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새 잡담게시판으로 가기
(구)잡담게시판 [1] [2] [3] [4] [5] [6]
HOME > 커뮤니티 > 잡담 게시판
 
작성일 : 20-10-14 14:42
한국은 중국의 하인이라는 논리 대응법
 글쓴이 : 대숑여사친
조회 : 1,057  

중국은 모두의 하인 (여진, 몽골, 영국, 일본 등...)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일본이 폭망했으면 좋겠다. 중국은 다 뒤졌으면 좋겠다. 북한은 좀 정신차렸으면 좋겠다. 강해지자! 지금보다 더 !>>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치즈랑 20-10-14 14:43
   
중화상상이죠~
스포메니아 20-10-14 14:43
   
실제로 현재 전세계의 모든 선진국이 중국을 하인으로 부려먹고 있어요.
센타우리인 20-10-14 14:43
   
개소리에 욕 한바가지 퍼부어주면 되지 뭘 대응까지...
     
대숑여사친 20-10-14 14:45
   
흥분하면 역효과 나죠. 왜냐면 중국은 수준이 미개하거던요.
          
몬타나 20-10-14 14:48
   
미개해서 바른말 해도 못알아 먹음
암바구룬 20-10-14 14:45
   
중국은 갈기 갈기 쳐 찢어버려야 함. ㅇㅇ
달보드레 20-10-14 14:46
   
뭔 개솔??????

좀!

씨 발아!
꾸암 20-10-14 14:48
   
짱국이 가끔 이렇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는게 또 쏘쏘 ㅋ
굿잡스 20-10-14 14:51
   
[숙원잡기]의 기록에는,《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서토보다 앞선 동아시아 최초의 고조선 금속갑옷     

http://cafe.daum.net/luck5194/MFUT/283?q=%B5%BF%BA%CF%BE%C6%20%B0%A9%BF%CA%C0%C7%20%BF%F8%C1%B6%20%B0%ED%C1%B6%BC%B1-%20%B0%ED%B1%B8%B7%C1

고대 한류로서 갑옷문화의 국제적 위상(1)    
고조선 갑옷이 중국에 준 영향    

http://m.breaknews.com/a.html?uid=196626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 <최치원전>

해동의 두 번을 비록 지난날 원정했으나, 감히 고구려 요수를 건너지 못했고, 백제 큰 바다의 물결을 넘을 수 없었다. 해마다 자주 병사를 보냈으나, 중국이 부서지고 소모되었다. 이미 지난날의 일이지만, 나는(당 고종) 그것을 후회한다.

- 『册府元龜』 卷981 外臣部36 備禦4 唐 高宗(678)


'요동에서 헛되이 죽지 않으리(无向辽东浪死歌)'

http://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wr_id=190581

북위의 권력을 쥔 고구려인    

http://blog.naver.com/csred7/80130397982������


(이때문에 고구려의 장수태왕이나 문자명태왕이 서거를 하면 북위의 황제나 최고 권력자가 애도를 거행하는 기록들이 그래서 나오게 되는 역사적 배경)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그때 그의 나이는 98세였다. 임금의 호를 장수왕(長壽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효문(孝文)이 이 소식을 듣고, 흰색의 위모관(委貌冠)과 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79년(서기 491) 


28년(서기 519),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문자명왕(文咨明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 
  
二十八年 王薨 號爲文咨明王 魏靈太后擧哀於東堂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28년(서기 519) 



정강의 변 : 서토 송이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굿잡스 20-10-14 14:56
   
정강의 변(靖康之變)

서토인 하한족의 송이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여진(女真)의 추장은 곧 신라인인데, 완안씨(完顏氏)라 호칭하였다. 완안(完顏)은 한어(漢言)로 「왕(王)」과 같다.

ㅡ『송막기문』남송 홍호가 포로로 잡혀간 송 군주의

송환을 위해 15년간 대금의 유배생활을 보내면서 쓴 견문록.


