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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02 12:50
[기타] 대조영은 그저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 NO!! 고구려 경당의 산물
 글쓴이 : 예맥사냥꾼
조회 : 5,141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낸다고 했죠.

아무리 난세가 영웅을 낸다고 했다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람, 준비되지 않은 민족, 역량이 부족한 사람과 민족에게
승리 내지 성공이 찾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668년 고구려 멸망한지 불과 30년만에 지금의 지린성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의 기치를 건 나라를 건국한 대조영이 특히 그렇습니다.

그저 내몽골 영주땅에 끌려간 20만 고구려유민들이 때를 잘만나
당나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에 요행히 다시 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신다면 완전 오산입니다.

(그런데 영주땅에서 탈출한 고구려,말갈 유민 20만명의 엑소더스 행렬은 동모산으로
당군의 추격을 피해 이동해오면서 주변 고구려유민들의 합세로 40만명으로 불어나 있었음
(신오대사측 기록에 40만명. 한편 오회대요측은 40만호라고 하는데, 40만호는 발해건국후
무왕때의 인구규모로 보는게 타당함))

엄밀히 말하자면,
발해 건국의 분수령이 되었던 천문령전투를 이끌었던 부흥군은
절대다수가 정규군으로서의 훈련을 받지 못한 민간인들이었으며,
동모산에 이르러 형성된 40만명 중 절대다수는 전투가 불가능한 어린아이나 노약자 여성들이었던 것을
감안할때, 아무리 높게 잡아도 전투가능 장정의 수는2만~3만으로 집계할 수 있으나,
문제는 대조영이 이끌던 장정들의 대다수는 전투경험이 거의 없고 정규훈련을 받지 않은 민간인들로서
또한 영주땅을 탈출하면서 말이 아닌 도보로 행군하였기에 기병은 극소수였고
당에 붙은 이해고가 이끄는 전투경험이 풍부한 당나라와 거란족 20만 기병대와의 싸움은 한마디로 전원옥쇄의 각오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객관적인 전력으로 볼때,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던 최대치 2만 가량의 대조영의 민병들은
우리가 뚫리면 동모산 자락에 30~40만 유민들은 모두 몰살당한다는 절박함때문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겠지요.

다행히 고구려 장수출신 대조영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실제로 고구려 관군을 이끌었던
경험이 있었던 인물이었고 탁월한 용병술과 지형지세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지략을 갖춘 용장이었기에
천문령의 험한 지세를 시의적절히 이용하고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소수의 유민 장정들 그것도 보병들뿐이
었던 그들에게 용맹한 전사의 혼을 발휘케하여 당과 거란 연합 기병 20만을 궤별시킬 수 있었습니다.


( 검은점으로 표시된 왼쪽 영주 땅에서 발해건국의 시잘점이 된 동모산까지의 거리를 보세요.
그야말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른 수천리 길과 맞먹는 거리입니다. 노약자와 아린아이, 여성들이 태반이었던
유민들이 뒤에서는 20만 당나라,거란 기병들이 바짝 맹추격해오고, 영주땅에서 급히 빠져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식량도 갖추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오로지 발에 의지해
동모산까지 머나먼 엑소더스 행렬을 벌였던 것입니다.)


훗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의 요나라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요성종도 "발해인 셋만 모이면 능히 범도
잡을만큼 천하에 발해인의 용력을 따라갈 종족이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시피,

본래 고구려인들은 정규군사훈련을 받지 못했다할지라도 전사의 피는 어디가지 않는 법이라고나 할까요?

7세기 동로마 역사가 시모카테스가 남긴 기록에도 '맥클리는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구려 사나이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20만 적기병들을 천문령에서 궤멸시키는
세계전사상 위대한 업적을 낳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천문령전투의 승리는 고구려유민들의 불굴의 의지와 항전의식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나라를 되찾아야만 한다는 당시 고구려인 등 예맥계 부족들의 강한 '신념'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발해건국의 주도세력이었던 지금의 만주 중부 송화강 유역의 속말말갈인, 그리고 만주 동부 지린성과
함경도 연해주 남부의 백산말갈은 고구려가 건재했을 당시에는 변방취급되던 지역에 사는 피정복민들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역사시대를 논할때, 고대, 중세, 근세, 근대로 구분하는데
발해건국 당시까지만해도 고대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이때까지는 한 나라의 신분체계는 크게
정복자로서 피정복민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던 국인(國人)들과 피정복민들인 하호들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고구려 초기부터 전통적인 5부세력과 광개토태왕이후 대국이 된 이후에는
낙랑, 요동과 같은 고구려 중심부 및 요동성, 국내성, 한성, 국원성 등과 같은 대성 등에 거주하는 지역민들이
국인들이라 할 수 있었고, 양맥,소수맥, 개마, 동예 북부여, 동부여 등등 종족적으로는 고구려 국인들과 마찬가지이나 고구려에 정복당했던 광범위한 지역의 여러 소국들, 제 부족세력들은 그보다 낮은 위치에 있던
지방민들이었던 것입니다.

