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왜.패잔병들이. 귀국을 포기하고 조선에 귀순하여 남아있는 이유는.
흠. 글쎄요. 징집된 농민출신 병사라든지. 하급무사계급이든지. 돌아가봤자. 이곳이든ㅈ 저곳이든 별다를것 없을 상황이던가.7년이란 오랜기간동안 치루어진 전쟁통에. 반전사상? 혹은 회의가 일어난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리고 항왜가 남아 있었던 이유중에는 항왜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정부 입장에서도 쓸만한 무리들이였기에. 허락하에. 존재할수 있었던게 아닐까요?
김충선이니. 여여문이니.실록을 찾아보면 있지 않을가 싶네요.
그냥 전쟁 와중에 못돌아간거죠. 지금 이태원이 항왜병들이 살던곳입니다. 이들도 참 비참한 최후를 맞았죠. 무인들이다 보니 조선에서 할일이 없었고 적응이 쉽지 않았고 조선은 노예사회인데 노예들이 직업이 어딨어요. 조선엔 직업이라는게 없으니 장사를 할 수 있나..농사도 양반들 소작농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고..양반들은 노예 3천명 보유 이런식이라 굳이 포악 사나운 항왜병을 쓸 이유가 없죠. 항왜병이 양반노예가 될 턱도 없고.. 결국 자기들 끼리 모여살다가 병자호란때 선봉에 서 상당한 활약을 하지만 상당수가 죽고 이괄의 난때 항왜병들을 끔직히 위했던 이괄에 충성하다 전원 몰살..처참한 최후로 끝났습니다.
이 사람은 이전에 잡게에서도 이런 허접한 소릴
쳐하더만 ㅋ 양반들 노예 3천명?? 이건 뭔 ㅋ
조선왕급이군 ㅋ 그리고 조선이 노예사회?? 무식
작렬하군 참 ㅋ (하긴 왜국이야 사람 사고 파는
노예 사회였긴 했지)
조선은 못살아 기어들어온 왜노들도 사람 취급해줘서
사고 파는걸 금지했구만 무슨. 조선에서 노비는
천인 개념 즉 천한 일을 하는 낮은 직종의 머슴같은
부류지 무슨 되지도 않은 노예 어쩌고임 이것도 18세기
에 가면 신분제 자체도 점차 와해되어
19세기초 즉 1801년 순종이 즉위하자 말자 왕이
알아서 공노비를 해방시킨 나라구만 무슨 왕조시대
왕 스스로가 신분제 타파를 시켰던 나라가
세계사에서 어디 있는지나 쳐보기 바람
( 하긴 잽은 21세기도 전근대적 천민부락쿠가 전국
에 4300여개나 여전히 존재하는 나라니 )
글구 이전부터 무식하게 조선은 직업이 없었다는 둥
어처구니 없는 허접소릴 계속하는데 뭘 알고나
이런 소릴 떠드심??
애초에 항왜라는건 스스로가 투항해서 임진시기
왜구격퇴에 동조한 왜구저항 귀화인을 말하는
그 항자임. 당시 토요토미는 전국을 무력통일
하면서 중소 영주가문들을 무참히 학살하면서
복속시켰고 그에 따라 강제적으로 조선 침략에
끌려간 세력도 존재했음 그기에 전국시대
왜국 지배자들 사이에서는
<조선대국관 > 즉 조선의 발달한 문명등 대국으로서
조선임금을 실제 황상 황제로 부르면 흠모했고
대표적 항왜 귀화로 성씨까지 하사받은 김충선 장군
들은 기록만 봐도 이런 선진 문명과 군자의 나라
에 차마 침락함이 마땅치 않음에 항왜가 됨을
이야기하고 있음 그리고 이후 조선은 기존 중화기뿐
아니라 개인조총 편제에도 집중육성 했고 이에따라
그 귀화한 항왜들이 큰 역할을 했고
그들 후손들은 지금도 여엿한 울국민으로 잘 살고 있음.
하멜표류기 한번 읽어 보시길. 다른 기록도 뒤져보시고. 새누리도 일베도 극렬국뽕이죠. 국뽕의 실체가 뭘까요? 명량 1700만이 보는데 왜 매종족들이 넘쳐날까요? 사기공화국이 될까요? 소통과 신롸가 단절된 영혼이 없는 사회가 될까요? 군에선 사람을 패죽이고 대체 누가 명량을 보는 걸까요? 왜 볼까요? 국뽕이 악용되고 있습니다. 굿잡스가 그런 부류라고 보네요.그동안 글을 보면..
< 녹동서원 >
임진시기 대표적 항왜세력인 사야가는 조선 임금에
하사받은 김해김씨 성에 나라에 충성하는
김충선. 동래전투에서 3천명을 끌고왔지만
명분없는 전쟁에 다음날 투항
임진시기 78회 전투에서 조선관군과
함께하며 승전의 공을 세움
그의 후손은 현재 17대 2000세대 7000여명으로
대표적으로 김치열 전내무부장관 김재기 전수원지검
장등 당당한 대한국민으로 잘들 살고 있고
김충선 장군의 묘와 발자취는 이 서원에서 확인가능
일단, 당시 조선군관민의 일본군에 대한 반감이 심각했죠.
그러니 300명 이상 무리짓지 않으면 이동하지도 못하게 할 정도였고,
그만큼 의병들이 소수로 찢겨져 있던 일본군을 호시탐탐 노려서 공격했다는 소리지요.
그러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은 부대단위로 뭉쳐서
한반도 중부, 북부에서 내려와 경남 해안에 쌓아놓은 왜성에 들어가 있던게
당시 일본군 상황이죠.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보더라도 왜교성에서 1만4천 병력이 뭉쳐있었고,
가토 기요마사도 울산왜성에서 조명연합군한테 포위당해 있엇죠.
시마즈 요시히로군도 사천왜성에 주둔하고 있었죠.
즉, 이처럼 일본군 각 군이 집단으로 뭉쳐서 여차하면 바다로 튈 태세였고..
노량해전의 경우처럼 배타고 도망치다 바다에서 빠져 죽으면 죽었지,
항왜가 되지 않고, 조선에서 잔류해 살아남았다는건.. 어려운 일이라 봅니다.
그 중 혹여 살아남은 경우라도 거의 살기위해선 항왜의 길을 택해야 했을테구요.
즉, 일본군의 정체성을 갖고 조선에서 잔류해서 살아간다는건 극히 어려운 일이라 봅니다.
그리고 뭐.. 사천왜성, 왜교성, 울산성의 경우엔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 외의 부산쪽의 부대들은 거의 공격목표가 아니었으니 대부분 순조롭게 탈출했을겁니다.
왜교성의 고니시를 도와 철수를 지원하러온 왜군들도 경남, 부산쪽에서 온 병력들이구요.
이 병력들은 거의 절딴이 나죠. 500여척 중 50척만 돌아갔으니까요.
나중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당시 큐슈의 패권을 차지한 다이묘인 시마즈 요시히로가..
고작 2천명의 군세를 동원해서 무안을 사기도 했는데, 뭐~ 동군, 서군 둘다 양다리 걸치느라
그런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노량해전에서 병력을 거의 상실한 일 때문이라는 설이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