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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06 23:18
[기타] 조선은 속국이 아닌 자주국
 글쓴이 : 나와나
조회 : 4,903  

1.조공을 받치는 것은 속국이 아니다.
 
조공:
조공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보내 예물을 바친 행위이다. 이는 일종의 정치적인 지배수단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는 방물(方物:지역 특산물)을 휴대하고 정기적으로 천자(天子)를 배알하여 군신지의(君臣之義)와 신례행위(臣禮行爲)를 행하였다. 천자는 이를 통하여 여러 제후를 통제하고 지배하였다. 그뒤 이 제도는 한족(漢族) 중심의 중화사상을 기초로 주변 이민족을 위무·포섭하는 외교정책이 되었다.

주나라 이후 제후국들 사이에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事大),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사랑해 주는(字小) 예가 있었다. 이러한 사대·자소는 결국 대소국간에 우의와 친선을 통한 상호공존의 교린의 예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로 접어들자 큰 나라는 약소국에 대하여 무력적 시위로 일방적인 사대의 예를 강요하였고, 이러한 사대의 예에는 많은 헌상물을 수반하는 조빙사대(朝聘事大)가 나타났다. 계속된 전쟁으로 힘의 강약에 의한 지배, 종속관계 대신 헌상물을 전제로 한 조빙사대가 되었으며, 이러한 행위는 한(漢)나라 이후 중국과 주변국가 사이에 제도화되어 조공과 책봉이라는 독특한 동아시아의 외교 형태 나타났다.

따라서 조공·책봉관계는 약소국인 주변국에게는 자국의 안전을 위해 공식적인 교류를 통하여 중국의 침략을 둔화시키고 상호불가침의 공존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받은 책봉은 동아시아 외교체제에 편입되고 국제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서, 중국 주변의 모든 나라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규범으로 정착되었다. 19세기 이전 만주·몽골·티베트·안남 및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는 모두 중국에 조공하였고, 19세기에 이르러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이 형식을 따랐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조공이란 종주국이 받친 나라에게 훨씬 많은 양의 하사품을 내려주어 주변국의 침략을 예방하고 자신은 정치적 우위를 획득하며 받친 나라는 하사품으로 실리를 얻는 하나의 외교였던 것이다.실제로 세종 때 조공의 열배가 넘는 양의 하사품을 받았는데,이  때문에 제정이 어려워져 한때 명이 조선의 조공을 거부했다고 한다. 만약 조공을 받쳤다고 속국이라면 한민족 최전성기이자 조공을 가장 많이했던 장수왕,세종대왕 때도 속국이 된다.
 
 
2.조선의 왕들은 중국에 알현을 한 적이 없다.
"제후는 천자를 대함에 있어서 해마다 한 번 소빙을 하고 3년에 한번 대빙을 하며 5년에 한 번 조근을 한다"(예기-왕제편)
여기서 조근이란 제후국의 군주가 직접 천자를 찾아가서 알현하는 것으로 중국에 책봉을 받는 주변국들 또한 알현의 의무를 지켜야했다.보통 군주들이 천자를 직접 알현할 때 천자는 더 많은 하사품을 내리기 때문에 속국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또한 중국의 천자들 또한 자신들의 지위가 더 높아지기 때문에 매우 희망하는 사항이었다.그러나 조선을 포함한 한민족의 왕조들은 이것을 고려말 원종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지킨 적이 없다. 기껏해야 세자나 신하들을 보낼 뿐이었다.이것은 한국이 자주국이기에 실리적인 외교를 하면서도 굴욕적인 것은 최대한 삼갔던 것이었다.
 
 
3.제천 행사
옛날 동아시아에서 제천행사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자 의무였다.천자는 말 그대로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천제를 대신하여 이 세계를 다스리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 제천행사는 독자적인 세계관과 자신들의 주권을 내세우는 것으로 중국의 제후국들이 제천행사를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것이었다.그러나 한민족들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대대로 제천행사를 해왔다.조선시대에도 원구단이라는 곳에서 꾸준히 독자적인 제천행사를 해왔다.즉, 조선은 직접적인 명과의 마찰때문에 공식적으로 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들 스스로 천자국임을 내세우고 있었다.
 
