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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5-24 23:33
일본, 중국 대항하여 아시아 리더로서 능력 없어
 글쓴이 : 투완나YTC
조회 : 3,747  

https://i.imgur.com/m5Hy52I.jpg

Analysts said that Japan is incapable of leading Asia-Pacific countries against China. But it was using the event to sound the countries out. Be it to criticize China or take sides, Japan didn't expect to see those participants make statements that met what Tokyo wants. Because it is aware that it cannot make it.  

전문가에 따르면, 
일본은 반중국 관련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의 선도 국가로서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번 행사를 통해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에게 일본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함이다.
(애초에) 일본은 참가국들이 중국을 비난하거나 편을 들어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본 스스로도) 불가능한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기사 풀이 : 일본이 쥐뿔도 없으면서 아시아 큰형님 행색을 내려함

https://www.globaltimes.cn/page/202105/1224252.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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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귀요미지훈님 글에서 일본 극딜하는 기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런 건 박제를 해야 제맛이죠^^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8&wr_id=482029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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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자 21-05-24 23:52
   
일본이나 중국이나 둘다 리더가 되기에는 부족함. 유럽 상황과 비슷. 경제적으로는 독일이 문화적으로는 프랑스가  이끌고 영국도 한 때 제국이었만 스스로 유럽이라고 생각안함. 아시아도 경제적으로는 중국이 문화적으론 한국이 이끌고 일본도 한때 아시아를 제패한 제국이었지만  스스로 아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음. 그래서 유럽 아시아 어느 나라도 자기들 지역을 주도를 하지 못하고 미국에 끌려다님.

무엇보다 식민지제국주의 시대도 아닌 현시대에서 리더가 되려면 리더를 따르는게 자국에 이익이 되어야 함. 그런데 일본은 과거의 골목대장 시절에 동네사람들을 괴롭힌 전과가 있어서 리더가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입증한 과거가 있고 지금 중국은 리더가 아니라 옛날 일본이 했던 동내 골목대장이 되려고 힘을 과시중일 뿐인 것임.
구르미그린 21-05-25 00:18
   
리더국가는 역사적으로
19세기까지 동아시아에서 중국, 20세기 이후 세계적으로 미국 외에 꼽기 어렵습니다....

한국이 역사적으로 드문 두 초강대국 사이에 있기에
"명에 붙었다가 청에 얻어터진 어리석은 조선. 21세기에 중국이 패권국 될 테니 한국은 눈치 보다가 중국에 붙어야 한다"
는 논리가 90년대 이후 한국 지식인, 언론, 정치인에게 널리 퍼졌고
가생이에도 그런 시각/논리를 바탕으로 쿼드 합류에 반대하는 이가 많습니다.

중국이 결국 패권국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미국의 중국포위망에 가담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은 것 같고, 한국정부도 그런 인식으로 외교정책을 펴는 듯 보이는데,
그럴거면 최소한 국내에서 중국인에게 털리지 않게 외국인 정책을 신경쓰는 편이 낫습니다.
지금 추세대로 중국인 대량이주가 이어지면 패권전쟁에서 누가 이기든 한국국민이 일본국민보다 먼저 후달립니다.
조선이 굴욕외교했다고 까는 이가 많지만, 최소한 조선은 19세기 중반까지는 국내에서 외국인에게 털리지 않았기에 지금 한국의 2배 이상 영토를 가지고 500년을 버텼습니다.
한국은 미국 덕에 독립했으면서 80년도 안 지나 역사의 교훈을 다 까먹은 것처럼 정책이 나오니 위험합니다.
     
굿잡스 21-05-25 00:25
   
현대의 쭝국(쭝공)이라는 특정 국가명사와는 달리

※ 근대 이전의 쭝국이란

서토 내륙 황하 하한족들을 정복 지배 군림하면 누구나 될 수 있던 추상 지리 명사.