중국사서에 6세기 중반까지는 전혀 등장하지 않던 '말갈'이란 존재가 불과 2~30년 후인 수나라가 등장한 시점에서는 고구려 영역이었던 만주 연해주 한반도 동북부에서 7부로 나뉠만큼 엄청나게 큰 세력인양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중국측 사가의 지식부족에 기인하는 것이거나
고의로 ' 고구려의 종족명인 맥족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맥구리라 불렀고, 돌궐도 고구려를 맥클리라 불렀음), 즉 맥구리를 멸시적인 의미를 담아 '말갈'로 불렀던 데에서 비롯된 해프닝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정확한 책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나 분명히 중국사서에도 '맥인, 맥족'과 '말갈'은 이름만 다르게 표기됬을뿐
고구려인을 일컫는 동의이음어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송화강유역에 살던 속말말갈은 495년 무렵인 문자명왕때에 최종적으로 고구려에 복속된
북부여의 여러 부족민 후예들을 일컫는 것으로 본래는 속말수 지역에 사는 맥인들이라는 것이고,
지린성, 연해주 남부, 함경도 지역의 백산말갈은 동부여, 옥저 등의 후예들을 일컫는 백산지역의 맥인들이라는 것입니다.

훗날, 발해의 제2대 가독부(발해의 태왕을 일컫는 명칭)였던 무왕이 왜국에 보낸 국서에서
" 짐은 고려국왕으로서 고(구)려의 옜땅 대부분을 회복하고 부여의 옛 풍속을 회복했다"고 밝혔다시피
발해를 건국한 주도세력인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인들은 대부분이 고구려 국인들과 종족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같은 부여인 등 예맥계 세력이었다는 것이죠.

이들 옛부여계 부족들은 고수,고당전쟁때는 중국측이 바라볼때 국인과는 구별되는 고구려의 피정복민들로서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 군사력으로 고구려편에 가담하여 중국과 싸웠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조선군왕으로 당나라에 의해 책봉된 보장왕을 몰래 찾아와 고구려 부흥을 도모했습니다.

정복자인 국인들과 피정복자인 지방민으로 구별되었던 고대시대에 수,당은 평양지역에 집중되있던
고구려 국인의 핵심세력인 20만명을 중국으로 끌고가버리면 나머지는 알아서 당나라에 복종할줄 알았지만
현실은 전혀 딴판이었던 것입니다.

중국인들에 의해 말갈로 멸시되었던 이들 부여인들은 이미 고구려 멸망시점에선 스스로를 국인들과 매한가지인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고구려멸망은 국인들만의 불행이 아니라 자신들의 나라를
빼앗긴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걸걸중상, 걸사비우 같은 부여계 부족장들은 어떻해서든 고구려부흥을 위해 틈만 엿보고 있었고
실제 중국사서에 말갈로 비칭된 부여계 세력가들이 요동군왕, 조선왕에 책봉된 보장왕을 찾아와 고구려
부흥을 모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반도 중북부에서 고안승 검모잠같은 국인들뿐만 아니라 만주지역 곳곳에서 이들 말갈이라 불리던
부여인들이 고구려부흥을 위해 사활을 걸고 대당투쟁을 벌이자 당나라는 국인들뿐만 아니라 이들 부여계 부족민들까지 영주땅으로 끌고 갔던 것이죠.

그런데 영주땅으로 끌려간뒤 고구려 국인과 부여계 사람들을 포함한 고구려유민과 본래 영주땅에 터잡아 살던 거란족들이 훗날 대당투쟁을 벌였던 양상을 보면 상당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영주땅의 당나라측 책임자였던 조문홰가 거란족,해족, 고구려유민들에 대한 가혹한 폭정에
거란족의 추장 이진충이 먼저 당에 반기를 드는데 거란족은 초기 당군과의 전쟁에서 17만의 적군을 섬멸시킬
정도로 연전연승하지만 그것뿐이었습니다.

