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2-1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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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太王)은 왕을 임의적으로 높여 부르는 미칭 혹은 존칭이다. 대왕(大王)이나 성왕(聖王)과 뜻이 비슷하다. 고구려와 신라에서 사용한 흔적이 있고 태왕보다는 대왕을 더 자주 썼다. 고려와 조선에서도 대왕이 쓰였다. 일각에서는 왕과 구별되는 군주의 칭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태왕의 용례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한국의 사서와 중국의 정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5세기의 금석문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태왕이 확인되는 금석문은 보통 광개토왕릉비(414년), 호우총 출토 광개토왕호우(415년),[1] 모두루 묘지명(5세기 초), 중원고구려비(5세기), 태왕릉 출토 벽돌명[2]과 청동방울(5세기), 서봉총 출토 은합우(451년)[3]를 꼽는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에서는 태왕보다 대왕(大王)이나 왕(王)이 더 자주 나오며,[4] 모두루 묘지명은 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이라 하여 성왕(聖王)이란 용어가 나타난다.[5] 중원고구려비는 마모가 심하여 저마다 판독이 다른데 주로 國麗大王(고려대왕)으로 판독한다.[6] 태왕릉 출토 청동방울은 辛卯年好大王(신묘년호대왕)이라고 적혀 있다.[7] 이렇게 왕과 태왕과 대왕이 혼용되고, 대왕은 고고학[8], 문헌학[9]적으로도 전시기에 두루 쓰였다. 이로 보아 태왕은 왕을 임의적으로 높여 부르는 미칭 혹은 존칭으로 판단된다.[10] 태왕이 처음 쓰인 시기는 저마다 의견이 다른데 미천왕, 고국원왕,[11] 고국양왕[12], 광개토왕 등이 있다.
일각에서는 大王(대왕)을 일괄적으로 太王(태왕)으로 판독하여 군주의 칭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3] 광개토왕까지는 미칭 혹은 존칭으로 쓰다가 장수왕대부터 비로소 군주의 칭호로서 정착되었다고도 한다.[14] 더 나아가 好太王(호태왕)의 好는 미천왕(美川王)을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했다는[15] 점을 들어 美와 같이 태왕을 꾸미는 말로 보고,[16] 호왕이라 불렸던 문자명왕[17], 양원왕[18], 평원왕[19]도 호태왕을 칭했는데 기록하는 과정에서 太가 탈락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4] 한편 호태왕은 일반적인 대왕, 태왕 같은 존칭호가 아니라 광개토왕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적 표현이라는 견해도 있다.[7]
- 1↑ 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 2↑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
- 3↑ 太王敎造合杅用三斤六兩(태왕교조합우용삼근육량)
- 4↑ 〈광개토왕릉비〉
- 5↑ 〈모두루 묘지명〉
- 6↑ 〈중원고구려비〉
- 7↑ 이동:가 나 조법종, 〈중국 집안박물관 호태왕명문 방울〉, 《한국고대사연구》vol.33, 한국고대사학회, 2004
- 8↑ 〈신포시절골터금동판명〉(5-7세기)
- 9↑ 《삼국사기》25권 백제본기 제3 개로왕 21년
- 10↑ 미야자키 이치사다(宮﨑市定), 〈 天皇なる稱號の由來について〉, 《思想》646, 1978.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 〈朝鮮古代の『太王』と『大王』〉, 《呴沫集》5, 1987
- 11↑ 모두루 묘지명에서 보이지 않는 다른 글자를 國罡上聖太王(국강상성태왕)으로 판독한 경우
- 12↑ 고국원왕의 성태왕을 추존호로 본 경우
- 13↑ 여호규, 〈고구려태왕호의 제정과 국강형 왕릉입지의 성립〉, 《역사문화연구》vol.35,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0
- 14↑ 이동:가 나 시노하라 히로카타(篠原啓方), 〈고구려의 태왕호와 태왕가인식의 확립〉, 《한국사연구》Vol.125, 한국사연구회, 2004
- 15↑ 《삼국사기》17권 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 9년
- 16↑ 박성봉, 〈‘광개토호태왕’ 왕호와 세계관〉, 《고구려발해연구》vol.2, 고구려발해학회, 1996
- 17↑ 명치호왕(明治好王) 《삼국사기》19권 고구려본기 제7 문자왕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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