석성현 지역에 있었다고 기술돼 있다
     
감방친구 18-11-05 01:03
 
신량수의 경우 중국데이타베이스 원문에는 거량수로 돼 있다
거량수는 바이두백과, 고금지명사전, 여러 사서에서 찾을 수 없었고

다만 독사방여기요 북직 2 순천부(현 북경) 기술조에서
고량하/고량수를 찾을 수 있었을 뿐이다

高梁河在府城西。自昌平州沙澗,東南流經高梁店,又東南流入都城積水潭。宋太宗伐遼,與遼將耶律沙等戰於高梁河。是也。金人亦謂之皂河,上有高梁橋。蒙古兵入居庸,至皂河,欲度高梁橋,為金將胡沙虎所敗。《水經注》:高梁水至潞縣注于潞河。今大通河,蓋即高梁河下流也。
     
감방친구 18-11-05 01:06
 
거량수(신량수)와 윤수의 경우

전한 시대 해양현(현 난하 서쪽)에 룡선수(龍鮮水), 봉대수(封大水), 완허수(緩虚水)가 있었으므로 봉대수와 완허수 등과 연관 있을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감방친구 18-11-05 03:45
 
     
감방친구 18-11-05 03:50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북위 평주 요서군의 해양현을 전한 시대와 마찬가지로 난하 서쪽에 위치 시키고 있다

그러나
수경주에서는
해양성(해양현의 현성)이 영지성 남쪽 60 리에 있다고 적고 있으며

“위 토지기에 따르면 영지성 남쪽 60리에 해양성이 있다 《魏土地記》曰:令支城南六十里有海陽城者也。”

양락현은 중국역사지도집의 표시와 달리
해양성 서남쪽에 있다고 적고 있다

 “위 토지기에 따르면 해양성 서남쪽에 양락성이 있다 《魏土地記》曰:海陽城西南有陽樂城。”
또한 현 난하인 유수가 해양현의 서쪽을 거쳐 남쪽의 바다로 들어간다고 적고 있다

북위 시대에는 해양현이 난하 동쪽으로 옮겨가 내륙 방향으로 쪼글아든 것이다

북위 시대, 6세기 초의 기술인 수경주에서는 현 난하에 해당하는 유수(濡水)가 “동남쪽으로 해양현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又東南過海陽縣西,南入于海。)”고 적고 있다.
     
감방친구 18-11-05 04:01
 
중국역사지도집은 북위 때의 북평군 신창현성을 현 노룡현에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독사방여기요의 기술을 따른 것으로 사실에 부합하지 않다

신창현과 조선현은 비여현에 기치하여 만든 것으로 지도상에 표시된 비여현의 북쪽에 붙여 조선현, 북서쪽에 붙여 신창현을 표시해야 옳다

또한 북위 때는 영지를 비여현과 양락현이 나누어 가지며 요서군을 형성하였으므로 지도상의 위치가 아니라 신창으로 표시된 현 노룡현 서북 인근에 위치시켜야 옳다

또한 비여현에 북평군(신창현, 조선현)을 설치하고 영지를 양락현과 나누어 비여현을 다시 설치했으므로 요서군 비여현은 지도상의 표시보다 남쪽에 또 표시해 두어야 한다

즉 비여현을 2 곳 표시해야 한다

또한 위서 지형지에서는 요서군 양락현에 복주산이 있다고 분명히 적고 있는데 중국역사지도집 상에서는 양락현을 현 무령현에 표시해 두고 난하 서쪽, 영지성 인근에 복주산을 표시해 두고 있다