그리고 그때마다 이민족의 복식등 문화들이 강제 주입 중구난방화(현재는 본인들도 본인게 몬지 제대로 모르니 한복등 주변국에 온갖 해괴한 역사, 문화공정질)

서토국 (하)한족= (북방과 동방 이민족에 수시로 털리고 정복 당한)피지배 노예사로 점철.
     
굿잡스 21-05-25 00:26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수렵에서 저장 개념의 혁명적 신석기 토기인

빗살무늬 토기의 발명지인 한반도를 중심으로 요하로 북방 초원길(동서양 문명의 하이패스 길)을 따라 유라시아로 이미 점차 교류.

이런 기반 위에 중동의 채도 즉 채색 토기가 요하일대로 전파되어 서토 내륙 황하 하한족보다 앞서 출현.

즉 유럽의 그리스 로마 지중해에 비견되는

동아시아의 서해 요하 즉 고조선 선대  문화권 지역이

빗살무늬토기문화+채도 문화+거석문화(적석총 고인돌등 이에 반해 서토 하한족은 땅  파고 묻는 매장 풍습)+세석기문화가 유일하게 중첩되어 나오는 엄청난 신석기 교차 지역 문화

이런 발달한 신석기 요하문화와 이후 청동 철기등도

서토 내륙 황하 하한족보다 더 이른 시기에 나오는등

이런 선진문화로 무장한 일부가 갈라진 동방 이민족이 동북방에서 남하 황하 하한족을 정복 군림하고 나온게

서토 최초의 실체하는 정복 왕조인 상왕조(동북아 공용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 창조)



신석기 혁명, 빗살무늬 토기의 발명지. 

유라시아의 동쪽, 한반도가 가장 앞선 지역이었던 이유 

https://news.v.daum.net/v/20171015140004655?rcmd=rn&f=m



[한자의 원형] 복골 및 갑골문자

https://que-sais2020.tistory.com/m/384?category=924910


서토보다 앞선 동아시아 최초의 고조선 금속갑옷 

http://cafe.daum.net/luck5194/MFUT/283?q=%B5%BF%BA%CF%BE%C6%20%B0%A9%BF%CA%C0%C7%20%BF%F8%C1%B6%20%B0%ED%C1%B6%BC%B1-%20%B0%ED%B1%B8%B7%C1����


"제천행사 '무천'은 동예 아닌 고조선 풍속"


'돈황문서' 고구려사료 첫 발견


돈황문서의 하나로 포함된 토원책부(兎園策府)라는 글 주석에 고조선의 풍속으로 10월에 제천행사인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牛蹄占)이 있었다는 기록을 새로 발견했다.

현재까지 국사교과서에는 고조선 이후 동예가 '무천', 부여는 '영고(迎鼓)', 고구려 '동맹(東盟)'이란 제천행사를 지낸 것으로 실려 있다.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050614.010141015020001


군사적인 행사가 있으면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소를 잡아 그 굽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치는데, 굽이 흩어지면 흉한 것으로 여기고, 합쳐지면 길한 것으로 여긴다.

ㅡ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우제점)

위략에 말한다 : 그 나라는 매우 부유하며, 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한번도 파괴당한 적이 없다.

그 인장에 이르기를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고 하였고, 나라에 예성(濊城)이라 이름하는 옛 성이 있으며, 대개 본래는 예맥(濊貊)의 땅으로, 부여가 그 중의 왕이 되었으니, 스스로를 가르켜 '망인(亡人)이라 한 점에도 이런 까닭이 있을 것이다.


ㅡ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

“단군(檀君)은 실로 동방의 천황(天皇)인데,

그 사우(祠宇)도 잘 정비하고 있는지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근신(近臣)을 보내 치제하고자 하니 입시한 승지가 가서 거행하고, 사전(祠殿)이 허물어진 것을 수리하지 않았으면 또한 본도(本道)에 신칙하여 즉시 수리한 다음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라.”