 
4.명은 조선을 두려워했다.
명과 조선 초기부터 종계변무 등 꽤나 많은 마찰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은 이성계,정도전 등이 요동 정벌을 주장했었고 이것은 명에게도 상당히 위협이 되었다.당시 요동은 빈 땅이었고 여진족,고려인들이 살고있었다. 그래서 조선에게 요동을 회복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만약 조선이 요동을 회복하고 명과 대립 중인 북원과 손을 잡는다면 국가의 기틀이 잡히지 않은 명나라의 운명은 뻔한 것이었다. 다행히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등이 제거되고 이성계가 병중에 쓰러지면서 요동 정벌이 무산되자 명은 위기를 겪지않았았다. 그 후로도 명-조선 간의 관계가 좋아졌으나 조선과의 사이가 틀어져 북원과 손을 잡고 쳐들어올까 두려워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기떄문에 조선이 4군6진을 설치하고 여진,왜,류큐,동남아 등과 교역을 하고 황제국과 같은 위치를 자랑해도 상관하지않았다. 임진왜란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조선이 왜군과 손을 잡고 쳐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했었다.(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력이 형편없음을 알게되고 조선의 국제적 지위는 크게 떨어진다.)만약 조선이 명에게 굴복한 속국이라면 명이 두려할 이유가 없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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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야구 13-09-06 23:22
   
일면 뒤집기죠.

어짜피 중국이 황제국이 된 것은 이민족과의 연합과 문화의 확대 속에서 이룬 것이며, 중국의 애초 모습이 제후들에 의한 연합국가 였으므로 조공 문화 속에는 중국의 전통에서 말하는 한 국가 개념, 황제의 신하 개념이 녹아 있는 것도 사실이죠.

이런 측면이 중국과 일본이 내세우는 한반도 식민지 이론이죠.

여하튼 조선 후기의 관료들 조차도 조공문화에 대해 명분보다는 본질을 이야기 했기 때문에 우리 역사는 이 부분에서 언제나 떳떳하기는 힘들 것이라 봅니다.
gagengi 13-09-06 23:23
   
조선-청나라는 중국을 정복한 한민족의 남북조시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26450
mymiky 13-09-06 23:41
   
속국이란 표현에 민감한데..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주변 책봉국이란 표현은 그 자체가 나쁜 의미가 아닙니다.
다분히 명목적인 외교관계이고, 다른 주변국들과의 무역같은 교역의 목적으로 관계를 맺는 경우거든요.
그것이
근대에 들어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란 개념과 뒤섞여 부정적인 표현이 된거죠.
굿잡스 13-09-06 23:41
   
조공 어쩌고 하니 말이 이상하죠 ㅋㅋ

조명의 거래는 그냥 <대외공무역>임.(이당시 조선은 명의 눈치를 보지않고

여진,류큐,왜국등 여러나라에 실제 황상이나 황제로 불렸고 독자적

황제적 권위하에 군림했음. 이 당시 조선은 대조선으로도 불렸습니다.)

이게 말그대로 갖다 바치는 거라면 명은 조선에게 1년에 한번 하자고 하고 조선은 불이익을

감수하고 1년에 4번하자고 우기겠음????

당시 동북아 역학 관계를 보면 명이 비록 원나라를 몰아냈지만 북원은 여전히 강성했고

명의 대군은 여러번 대패를 합니다. 역대로 고조선, 삼국시대고 남북국 이후 고려 금 고려 원시대에고

우리가 북방의 여러 세력을 제압해서 휘하에 두거나 연합해버리면 서토는 깨깽. 상당히 불리한

역학적 관계였음.