어떤 이가 이르기를, “옛날에 우리 평주(平州)의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를 일컬어 금의 선조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평주의 승려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 여진에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았는데, 여진의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 태사(古乙 太師)라 하였다. 고을이 활라 태사(活羅 太師)를 낳았다. 활라에게는 아들이 많았는데, 맏이를 핵리발(劾里鉢)이라 이르고, 막내를 영가(盈歌)라고 일컬었다. 영가가 가장 재지와 용력이 뛰어나[雄傑], 뭇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으니 핵리발의 맏아들인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하였다. 오아속이 죽으니 동생인 아골타(阿骨打)이 섰다.”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8 > 예종2(睿宗二) > 예종(睿宗) 10년 > 1월


흑수말갈은 숙신땅에 살았는데 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남으로는 고구려에 접하였다. 또한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일찍이 15만 병사(소수 인구였던 흑수병력수는 그중 일부를 차지)로 고구려를 도와 당태종과 대적하였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패하였다.(주필산 전투에서 이세민의 계략에 전초 일부가 패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력 10여만 대군은 건재 안시성의 수성과 함께 야전에서 효과적으로 당나라 대군을 내지로 들어 오지 못하게 수개월 봉쇄.

결국 당 이세민은 요동의 밀집 외곽 방어선을 제대로 뚫지 못한채 허겁지겁 도망가듯 퇴각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다 돌아와 병사)

개원의 시기에 당(唐)에 내조하자 당은 흑수부(黑水部)를 설치하고 추장들에게 도독, 자사의 지위를 주었고 당은 장리를 두어 그들을 감독하였다. 당은 도독에게 李씨 성과 헌성(獻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흑수(黑水)경략사 직무를 맡겼다.

그 후 발해가 강성해지자 발해에 복속되었고 당에 대한 조공을 끊었다.

5대시 거란이 발해지역을 모두 점령하자 흑수말갈은 다시 거란에 복속되었다. 흑수말갈의 남쪽 거주자는 거란 국적하에 있었고 숙여직(熟女直)이라 불렀으며, 흑수말갈의 북쪽 거주자는 거란 국적하에 있지않았고 생여직(生女直)이라 불렀다.

 

생여직 땅에는 혼동강, 장백산이 있었는데 혼동강(混同江)을 흑룡강(黑龍江)이라 불렀고 소위 백산흑수(白山黑水)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高麗)에서 왔는데 나이 이미 60여세였다.

형 아고내(阿古迺)는 불교를 좋아해 뒤에 따르려 하지 않으며 고려에 잔류하면서 말하기를, "후세 자손들은 반드시 서로 모여 만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나는 가지 않겠다."하여   함보(函普)는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갔다. 시조(始祖)는 완안부 복간수(僕幹水) 강가에 살았고 보활리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그 후 호십문(胡十門)이 갈소관부(曷蘇館部)를 이끌고 태조에게 귀부하여 왔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 형제 3인이 이별하였고 대체로 자신은 아고내의 후손이라 하였다. 석토문(石土門)과 적고내(迪古乃)는 보활리의 후손이라 하였다.

태조가 국경에서 요병을 패배시키고 야율사십(耶律謝十)을 사로잡자 양복(梁福), 알답자(斡答刺)로 하여금 발해인을 회유하면서 말하기를, "여직(女直)과 발해(渤海)는 본래 한 집안입니다."라 하였다. 대체로 초기에는 모두 물길 7부였다.

시조(始祖)는 완안부(完顔部)에 이르러 오래 살았는데 그 부 사람들은 일찍부터 타족 사람들을 죽였고, 이로 인해 양족은 원한으로 싸움이 그치질 않아 해결되지 않았다. 완안부(完顔部) 사람들이 시조에게 말하기를 . "만약 당신이 완안부 사람의 복수심을 서로 풀어주어 양족이 서로 죽이지 않게 해 준다면, 완안부에 나이 60에 미혼녀가 있으니 서로 결혼시켜 주고 완안부 사람이 되게 할 것이요."라 하였다.

시조(始祖)는 말하기를, "좋습니다."고 하였다. 마침내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 타이르기를, "사람 1명을 살인한 후 싸움이 해결되지 않으면 손상은 점점 더 커집니다. 살인사건들에 대해서는 주모자 1명만 처벌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물건으로 보상토록 하면 싸움도 그치고 이득도 될 것입니다."라 하니, 피해자 가족들은 이에 따랐다.

시조와 사람들은 규정하기를, "만일 사람을 살상할 경우, 살인자가 피살자 가족에게 자기가족 1명, 암말 10마리와 수말 10마리, 암소 10마리, 황금 6냥을 주면 즉시 양측은 화해하고 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기로 한다."고 합의하였다. 이 합의에 의거하여 위 사건은 이 규정대로 시행되었다. 여진(女眞)의 풍습에 살인하면 소와 말 30마리 보사아은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살상한 자들의 배상이 규정대로 시행되면서 완안부 사람들은 이 규정을 믿고 준수하였으며 시조에 대한 사례로 청우(靑牛) 1마리를 주고 60세 된 여자를 신부로 데려가는 것을 허용하였다. 시조는 마침내 청우를 이용하여 신부집에 보낼 결혼예물을 마련함과 동시에 그의 자산을 마련하였다. 후에 아들 둘을 낳아 오로(烏魯), 알로(斡魯)라 하였고 딸 하나를 낳아 주사판(注思板)이라 하였는데 이로써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천회 14년(1136년) 함보는 시호를 경원황제, 묘호를 시조(始朝)라 하였다.