檀君, 實爲東方之天皇矣。其祠宇, 亦安保其能修治耶? 欲爲遣近臣致祭, 入侍承宣, 其往擧行, 祠殿如不修廢, 亦爲申飭本道, 俾卽修治, 仍爲狀聞, 可也。


ㅡ승정원일기  영조 8년
     
굿잡스 21-05-25 00:27
   
■ 서토 북조사를 연 북위도 고구려의 준식민지급.



북위가 고구려와 동맹 강화를 위해 당시 고구려 귀족 가문과 혼인을 하는데 이 문소황후의 아들이 8대 북위 선무제로 등극.

이후 지지 기반이 약했던 고구려계 선무제는

자신의 외삼촌인 고조와 고현을 불러 들이고 아예 고구려인만 따로 추대하는 고려국대중정(高麗國大中正)이라는 벼슬까지 만들어 북위 조정내에 고구려파벌 붕당을 만들어 장악해버림.


북위의 권력을 쥔 고구려인   

http://blog.naver.com/csred7/80130397982������


(이때문에 고(구)려(KOREA)의 장수태왕이나 문자명태왕이 서거를 하면 북위의 황제나 최고 권력자가 애도를 거행하는 기록들이 그래서 나오게 되는 역사적 배경)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그때 그의 나이는 98세였다. 임금의 호를 장수왕(長壽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효문(孝文)이 이 소식을 듣고, 흰색의 위모관(委貌冠)과 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79년(서기 491)


28년(서기 519),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문자명왕(文咨明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
 
二十八年 王薨 號爲文咨明王 魏靈太后擧哀於東堂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28년(서기 519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 ... 나라시대(奈良時代-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고 말해 전체적으로 일본고사기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요서 선비족 왕조를 이은 고구려계 북연등이나 내몽골에 출토되는 나뭇잎 형식의 우리 (고조선)고구려계 금(동)관 출토나(이런 우리 고조선 고구려 천하관을 알 수 있는 금관은 애초에 서토 내륙 황하 하한족에서는  나오지 않는 우리쪽에서 두드러지는 큰 특징 중 하나.

전세계에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14개 중 10개가 우리쪽에서 발굴. 나머지도 북방 유목쪽. 우리는 신라의 계림을 상징하는 출자 금관부터 우리 고조선 고구려 통치자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불꽃 문양이나 조우관 나뭇잎 형식등 광명 하늘숭배  천손사상을 바탕으로 한 두드러지는 독자적 금관 양식이 주류)

서토 북조사를 연 북위에 황제로 등극한 고구려계등 선비족 문화에도 당시 우리 고구려의 정치 문화 인적 영향력과 투사력이 상당했던 시기.
     
굿잡스 21-05-25 00:27
   
정강의 변 : 서토 송이 신라계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大金皇帝寄書于高麗國皇帝

"대금 황제가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 ㅡ帝王韻紀



서기 1334년 5월, 원(元)나라 사람의 요청으로 고려 사경승(寫經僧·불경의 글과 그림을 필사하는 승려)이 제작한 감색(紺色) 종이에 금가루로 그린 변상도(變相圖·불교의 경전 내용이나 가르침을 알기 쉽게 그린 불화)가 발견됐다. ‘고려사(高麗史)’는 원나라가 고려 사경승을 원으로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을 정도로 고려의 사경(寫經)기술이 뛰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현전 최고(最古) 유물로 평가된다.

https://www.google.co.kr/am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3/06/23/2003062370319.html%3foutputType=amp



몽골 황실과 조정내에는 다양한 고려 양식(고려 의복이나 모자 신발 바둑 고려청자 고려한지 나전칠기 화문석 약과 시루떡 상추쌈등) 뿐 아니라 이런 수준 높은 불교 예술 문화나

세계제국의 통치자였던 대도의 쿠빌라이가 병석에 눕자 주변에 이름난 의원들도 못고치던 병을 신라시대 설총의 후예라는 고려 의원 설경성이 쿠빌라이와 이후 성종을 고치는등 뛰어난 고려 의술을 펼치거나

서구로의 중세 암흑기를 깨고 종교 지식 혁명을 촉발시킨 세계 최초의 고려 금속활자 기술도 이 시기에 전파 및 고려국 유학등이나 고려 몽골간의 다양한 학문 연구 결속과 증진등 여러 방면에서 고려와 몽골간에 수준 높은 문화적 정치적 교류가 증진되었군요.