그래서 당시 명은 후방의 조선을 구슬리게 하기 위해 선불로 10배를 후려 팔아먹어도 사왔다는..
굿잡스 13-09-06 23:43
   
실제의 조공은 한족들이 전형이죠.

한족의 효시인 한나라 건국자 유방이 흉노의 묵특대선우에 생포되어 수십년간 해마다 흉노의 일방적

조건에 의해 실제 막대한 조공을 바쳤고 이는 이후 후한시기 그리고 그 찬란 어쩌고 하던 당나라 시기에도

돌궐에 그리고 요나라에 박살난 송나라등 .. 이들 한족이야 말로 진짜 전형적 갖다바치면서 연명한게

역사임.
굿잡스 13-09-06 23:45
   
<갖다바치는 조공의 진짜 콤플렉스 집단. 그 이름 한족>

전한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한다. 그런데 기원전 201년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탄생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40만 명의 대군을 동원, 흉노의 시조인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는 등 온갖 수모를 겪고 난 뒤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그에 의하면 한은 거의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을 흉노의 속국으로 만든 묵특선우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우리 한민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당시 동호(東胡; ‘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가 매우 강성하였는데, 동호는 흉노를 경멸하며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를 요구했다.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인접한 나라 사이에 어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라며 순순히 동호의 의견을 따랐다. 당시 두 나라 사이에는 1000여리의 황무지가 펼쳐 있었는데, 동호가 이를 갖겠다고 나섰다. 신하들은 버려진 땅이므로 주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하여 왕을 살해하고 백성과 가축을 노획했다.

패전한 동호를 대신하여 흉노는 유목기마민족의 패자로 떠올랐고, 묵특은 자신의 치세 동안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한족이 이른바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난 것은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다. 괄괄한 성미의 무제는 고조 유방 이후 60 년간 지속된 굴욕적인 대(對)흉노 유화정책을 버리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10년간의 한·흉노 전쟁으로 한나라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흉노의 피해는 더욱 컸다. 무제가 죽은 후 한나라와 흉노는 대략 300년에 걸쳐 공존하며 평화롭게 지낸다



후한

후한(後漢, 25-220)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25-57)는 중국 남부와 월남의 북부를 다시 정복했다. 기원전 209년에 묵특의 지휘아래 유목제국을 수립한지 250여년이 지난 AD 47년, 흉노제국에 내란이 일어나 몽골초원 전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덕분에 요서 초원지대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는 제일 먼저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실호기, 후한 명제(明帝, 57-75)는 전한 무제를 본받아 흉노를 다시 한번 통제해 보려 했다.

일찍이 AD 48년에 흉노제국이 남과 북으로 양분되자, 조정관료인 장궁(臧宮)은 흉노의 약세를 틈타 “고구려,” 오환, 및 선비와 연합하여 흉노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었다. 1 당시 광무제는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신조를 강하게 피력했다. 49년, 광무제는 푸짐한 선물과 국경무역을 제공해 선비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명제가 즉위한 다음 해인 58년 이후에 후한 조정이 선비 부족장들에게 정기적으로 갖다 바친 금액은 년간 2억 7000만냥에 달했는데, 그 규모는 같은 기간 동안 남흉노에게 바친 것의 세배에 달하였다.


북위때(남북조)


북위는,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유지할 뿐 아니라,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 받은 2원적(二元的)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정복왕조의 귀감이 됐다. 만주는 거의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홍원탁 (서울대 교수)

만주의 여러 부족들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 해 가장 유목민적이었던 탁발 선비는, 전연(前燕)이 만들어낸 이원 통치 체제의 장점을 살려, 처음으로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이민족 왕조를 수립했다.1 모용 선비족은 탁발의 북위(386-534)조정 내에 주요 지배귀족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변경지대의 한족들은 어느 때고 초원 혹은 삼림지대 출신의 이민족 부족 중 제일 강하다고 생각되는 편에 붙었다. 탁발 선비의 언어는 아마도 거란어의 직계 조어(祖語)이었을 것이다.2