당시의 거란족들은 오로지 당나라에 대한 복수심뿐이었지 17만에 이르는 당군을 궤멸시킬 정도의 호기를
만나고도 나라를 세우는데까지는 전혀 나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 영주땅에서 거란족에 비해 매우 열세에 있던 20만 고구려유민세력들은 거란족의 봉기를 기회로 삼아
엑소더스 시작부터 나라를 세워야한다는 일념하에 재빠른 행동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돌궐이 당나라의 요청에 부응하여 거란을 궤멸시키고 급기야 요수를 건넌 고구려유민들을
당군이 맹추격해면서 유민들에게는 엄청난 시련과 고난이 시작됩니다만 끝끝내 천문령에서 이들을 물리치고
다시 '고(구)려'를 일으켜 세우는데 성공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영주땅에서 열세였던 고구려유민과 상당한 군사적 역량을 보유하고 있던 거란족은 어떤 차이가
있었길래 그당시 둘은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된 것일까요?

저는 바로 교육에 있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이미 5세기 장수태왕때부터 국인들뿐만 아니라 피정복지역의 지방민들에게까지 '경당(국당)'을
세워 문자와 기본적 유학적 소양 및 무예 그리고 역사를 가르치면서 고구려영역안의 모든 백성, 부족들에게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 충성심을 고양시켜왔던 것입니다.

본래 방대한 전선을 가졌던 고구려로서는 보다 많은 병사를 확보하기위한 목적으로 국당을 세운 것이었지만
병사 및 지방관리 양성을 위하다보니 자연히 고구려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주는데 주안점을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결국 고구려 국인 핵심층이었던 평양의 국인들의 분열로 갑자기 나라가 멸망에 이르고 말았지만,
고구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평양성의 20만 국인들을 당나라로 끌고간 당나라의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엉뚱하게 고구려의 변망 시골뜨기들이나 다름없던 말갈에 의해 불과 30년만에 고구려가
다시 부활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피정복민에 불과했던 지방민들에게 적극적으로 국당을 보급했던 장수태왕의 혜안이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할 수 없죠.

668년 이세적이가 평양성을 점령한뒤 고구려 왕궁, 태학 등의 방대한 역사서적들을 보고 혀를 내두르며
"만일 이 방대한 서적들을 그대로 놔눈다면 고구려 오랑캐들이 다시 눈을 떠서 훗날 화근이 될것"이라고
말하면서 모조리 불태웠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당나라가 아무리 80년간에 걸쳐 수백만 아군을 몰살시킨 고구려를 철저히 부셔버리기 위해
평양성의 국인들을 20만이나 잡아가고 서적을 불태우는 등 집요한 노력을 해본다한들,
오래전부터 고구려 변방 곳곳에서까지 보급되었던 국당이 모든 예맥족을 고구려전사로 만들었기에 그들의
그런 노력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이전 동서양 역사를 막론하고 오로지 지배계급만의 전유물이었던 '문자와 지식교육'이
이미 5세기 이후부터 거의 모든 백성을 상대로 이루어지고 있던 고구려사회를 그당시의 중국인들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자타가 공인하던 최고문명선진국이었던 중국인들도 교육은 오로지 지배계층만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3~400년 지속되온 평민교육 '국당' 덕분에 나라가 멸망했어도 피지배계층들이 오랫동안
국당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배우고 고구려의 정신을 배워왔기에 이들에 의해
북쪽에서는 발해가 건국될 수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를 잊지 못했던 그 후손들에 의해 다시 '고려'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이 전무했던 거란족들과 달리, 속말수, 그러니까 고구려 변방 촌동네에 살던 대조영은 어릴때부터 바로 이 '국당'에서 고구려 무인으로서의
교육을 받았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장수가 되어 멸망후에는 유민들을 이끌어 다시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발해멸망후에도 발해유민들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래가 드문 200년 가까이 부흥운동을 벌였고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은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의 수십만 발해유민들을 이끌고 옛 동족의 나라
고려로 망명해올 수 있었던 것도 교육의 힘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고구려 유민의 영웅 '대조영'은 '교육'이야말로 그 민족과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초석이라는 진리를 역사에 입증시켜준 인물이라는 것이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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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스 12-08-02 17:54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새삼 다시 보니

확실히 우리 고구려의 시대를 초월한 선진 교육 시스템이 눈부심.

이런 문화와 정신 계승이

일제의 간악한 식민지 우민화 정책과 한국전쟁의 초토화 속에서도 20세기 반세기만에

민주주의와 경제라는 양날개를

세계사에서 유일 무일하게 동시에 이룬 기적의 저력이 이런 역사적 연원

때문이겠죠.
심청이 12-08-02 22:25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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