서토 한족을 노예로 지배한 몽골제국에서 수준 높은 고려(KOREA)의 다양한 문화가 상류 문화로 자리하면서 이후 서토 명 한족 왕조시기에서도 여전한 영향력을 발휘.
     
굿잡스 21-05-25 00:28
   
서토 한족들은 몽골제국 시기에도 최하층 사고 팔리는 노예등급으로 전락.

신라계 황제의 대금의 여진족은 본인들의 부족한 내치 행정과 문화를 오랜 지역 공동체였던(요동) 우리 발해인(고구려계)과 연합. 이들을 황실의 외척으로 대거 받아들이면서 수준 높은 문화와 도시문명을 유지했고(서토 송을 멸망시키면서 북경에 고구려계 국무총리격인 장호가 중도 건설 총지휘)

이후 쿠빌라이는 내부분열시기에 이런 북방의 요, 금이 닦아놓은 강북을 기반(발해인들은 원 초기에도 정체성을 유지) 대칸에 올랐고

이후 고려가 강화를 맺고 부마국이 되면서 이런 몽골 황실의 문화적 욕구 역시 수준 높은 고려가 충족시키게 되군요.

이 때문에 원 조정내에 고려양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고

이후 원을 몰아낸  명조차 이런 기존 상류 문화의 고려양이 전기에도 상당히 유행.


명나라 육용의 [숙원잡기]의 기록에는,《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명말청초의 만주족 청에 의한 명나라 서토인 대규모 학살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굿잡스 21-05-25 00:31
   
도표로 한눈에 보는 천년 사직 고(구)려(KOREA)의 위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1002&logNo=30152299778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 <최치원전>

海東二蕃, 往雖旅拒, 高麗不敢渡遼水, 百濟未敢越滄波. 往者頻歲遣兵, 麋費中國, 事雖已往, 我亦悔之.

해동의 두 번을 비록 지난날 원정했으나, 감히 고구려 요수를 건너지 못했고, 백제 큰 바다의 물결을 넘을 수 없었다. 해마다 자주 병사를 보냈으나, 중국이 부서지고 소모되었다. 이미 지난날의 일이지만, 나는(당  고종) 그것을 후회한다.

- 『册府元龜』 卷981 外臣部36 備禦4 唐 高宗 儀鳳3年(678) -




요동(KOREA)에서 헛되이 죽지 않으리(无向辽东浪死歌)'

http://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wr_id=190581



왜 여직(진)발해본동일가(女直渤海本同一家)라고 했을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899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5%9C%EA%B7%9C%EC%B2%A0&sop=and


금나라 황실 조정내의 고구려계(발해인) 파워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106493129��������������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http://news.donga.com/3/all/20140313/61666261/1

■ 정강의 변 : 서토 송이 신라계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女真酋長乃新羅人 (송막기문- 남송기록)     
("여진의 지도자는 신라인이다")     
"其初酋長本新羅人" (몽골  금지(金志))     
(여진의  초기지도자는 신라인이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 (금사 (金史))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왔을 때  60세였다.)


USA 캘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discover誌“1998년 6월호「일본인의 뿌리」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일본 가타카나 기원은 신라 향찰·이두"  

히로시마대 교수  

http://blog.daum.net/damule/8881879
     
굿잡스 21-05-25 00:32
   
발해  

당나라 산둥 등주 공격  

장문휴는 732년(인안 13) 무왕의 명령을 받아 수군을 이끌고 산둥 반도에 있는 당의 국제무역항 등주를 공격해, 당의 동방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발해 무왕의 대외팽창에 위협을 느낀 동북만주의 흑수말갈이 발해와 우호관계를 단절하고 당과의 연결을 꾀하여 발해를 위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무왕은 흑수말갈의 정벌을 결정했으나 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발해와 당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흑수말갈의 정벌을 중지시키려다가 실패하고 당으로 망명했다.당에 대한 강경책으로 돌아선 발해는 수군을 동원하여 등주를 공격 초토화시켜버리고 육지로는 요서로 밀어버림.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무왕-  