부족 출신 군대 덕에, 보급이 잘되는 기병대를 보유했던 북위는 초원지대 깊숙히 원정군을 보낼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부족들은 부대 단위로 조직되어, 할당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국경수비 공동체의 구성원 역할을 하였다.3 부족민과 군사에 관련된 문제는 각 부족 고유의 전통에 따라 처리되었다 정복된 한족 거주지역은 한족 관료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고위직은 대부분 선비 귀족들이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한족들의 이상은 능력주의 사회인데 반해, 유목민족들은 세습적 귀족제도를 고수했다. 북중국 귀족가문들은 대부분 한족이 아닌 이민족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정복왕조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대부분 독차지하였다.

중국대륙 북부의 선비족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을 보면, 시베리아와 몽골초원 유목민들의 초기 예술적 전통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뿐만 아니라, 당시 선비족들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했던 옛 박트리아와 교류가 있었고, 로마 통치하의 중동과 교역을 했으며, 초기적 불상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와도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낯익은 사람들은, 섬서성에서 발굴된 (5호16국 시대) 갑옷을 입은 말 모양의 토기를 보고, 고구려 토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특히 호흐호트(呼和浩特)에서 출토된(맨손으로 빚어 만든) 말과 마부의 토기는 신라 토기로 오인될 정도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모양의 토기에 너무나도 친숙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 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유지할 뿐 아니라,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받은 2원적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정복왕조의 귀감이 되었다. 만주는 거의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Barfield(1989: 105)는 “한(漢)이 멸망하고 첫 번째 만주족 정복국가(탁발북위)가 등장하기까지는 150년이 걸렸고, 당이 망하고 나서는 75년이 걸렸으나, 명(明)이 망할 때는 거의 동시에 만주족 정복왕조가 들어섰다. 한족왕조가 망하고 나서 정복왕조가 들어서기까지의 시간은 점점 단축되었지만, 그 방식은 똑같았다.”고 말한다.






요나라때


거란(요나라)은 송과 적대적인 대치상태를 지속하다가,

결국 1005년에 송나라가 매년 20만 필의 비단과 10만 량의 은을

거란에게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1005년 조약과 1042년에 개정된 조약은 근 백 년간 평화를 지속시켰다.

송나라 조정은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고, 계속 “조공”을 바쳤다.

송나라의 인구는 약 8천만에 달했으나, 티벳으로부터 몽골의 초원지대를 거쳐 만주에

이르는 북방 전 지역에는 대략 5백만 명 정도가 살았다

금나라
북송은 금(金)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남송은 몽골제국(원元)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원나라때
몽고족은 제1신분으로서 통치하고 색목인(위구르인, 아랍인등)이 제 2신분이었고 다음은 중원땅에 살았던 한인이(거란, 선비족) 3신분을 차지하고 끝까지 원의 지배에 항쟁했던 남송인이(한족) 4신분으로 특히 차별을 받으며 노예 계층으로 분류했다.. 원은 몽골어를 공식언어로 지정했고, 과거제를 폐지하는 등의 정책을 통해 한인의 정치진출을 막았습니다.

한인들의 역할이 축소된 것은 이미 칭키스칸이 세계제국을 이룩하였기 때문에 아랍인이나 위구르인이 중국에 많이 진출하여 재정과 무역 등의 실무를 맡아서 한 것도 이유로 들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한인을 억압하는 정책을 통해 그들의 반발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청나라때

청조의 對 한인 정책은 협조하면 유화책을 구사하지만, 반항하면 철저하게 도살하는 유혈강경책이었지요, 예컨대 화남과 화북을 잇는 군사적 경제적 거점이었던 揚州城(양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청군은 끝까지 저항한 한인 8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팔기는 반문명적이고 야만적인 군대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만주족은 중국인구의 0.03%에 불과했습니다. 소수가 다수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본때를 보인 것입니다』

