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5-04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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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 논란[편집]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주장이나 위서라는 주장이 병존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주장을 먼저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이하 내용은 고준환의 《신명나는 한국사》의 진서론과 문영의 《만들어진 한국사》의 반론을 정리한 것이다. [17]
진서론 |
위서론(반론) |
발해 3대 문왕의 연호 대흥(大興)이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정효공주 묘지문에서 확인되었다. |
해당 연호는 《신당서》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며 발해와 관련된 대표적인 저작인 《발해고》에도 이미 실려 있는 사실이므로 《환단고기》가 최초가 아니다. |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중국 본토에서 세운 대제(大齊)에 대한 기록이 《환단고기》에 처음 기록되었다. |
《신당서》에 이정기 및 그의 후손에 대한 열전이 존재한다. |
장수왕의 연호 건흥(建興)이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1915년 출토된 고구려 불상에서 확인되었다. |
《환단고기》의 실제 공개 연대는 1970년대이므로 1915년의 발굴 내용이 적혀 있다는 것이 진서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
연개소문의 조부와 증조부의 이름이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1923년 출토된 천남생 묘지명에서 확인되었다. |
《환단고기》의 실제 공개 연대는 1970년대이므로 1923년의 발굴 내용이 적혀 있다는 것이 진서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
상나라의 왕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갑골문을 통해 확인되었다. |
무정의 귀방 공격 기록은 《주역》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환단고기》에는 단군이 북경 일대를 다스린 단군조선의 천자(天子)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발굴된 청동기에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있어 이를 증명해준다. 중국이 최초로 천자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기원전 221년 진시황 때이다. |
진시황이 최초로 사용한 것은 황제라는 호칭이며, 천자라는 호칭은 주나라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
진서론[편집]
- 근대 용어 등 후세에 일부 가필되었더라도 내용 전부가 위작된 것은 아니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조작했다면 보다 완벽해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므로 의도적인 조작은 아니라는 의견[18]이다.
- 이덕일은 위와 같은 견해를 가지면서 "이상룡의 〈서사록〉과 박은식의 〈동명성왕실기〉가 1911년에 저술되었다고 해서 ‘후세의 위작’이라고 비판받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면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고 받은 비판은 부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상룡 · 박은식 · 신채호가 그랬던 것처럼 계연수도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독립운동, 애국사상을 고취시킬 목적의 하나로 선교 계열의 고서류를 참고해 《환단고기》를 편저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편 바 있다. 애국심에 의한 민족주의적 고찰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의견[19]이다.
- 고등과학원 박창범 교수는 《단기고사》(檀紀古事)와 《단군세기》(檀君世紀)의 '오성취루'의 천문현상 기록을 현대 천문학으로 검증한 결과 기록보다 1년 전인 기원전 1734년에 기록과 비슷한 현상을 발견했다. '오성취루'의 천문기록은 당시의 국가라는 틀 안에서 측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후대에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했을 경우 정답이 될 확률은 0.007퍼센트로 가필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는 것이고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의 신빙성도 함께 증명되었다는 의견[20][21]이다. 전 한국천문연구원장 박석재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22]
위서론[편집]
《환단고기》가 후대에 위조된 기록이며, 사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3]
- 현전하는 여러 역사서 및 위서를 베껴 쓴 흔적이 많이 존재한다.[23]
- 《규원사화》 및 《단기고사》와 문장구조.까지 일치하는 문장이 많이 발견된다.
- 《규원사화》 및 《단기고사》에 등장하는 잘못된 인용이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 신채호가 주장한 연개소문 사망 연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해당 연도는 잘못된 연도이다.
- 용어 사용이 적절하지 않다.
- 사백력(시베리아), 파나류산(파미르고원), 수밀이(수메르), 우루, 지백특(티베트), 남녀평권, 부권, 상춘, 세계만방(世界萬邦), 산업, 문화 등 근대 이후에 등장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 고려(高麗), 몽고(蒙古), 흑수(흑룡강), 영고탑, 산동(山東) 등 실제 사용 시기가 상이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각 명칭의 실제 사용 시기는 다음과 같다.
- 몽고(蒙古): 징기스칸이 등장할 무렵에 등장한다.