황통 4년(1144년) 그의 능묘를 광릉(光陵)이라 하였다.

황통 5년 시호를 추증하여 시조의헌경황제라 하였다

ㅡ금사(金史) 서문 중
굿잡스 20-10-14 15:11
   
기본적으로 우리 대(삼)한족은 요하와 연해주 한반도를 아우러면서

스스로 독자적 고조선 고구려 동방문명권을 구축 발전시켜 나갔으며

천여년 열도를 개척 지배하면서 일본을 세우는등 수천년 인류 문명사에서 높은 수준의 문명을 일구면서 유라시아와 교류.

근현대에 수천년 우리의 발 아래에 있던 미개 왜구에게 우리 역사상 국호가 상실되는 유례없던 35년 침탈의 통수를 맞으면서 인류 문명사의 주류에서 잠시 밀려나 이후 남북 전쟁으로 초토화까지 되었지만

이미 1600여년전 부터 세계 최초의 귀족뿐 아니라 서민을 위한 경당등 선진 교육 인프라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유럽의 종교혁명과 지식혁명의 도화선) 와 독자적 문자를 만든 문명인의 오랜 문화적 DNA는 잠시 멈춘 우리의 문명 진보의 수레 바퀴와 호기심 학습력(욕)을 더욱 자극 폭발 촉진)
굿잡스 20-10-14 15:16
   
남북국시대 발해 이후 등장하는 북방의 패자 거란의 요나

이후 발해후예 부흥국 세력과 신라계 황제 결합의 대금등이

우리쪽 고구려나 신라등과 지속 언급 얽혀 있는 것도
(실위 후대 몽골등도 고구려 휘하 부용세력)

유럽으로 치면 천년 로마제국의 역사와 영향력에 바탕한 주변 봉신 부족 세력들이 이후 국가를 세워도(부족 개념이던 폴란드의 본격 왕국개념의 틀이 되는 피아스트 왕조도 10세기에서야 등장) 그 역사의 직간접적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들 동북방의 거란, 말갈(여진)등과 열도의 왜 역시
수천년 동방문명권을 구축 군림해온
우리 고조선 고구려문명권의 영향력 때문임을
우리 역사에 대해 스스로 자각할 필요가 새삼 있을 것이군요.

고구려의 토대가 되는 초기 토착재지 5부는 이후 신성한 태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점하며 천하를 지배하는 5부 행정  대도시 문명으로 발전 이후

 발해 5경과 신라 5소경에 이런 발해의 5경 체계는 다시 북방의 패자가 되는 요의 5경 체계로 금  역시 고구려계 국무총리가 송을 멸망시키고 북경에 중도 건설을 총지휘. 이후 쿠빌라이는 이런 요,금이 닦아놓은 강북을 기반으로 몽골 내부 분열시기에 물자를 통제하면서 대칸에 오를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됨.(이를 바탕으로 남송 정벌)


우리 대한족은

신대륙의 발견으로 20세기 본격 등장한 미국이라는 신생제국이 생겨나기 전

세계사적으로 원탑급 물량 체급의 서토문명사과 맞대응

수천년 독자적 동방문명권을 구축하고 그 휘하 부용세력들이 도리어 서토 하한족을 노예로 털어먹는등

수천년 문명의  리더이자 전파자의 위치에 있던 역사였고

수천년 미개하던 쨉이 근현대 번쩍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건 아나로그 방식에서 카피캣에 여전히 머물던 왜구 방식이였지 그들 쨉 스스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 리드한 역사는 전무(이러니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전형적 아나로그 사회 정치 시민의식에 매몰된 쨉은 이미 한계에 봉착)


또한

서토 황하의 하한족들은 실체하는 왕조인 상나라 자체가

만리장성 밖 동북방에서 남하 서토 황하 내륙의 하한족을

정복 군림한 이민족 정복사에서 시작되어

마지막 청왕조 마저도 정복왕조로 수시로 북방과 동방 이민족에게 털리거나 지배당한 수천년 피지배 노예사로 점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