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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gye 2013-07-26 1:41 pm
소련이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그가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고, 아무 지지세력도 없으며, 내세울만한 이렇다할 공로도 없다는 점이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한 책략의 하나가 풍문만 무성했던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을 이용해 그가 바로 김일성 장군이라고 내세우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해방 직후 평양에 처음 왔을 때는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멤버들에게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됐다고 한다. 소련군 대위에서 갑자기 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 모란봉 운동장의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 김일성을 본 사람들 사이에 그가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 아닌 가짜라는 설이 급속히 퍼져 나갔다. 북한 당국(소련 군정)의 이에 대한 대비책은 사전에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던 모양으로 한 동안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연출되었던 것 같고, 그 중에는 그가 진짜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고 솔직히 인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일성은 가짜, 진짜 김일성 장군은 1937년 전사 뉴데일리 (김필재 칼럼) 2010.11.19
…..또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티코프 (Terentii Shtykov, 1907-1964)는 “여기 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해 소련도, 김성주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
위 증언 하나만으로는 소련군이나 북한 당국이 실제로 김일성이 가짜임을 시인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최근에 이를 입증하는 또 다른 증언 하나를 발견하였다. 1989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 “독자의견”란에 투고한 어느 월남민의 글인데, 요지는 아래와 같다.
어느날 신문에서[현 김일성장군의 본명은 김성주인데, 옛 항일투사 김일성의 이름을 딴 것은 그 공로와 명예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라고 쓴 것을 분명히 보았다. 월남후 고향지식인들에게 확인한 결과, 이구동성으로 그들도 똑똑히 보았다는 것이다.
그당시 그 기사를 보고 자뭇 어리둥절하였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2~3일후 당 간부들이 직접 다니면서 그 날짜의 신문을 회수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김일성의 약력은 서서히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오히려 [백두산]이란 장편서사시가 발간되어 신출귀몰, 축지법을 쓰던 애국지사로 부각시키고, 보천보 전투의 주동자라는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역사를 왜곡-조작한 것이다. 그당시 노인들은 새파란 사람이 어찌 그 이름도 드높은 노장 김일성으로 둔갑했느냐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확실히 가짜임을 자신있게 입증한다.
놀랍게도 북한 또는 소련군정 당국이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신문 기사가 나갔고, 불과 2~3일 후에 이 기사가 실린 신문을 모두 도로 회수해 갔다고 한다. 처음에는 가짜 김일성 소문에 대한 대처로 솔직히 인정하는 방법을 채택했다가 이것이 큰 실수라고 생각하여 신문을 도로 회수해 간 것이다. 그 이후로는 가짜 김일성 장군이란 소문이 퍼지지 못하도록 엄격히 단속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힌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 당국이 김일성을 가짜 김일성 장군이라고 시인한 신문 기사를 본 사람들은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을 것이고, 북한 당국은 그 신문을 모두 폐기했을 터이다. 그러나 다수 사람이 확인한 바이니 엄연한 사실임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다른 평양 출신 월남민의 아들이 위 조선일보 독자 투고를 보고 생전의 부친이 했던 말과 똑같아서 놀랐다면서, 부친이 김일성이 가짜라고 한 말을 믿지 않았으나 저 글을 보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조선일보 독자 투고란의 글 전문이 인용되어 있음.]
이러한 증언들로 볼 때 북한이나 소련군정 당국도 한때 김일성이 가짜임을 시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김일성은 가짜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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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친에게 들었던 얘기 둘 용은 실제로 존재할지도 몰라
2006년 12월 06일 (수) 00:00:00 [조회수 : 249] lys979111
돌아가신 내 부친에게서 많은 얘기를 들었었다. 부친은 1976년 1월 초 괴로운 인생살이를 불신자로 끝마쳤다. 들었던 얘기들 중 두 가지가 젊은 시절 믿어지지 않았다.하나는 북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이고또 하나는 부친이 젊은 시절 북한의 어느 바닷가에서 용(dragon)을 봤다라는 것이다. 당시 혼자만 본 게 아니고 여럿이서 봤다고 했다. 함경도 어디라고 했던 것 같다.