- 영고탑: 청나라 시조 설화와 관련지어 청대 이후에 등장한 용어이다.
- 산동(山東): 중국 사서 《한서(漢書)》를 인용하면서 실제 사서에 없는 산동(山東)이라는 말을 가필하였는데, 실제 산동이라는 용어가 해당 지역을 가리키게 된 것은 명나라 때 이후이다.
- 저술 연대
- 1911년 출간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출간 연도인 1979년보다 전에 《환단고기》 또는 그 저본이 되는 5권의 저서가 존재했다는 근거가 없으며, 이유립 본인이 《환단고기》를 고쳐가며 창작하였던 흔적이 발견된다.
- 1911년에 편집된 책이 1979년에 출간되기까지 60년이 넘게 소요된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 기존 사서와 부합하지 않는다.
- 후대의 글을 인용하는 등 내용상의 모순이 있다.
- 1909년에 사망한 이기가 1911년에 완성된 《환단고기》를 감수하였다고 설명되었다.
- 신채호가 《사기집해》의 주석을 잘못 해석하고 주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전삼한, 후삼한설"이 반영되어 있다.[24]
- 이화사의 《언행록》에 수록된 시가 《단기고사》와 《환단고기》에 인용되었다.
- 《환단고기》의 내용에 따르면 남북국 시대 신라의 사람이 저술했다는 《삼성기》에 18세기 청나라 시기에 저술된 책이 인용되어 있다.
-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설명된 수메르(수밀이)와 티베트(지백특)까지 진출한 거대한 제국으로서의 고조선의 유적(거주지나 무덤)이 전혀 없다.
-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했다는 시기의 동아시아는 신석기 시대로 국가가 존재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문명이 등장하는 시기도 그 이후이다.
- 《환단고기》는 발해의 왕계보를 14대로 기록하고 있으며 13대 대현석과 14대 대인선의 시호를 각기 경제와 애제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엽 김육불에 의해 발해의 14대 왕인 대위해가 발견되면서 발해의 군주는 모두 15명임이 확인되었으며, 대현석 및 대인선의 시호 역시 당시 신라의 왕 경애왕을 오독하여 나타난 것임이 밝혀졌다.[25] 이는 《환단고기》가 발해의 왕에 대한 정확한 옛 기록을 참고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 《환단고기》의 천문 기록을 통한 증명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다. 전용훈 박사는 오성취합이 5세기 경 중국의 천문 서적에서 계산 방법이 밝혀진 것임을 지적하며 후대에 하나라가 상나라로 교체되는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계산하여 기록한 것을 《환단고기》에서 사용한 것임을 지적하였다.[26] 실제로 《죽서기년》에는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 때의 오성착행(五星錯行)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시기도 《환단고기》와 근사하다.
중도론[편집]
《환단고기》가 복원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가필되었음은 인정하지만 현존하지 않는 모본(母本)이 있을 수 있고, 그 내용에 포함된 《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은 대한제국이나 일제 강점기 초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환단고기》에는 전래되는 선가 계통의 흐름이 표출되었으리라는 의견이다. [27]
이러한 견해는 변용된 정도를 잘 알 수 없으므로 역사 연구에 활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 [28]과, 직접적인 인용은 피하면서 대체적인 흐름만은 참조할 수 있다는 주장 [29]이 있다. 다만 후자에서 천문학을 동원해 역사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박 [30]도 있다.
조작설[편집]
《환단고기》는 출간 경위 자체에 모순이 많다. 이러한 모순을 추적하여 《환단고기》 자체가 이유립에 의해 조작된 창작물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 저자인 계연수는 과연 실존인물인지도 의심되고 있으며, 《환단고기》의 전래 내력에서 전하는 행적과 단군교에서 전하는 행적이 완전히 모순된다. 1917년에 단군교에 의해서 공개된 〈천부경〉의 전래 내력에 따르면 계연수는 1916년 이전까지 〈천부경〉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31] 그런데 계연수가 1911년에 썼다는 《환단고기》에는 〈천부경〉이 실려 있어 1920년대 계연수의 행적과 전혀 다르다.