청조가 과거제도를 유별나게 중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거제를 통해 능력과 장래성이 있는 漢人을 관료로 발탁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사대부와 지방의 紳士(신사) 계급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과거 합격자가 관직에 바로 등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生員, 監生, 貢生, 擧人 등의 학위소지자로서 사회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상급 시험인 進士試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청조는 이들이 관계에 진출하기 위해 지옥과 같은 多단계의 과거준비에 얽매이게 유도함으로써 체제에 불만을 가질 겨를이 없도록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청대의 과거합격자 110만명 중 관료가 되었던 사람은 2만7000명에 불과했습니다

만주족의 土風(토풍)을 지키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청조는 발상지(본거지)에 사는 만주족이 한족식 집을 짓거나 한족교사를 초빙해 글을 배우는 것조차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中原에 들어간 만주족들은 元을 세운 몽골족처럼 한족에게 몰리면 언제라도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 고토로 되돌아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의 얘기입니다만 청조는 대만이나 산동반도 같은 곳은 쉽게 할양했지만,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아 청일전쟁까지 치렀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이 그들의 본거지와 인접해 있기 때문이었지요』

청나라는  만주족은 그들의 충성심을 확인 시키기 위해 변발을 강요했고 이에 반항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처단했다.

< 정사의 실제 기록>

남북조시대의  기마민족인 선비족(鮮卑族)이-<사기> <흉노전>에는

흉노를 호라 하고, 예맥 조선을 동호라 하였고,- 흉노가 동호를 하

북성으로 밀어내게 되는데 동호 ,예맥, 조선은 사기의 흉노열전,

조선열전, 소진열전에서 다르게 이칭 하지만 그 방향과 위치는 같

다. 즉 동호를 고조선으로 기록하고 있다.이후 후대

< 위지 동이전>에는 동호의(고조선) 후손이 선비, 오환이라 하고

예는 부여, 맥은 고구려라고 하여  선비, 오환, 부여, 고구려 등을

다르지 않는 갈래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는 선비 부여 고구려등을 동이 열전에서 함께 분류하고 있다.
odroid 13-09-07 00:31
   
본문도 길고 댓글도 길고 해서 안읽었는데...세자책봉은 어떻게 애기하실라나..세종대왕빼고 나면 조선에.뭐가 남을런지
...이순신같은 장군은 빼고..알아서 긴 그런 나라였던건 맞는듯..
     
굿잡스 13-09-07 00:32
   
...세자책봉은 어떻게 애기하실라나>??ㅋㅋ 조선의 세자 책봉을 명이 했음???? ㅋㅋ
     
mymiky 13-09-07 00:56
   
세자 책봉은 중국이 뭐라고 할게 아니죠.
사실, 왕과 왕비 책봉도 중국이 태클건적도 없구요.
실질적으로, 중국의 고명 [ 誥命 ]의례절차는,국내에서 즉위한 다음 추인[追認 ] 했다고 하는게
정확하죠. 추인이 뭔진 아시죠?  어떤 행위를 미리하고, 나중에 동의를 구하는걸 추인이라고 합니다. 중국이 추인을 거부한 전례는 없습니다.
     
굿잡스 13-09-07 00:58
   
ㅋㅋ 오늘날로 치면 짱저민이나 시진핑 주석이 오바마 만나서 나 주석되서리 하는격 아님 ㅋㅋ
     
odroid 13-09-07 01:04
   
세자책봉하고 허락을 받던데요..드라마에선말이죠..굴욕아닌가요..
          
mymiky 13-09-07 01:07
   
굴욕이랄건 없죠.
역대 중국에서 허락을 따로 구한적이 없어요..우린 통보하고,저쪽에선 ok ㅋㅋ 이제 끝입니다. 이번에 이런 사람이 왕이 되었다거나 왕비가 되었다거나 알려주는거죠.
현대엔 티비만 틀면, 시진핑이 중국주석이 되고, 박근혜가 한국 대통령이 된걸 다 알지만..
예전엔 통신이 미비하니까.. 자잘한 왕실 행사 알려주려 직접 사신들이 왔다 갔다 하는거구요.
narang77ㅔ 13-09-07 00:52
   
근데 좀 짜증 나는게 영화나 드라마 같은걸 보면 사실과는 다르게 극적 재미를 위해 역사를 날조하는 일들이 좀 많이 나타나더군요.