즉 전혀 사실에 맞지가 않다

즉 실상은 북위 때의 양락현이 수나라와 당나라 임유현이 되고, 다시 당나라 석성현이 된 것이다
감방친구 18-11-05 04:05
 
전한 우북평군 려성현 갈석산, 수당 임유현 및 당나라 석성현 갈석산

구예 구
중국 허베이 성 탕산 시
https://goo.gl/maps/PT9HYt7XU8y

전한 요서군 루현 갈석산, 후한 요서군 임유현 갈석산

Jie Shi Shan Feng Jing Qu
중국 허베이 성 친황다오 시 창리 현 邮政编码: 066600
https://goo.gl/maps/4EnJF6sxwxt
감방친구 18-11-05 04:13
 
수나라 북평군은
난하의 지류인 청룡하(青龙河)와 난하를 경계로
그 서쪽에 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수나라 북평군은 애초에 북위 북평군 지역에 설치된 것이다 요서군이 아니라)

즉 청룡하 동쪽, 난하 동쪽은 수나라 땅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현 노룡현은 수나라 북평군 노룡현이 아니다
수나라 노룡현은 여기에서 더 북쪽, 청룡하 너머로
전한 시대 비여성이 있던 곳에 있었다

청룡하

青龙河

Qinglonghe East Branch Bridge
G1 Jingha Expy, Lulong Xian, Qinhuangdao Shi, Hebei Sheng, 중국
https://goo.gl/maps/GwFwoyrVMeo



중국역사지도집 전한(서한) 지도에서 표시한 비여성 위치
ㅡ 실상은 이 일대에 북위 북평군과 수나라 노룡현이 있었다

Yanggezhuangzhen
중국 허베이 성 탕산 시 첸안 시
https://goo.gl/maps/vsKbyyGs2dQ2


중국역사지도집 서한 요서군 지도의 비여성 위치

http://blog.naver.com/storyphoto/viewer.jsp?src=https%3A%2F%2Fblogfiles.pstatic.net%2F20111017_60%2Fjhy8365_1318854736574zVkpu_JPEG%2F18.jpg
감방친구 18-11-06 04:39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 임유현, 즉 624 년 이전 임유현이 현 진황도시 무령현ㅡ창려현에 있었고 641 년 당 태종이 다시 설치한 임유현은 난하 서쪽에 설치된 것일 가능성은 이미 논증하여 다루었다

1. 당 태종 641 년 임유현은 분명히 '옛 임유현 자리에 설치'했다고 사서들은 적고 있다
ㅡ 즉 후한 임유현이 현 무령ㅡ창려현에 있었다 하더라도 옛 임유현 자리에 설치한 임유현이 난하 서쪽에 위치했으므로 그 '옛 임유현'은 후한 때의 임유현이 아니라 북위~수~당 624 년 이전어 임유현인 것이다

2. 북위 양락현과 전한 해양현, 요 난주, 당 석성현 등의 지리정보를 통해 이들 지역이 난하 서쪽으로서 일치함을 이미 논증하였다
감방친구 18-11-06 04:44
 
당나라 초기 평주(북평군)는 수나라의 그것을 그대로 계승했으므로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청룡하~난하 라인의 안쪽이었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수나라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며 당나라 초기는 아직 변방까지 행정장악이 완비된 상태였다 볼 수 없다

평주 치소를 임유에서 비여로 옮겼다고 그 5 년 후인 624 년에 임유현을 폐지하고 비여, 즉 노룡현만을 남긴 것이 그 정황증거이다

즉 이 때의 당 평주는 속현이 노룡현 1개로 청룡하가 난하에 합수되는 지역까지에 불과했으리라 추정 가능하다

임유현이 설치된 것은 그 20 여 년 후인 641 년이다

게다가 마성현은 그 100 년 후인 740 년에 노룡과 임유(석성)현의 바다쪽 땅을 쪼개서 설치했다
감방친구 18-11-06 04:49
 
고구려 후기 고구려 서쪽 영토를 논하면서
많은 학자들, 역사 탐문가들이 자꾸 고구려가 멸망한 후의 당나라 전성기의 지리정보를 철썩같이 신봉하며 의심하지 않는데 이는 참으로 바보스러운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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