- 《환단고기》에 수록된 오형기의 발문에 따르면 《환단고기》는 1949년에 강화도의 대시전에서 정서되었다고 하나, 실제 강화도의 대시전은 이유립이 교주로 있는 소수종교인 태백교의 교당으로 건립된 연도가 1969년이다.[32] 즉, 아직 건립되지도 않은 건물에서 정서하였다는 것이다.[33]
- 이유립은 1970년대 초반부터 《환단고기》의 일부 편목이나 구절을 자신의 저서 《참된 조국의 상:세계문명동원론》이나 정훈잡지 《자유》에 공개하고 있다.[34] 이렇게 공개된 부분은 1979년에 공개된 《환단고기》 및 1983년에 다시 출간한 《환단고기》와 다른 부분이 많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오류를 바로잡거나 교열하여 나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환단고기》의 내용 가운데 상당부분은 《단기고사》 및 《규원사화》와 문장 구조.까지 완벽하게 일치한다. 일치하는 부분을 분석해 보면 《환단고기》가 다른 두 책을 결합하여 베껴 썼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35] 이와 같은 근거를 토대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1970년대부터 창작 및 조작하여 1979년에 완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즉,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고대 역사서를 위장하여 만든 창작물이라는 것이다.[36]
민족주의 성격에 대한 의문[편집]
《환단고기》가 민족주의 역사책이라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37] 민족주의, 특히 피식민지 상태의 민족에게서 두드러진다고 평가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특징은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배타적인 민족 구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이러한 배타성보다는 일본 제국이나 나치 독일 등에서 유행한 확장적 민족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 [38]
동북공정[편집]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환단고기》를 이용하여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동북공정을 주도한 학자 가운데 하나인 유자민은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주장이 비학술적이라 비판하였는데, 그 논거로 《환단고기》를 들고 있다. 실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판단하여 사료로서 사용하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유자민은 《환단고기》에 입각한 비주류의 견해만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왜곡을 통해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신뢰성을 낮추려는 의도를 의심할 수 있다. [39]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일부에서 동북공정에 맞설 수 있는 기록이라 주장하기도 하는 《환단고기》가 오히려 동북공정에 도움을 주고 있는 아이러니가 지적되기도 한다. [40
역대 환인[편집]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의 존속기간은 3,301년, 혹은 63,182년 동안 왕이 7대라고 한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환인은 다음과 같다.
- 1대 환인: 안파견(安巴堅) 환인
- 2대 환인: 혁서(赫胥) 환인
- 3대 환인: 고시리(古是利) 환인
- 4대 환인: 주우양(朱于襄) 환인
- 5대 환인: 석제임(釋提壬) 환인
- 6대 환인: 구을리(邱乙利) 환인
- 7대 환인: 지위리(智爲利) 환인 또는 단인(檀仁)[12]
7명의 환인
1인당 평균 수명 471년 혹은 9026년
환단고기에서는 환웅이 1,500여년 동안 배달국을 다스렸다고 주장하며 그 역년을 기록하고 있다.
- (기원전 3898년): 거발한(居發桓)환웅, 재위 94년, 120세
- (기원전 3804년): 거불리(居佛理)환웅, 재위 86년, 102세
- (기원전 3718년): 우야고(右耶古)환웅, 재위 99년, 135세
- (기원전 3619년): 모사라(慕士羅)환웅, 재위 107년, 129세
- (기원전 3512년): 태우의(太虞儀)환웅, 재위 93년, 115세
- (기원전 3419년): 다의발(多儀發)환웅, 재위 98년, 110세
- (기원전 3321년): 거련(居連)환웅, 재위 81년, 140세
- (기원전 3240년): 안부련(安夫連)환웅, 재위 73년, 94세
- (기원전 3167년): 양운(養雲)환웅, 재위 93년, 139세
- (기원전 3071년): 갈고(葛古)환웅 또는 독로한환웅 재위 100년, 125세
- (기원전 2971년): 거야발(居耶發)환웅, 재위 92년, 149세
- (기원전 2897년): 주무신(州武愼)환웅, 재위 105년, 123세
- (기원전 2774년): 사와라(斯瓦羅)환웅, 재위 67년, 100세
- (기원전 2707년): 자오지(慈烏支)환웅, 치우천왕이라고도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 15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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