얼마전에 케이블로 본 '나는 왕이로소이다' 인가? 주지훈 주연의 영화도 조선이 처녀를 바쳤다느니 명이 세자책봉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무리한 조공으로 조선이 고통을 받은 것처럼 뭐 이런 무슨 말도 안되는 날조를 사실인양 적어놔서 참 기분이 거시기 하더군요.

그런거 외국인들이나 역사를 잘 모르는 한국인들이 보면 그대로 사실처럼 믿어 버리는데...아무리 극적 재미를 위해서라지만 너무하지 않나 싶어요.
     
mymiky 13-09-07 01:00
   
mbc사극이 유독 그런게 심하죠.. 그래서 난 이병훈 감독 작품들 싫어함..-.-
그 분 사극이 한국 사극을 대표한다는게 전 불쾌하더군요. 고증도 엉망이고..
스토리도 전형적인 캔디형.. 짜증나는 중국사신은 이건 뭐 배째라고 나오고..ㅋㅋㅋ
주인공의 지혜로 넘어가고.. 이런 스토리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음..열라 식상함..

주지훈이 아마 세종으로 나왔었나? 그랬죠. 조선초기까진 공녀제도가 있었습니다.
성종땐가? 세조땐가 공녀제도가 폐지되거든요.. 인수대비 고모들이 당시 명황제의 후궁으로 가고 했으니 그걸 의미하는거 같네요. 근데, 명이 세자책봉에 막강한 권한 행사하고 한적은 없지요.
무리한 조공이라고 하면, 주원장이 이성계 길 들이려고 3만의 말을 바치라느니 그랫던적은 있지만. 조선은 여진과 중계무역으로 여진에게 싸게 말을 사서 명나라에 되팔아 이득을 챙기긴 했음..
대박행운 13-09-07 10:01
   
옛날 조상들은 속국 아니였습니다...
지금이 속국이죠...
대통령되면 미국 중국으로 신고식 하러 갑니다...
반대의 경우는 거의없죠...
     
mymiky 13-09-07 14:36
   
풉 ㅎㅎ
신고식하러 간다고 속국임? ㅋㅋㅋ
태국 여자총리가 되고 얼마안되서 한국에 신고식 하러 왔는데
한국인들은 태국이 한국 속국이라고 생각안해요ㅋㅋㅋ

미중 같은 나라는 오바마와 시진핑이 떠돌아 다니진 않아도 본국에 앉아있어도 워낙 많이 오는 경우라 예외로 치구요.
고만고만한 나라치고 국가수반이 신고식 안 다니는 나라 없습니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거니까요.. 동남아 국가수반들 제일먼저 동북아 한중일에 꼭 한번씩 들리는거 아세요? 투자좀 해달라고.. 우리가 뉴스에 어디어디 국가 대통령이 방문했다고 그냥 단신처리가 되어서 사람들이 무관심해서 그렇지 그렇다고 한국이 그 나라 속국으로 보진 않아요.
그리고, 요즘 세상엔 누가 속국따지고 있습니까?-- 중화뽕 맞은 짱개들이나 그러지 ㅋㅋㅋ
시진핑이 주변나라들 책봉해주고 있는 세상 아닙니다ㅋㅋㅋ 제각자 살길 자기가 알아서 찾는 세상이지..
돈빨 많은 일본의 아베총리도 총리되고 나서,연달아 주변 6개국 순방다녔어요.
한국엔 안 왔지만.. 일본이 요새 한중이 안 놀아주다보니 지가 돈풀어서 어딜 좀 나다니며 체면세워야 하거든요 ㅋㅋㅋ 올림픽도 열어야하고.. 요새 아베 바빠요 ㅋㅋ
동남아에다 돈도 풀어야 하고..
코주부 13-09-07 14:43
   