환시(환상)가 아니고 실제로 봤다고 했다. 살아 오면서 김일성이 문제는 어떤 실향민이 조선일보 독자투고를 통해 부친과 똑 같은 주장을 하여 사실 확인이 되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과거 부친과 함께 피난온 이들로부터도 여러 번 들었으나 전혀 모르는 이가 신문에서 그런 주장을 할 때 적잖이 놀랐다.
당시 나는 김일성이를 진짜 김일성이로 알고 있었다. 나중에 실제로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여 연구해 보니 가짜였다.그러나 용의 이야기는 항상 의문이었다. 그러다가 목사직 때려치운 사xx 아우의 말을 듣고 부친의 용 이야기도 사실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 아우는 용을 본 중들이 용을 본 자리에 절을 세운다고 했다. 그리고 동서양의 옛 용 그림들이 서로 흡사하다. 뭔가 보고 그린 것이기에 비슷할 것이다. 용은 사탄일 것이다. 그래서 부친이 불신자로 생을 마감했는지도 모른다. ………………………………………………………
조선일보 89년 4월 13일자 독자 의견
지난 4월6일의 MBC[주체 사상의 실체는 무엇인가] 라는 프로에서 모 대학생이 질문에서 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라는 학자도 있다고 하며 의혹을 불러 일으킨데 대해 1.4후퇴때 월남한 산 증인의 한 사람으로서 의견을 피력코자 한다. 1945년 해방 이후 1950년 12월까지 북한 독재정권하에서, 화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노동계급의 상징인 공도 흥남 비료공장에서 사무직으로 일했다. 그후 함흥 교원간부학교를 나와 중학교 교편을 잡으면서 북한의 정치-경제-사회의 실정을 속속들이 체험하였다.
어느날 신문에서[현 김일성장군의 본명은 김성주인데, 옛 항일투사 김일성의 이름을 딴 것은 그 공로와 명예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라고 쓴 것을 분명히 보았다. 월남후 고향지식인들에게 확인한 결과, 이구동성으로 그들도 똑똑히 보았다는 것이다.
그당시 그 기사를 보고 자뭇 어리둥절하였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2~3일후 당 간부들이 직접 다니면서 그 날짜의 신문을 회수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김일성의 약력은 서서히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오히려 [백두산]이란 장편서사시가 발간되어 신출귀몰, 축지법을 쓰던 애국지사로 부각시키고, 보천보 전투의 주동자라는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역사를 왜곡-조작한 것이다. 그당시 노인들은 새파란 사람이 어찌 그 이름도 드높은 노장 김일성으로 둔갑했느냐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확실히 가짜임을 자신있게 입증한다. 그것도 모르고 우상화 놀음에 속고 있는 북한동포가 억울하고 가련하기만 하다.<김청구.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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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과거 나도 역시 북의 김일성을 진짜로 알고 있을 때 위 기사를 보고 스크랩하여 지금까지 보관해 오고 있다. 왜냐하면 평양에서 피난오신 부모님의 주장과 똑 같았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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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행한 여러 가지 정치 공작에 대해 소련 25군 사령부(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 정치담당관 그레고리 코노비치 메클레르 (Grigory Mekler, 1909~) 중좌(중령)와 NKVD (KGB) 요원 Leonid Timofeevich Vassin (1915~)이 증언한 바 있다.
그레고리 코노비치 메클레르 (Grigory Mekler, 1909~) 의 증언
국내 언론에 보도된 KGB 요원 Leonid Vassin의 증언
레오니드 바신, ”[해방후 평양 첫 진주한 전소련군 장교의 폭로] ‘날조된 영웅’ 김일성,” 『신동아』, 1992년 11월호, pp. 486–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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