발해가 점차 강성함에 따라 흑수 역시 그 소속이 되었다.  
-당회요 말갈-  



'고려(KOREA)국왕대흠무언(高麗國王大欽茂言)'   

≪속일본기(續日本紀)≫ ㅡ남북국시대 발해 문왕(文王) 대흠무가 왜국에 보낸 국서에.


천통 인안 대흥등 독자적 연호 사용.


인도의 타지마할의 기단 크기 94m, 건물 크기 57m

발해의 상경용천부 제2궁전 기단 크기 120m, 건물 크기 93.5m(당대 서토 당나라 장안성의 최대 건물인 함원전의 11칸보다 큰 무려 19칸)


※ (동북방의 거란, 말갈(여진)등과 열도의 왜등에)
수천년 동방문명권을 구축 군림해온
우리 고조선 고구려문명권의 영향력에 대한 자각.


고구려의 토대가 되는 초기 고조선 토착재지 5부는

이후

신성한 태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점하며 천하를 지배하는 5부 행정 대도시 문명으로 발전 이후

 남북국시대에 발해 5경과 신라 5소경에 이런 발해의 5경 체계는

다시 북방의 패자가 되는 요의 5경 체계로

대금  역시 고구려계 국무총리가 송을 멸망시키고 북경에 중도 건설을 총지휘. 이후 쿠빌라이는 이런 대금이 닦아놓은 서토 강북을 기반으로 몽골 내부 분열시기에 물자를 통제하면서 대칸에 오를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되군요.(이를 바탕으로 남송 정벌)

※ 오늘날 서토국의 수도가 북경이 된 연원.
     
개구신 21-05-26 11:56
   
아주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계시네요.
쿼드는 일본이 주도하여 만든 일시적 회의체에 불과하며, 동북아에서 대중전선을 일본이 통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 구태어 들어갈 이유가 없죠.
그냥 우리는 기존 한미동맹관계와 아시아태평양안보협력체계 안에서 제 할일만 해도 됩니다.

지금 상황에서 쿼드 들어가야 한다 주장하는 이는,
진지하게 토왜인지 아닌지 점검 해봐야 해요.
다잇글힘 21-05-25 00:20
   
근래들어서의 일본의 무능력함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라서 별로 특별한것도 없는 얘기입니다.

더군다나 환구시보의 기사인지라 별로 읽고싶은 생각도 깊게 생각할 동기도 안생기네요.
     
투완나YTC 21-05-25 00:25
   
중국발이라도 기사 내용을 보시면 수긍하게 되실거에요ㅋㅋㅋ

이렇게 깔 나라는 중국밖에 없거니와 틀린 말도 아니거든요

여튼 재미로 가볍게 보시면 좋을 듯해요
강인lee 21-05-25 00:52
   
배신이 종특인 니뽄을 누가 믿나
뽕구 21-05-25 04:18
   
이기사 거짓말임.

일본이 중국대항마로 제격임.

그러니 최전선에서 몸빵해야 됨.
한이다 21-05-25 10:07
   
리더가 되려면 일단 과거부터 제대로 반성하고 해라.

정말 진심으로 반성하고 아시아 각국 사심없이 도와주고 니들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고, 국민성 개조한다면야
리더가 되던 쫄다구가 되던 괜찮을거 같네.
흑수선 21-05-26 05:43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서 왜국과 짱국이 도토리 키재기하며 피 터지게
싸우는 거 관조하면서 미국이나 유럽과 혐력을 강화하고 국익 만 챙기면 됨.
기성용닷컴 21-05-27 07:49
   
무능해서 그냥 몸빵으로나 쓰는게 제격인 섬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