조선은 성종때까지 자발적으로 여자를 갖다 바쳤습니다 정신적으로 속국 맞고요 황제가 죽을때 후궁도 같이 생매장당하는 야만적인 명나라한테 말이죠 지금에 와서 조공은 실리 무역이라고 떠들어 대지만 형식은 갖다 바친거 맞습니다 그저 많은 하사품을 받아온거죠 실리를 좀 얻었죠 엄청난 명분을 잃고요 밖에서 보면 속국 확실하죠
     
mymiky 13-09-07 14:57
   
공녀제도는 고려말부터 시작해 조선초기까지 이어지다가 성종이후 폐지됩니다.
명나라 황실도, 오랑캐인 몽골족을 타도해 일어났지만, 과도기가 늘 그렇듯이 원나라의 습속도 함께 물려받기도 했습니다. 일단은 명나라 황제가 이국미인들에 대한 호기심과 신생국 조선을 길들이려는 목적으로 공녀를 요구해온거지, 조선왕실이 자발적으로 여자를 바친 적은 없습니다.
명나라의 후궁 순장제도 또한, 명나라 초기의 풍속이지, 계속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생매장으로 파뭍는게 아니라-.-; 자진하게 한 뒤 시신을 함께 넣는 것입니다.
코주부 13-09-07 14:46
   
조선 중기 이후엔 사대부들이 자기 왕보다 서쪽의 황제를 더 섬깁니다 명 황제 제사가 20세기까지 계속되다가 일제에 의해 중단됩니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고 사대부는 유학과 명 황제를 섬기죠
     
mymiky 13-09-07 15:04
   
또한, 저는 님의 이런 단편적인 시각에 좀 이상한거 같네요
흔히, 사람들이 하는 오해가 조선사대부들이 자기 왕보다 서쪽의 중국황제를 더 섬긴다는 표현인데;; 뭔가 사람들이 단단히 잘못 아는 선입견이 있는거 같습니다.

중국황제는 군림은 하되, 지배하지 않는 사람으로써,  대국의 황제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지

조선국왕보다 중국황제를 섬긴 사대부는 없습니다. 유학에서도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죠? 게다가, 당장 자기에게 월급주는 왕은 자국의 조선왕이지, 멀리 떨어져 있는 얼굴도 모르는 외국왕이 아닙니다-.-;; 사람은 경제적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동물임을 아셔야 합니다.
황제의 제사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를 말함인데,,숭정제가 워낙에 드라마틱하게 자결해서 동정심도 많이 받았던것도 사실이고..명이 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재조지은의 은혜에 대한 감사? 뭐 그런것이 주된 이유지

조선 사대부들이 명황제를 더 섬긴다는 표현은 지극히 오바입니다.
명 황제에 대한 추숭은 사대부들 중에서도 서인계열이 그러한 것인데, 그들이야 선조-인조를 정통으로 봤던 사람들이니 그러하구요.. 남인계열은 그러거나 말거나 했구요.

조선은 원래 중국만 써야하는 조종 묘호도 잘만 가져다 붙인 나라입니다.
왜란때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에게 발각이 되지만,, 그래도 계속 썼지요..

게다가, 조선 노론들도, 영조때 김약행은 칭제 상소를 올립니다.
칭제- 영조보고 황제가 되라고 한 상소입니다. 김약행이란 자는 골수 노론출신이예요..
소중화 사상의 극단적인 행태라고 볼수 있는데, 조선이 중화문명의 정통을 이어받았으니
조선국왕이 마땅히 황제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의 담고 있습니다.
즉, 조선국왕을 중국황제 급으로 격상하자는 말입니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하등 없단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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