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잡담 게시판에 한글이 참 어려운 글자라는 글을 올려서 제가 단 댓글입니다. 친목 게시판에 계시는 분들에게도 소개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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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말은 배우면 배울수록 그 깊이가 더 없이 깊어지는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사랑비라는 드라마를 보니까 이런 장면이 나오더군요.
장근석이 우연히 윤아의 핸드폰을 손에 넣게 되는데 이를 돌려받으려고 윤아는 장근석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장근석과 계속 길이 어긋나는 바람에 윤아는 골탕을 먹습니다.
화가 난 윤아가 혼잣말로 이런 대사를 합니다. "죽었어~!!" 이 대사를 다른 나라 말(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번역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한번 해보셨으면 합니다. 한글을 배우고 있는 외국 사람도 이 말을 듣는다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못할 것입니다.
말 그대도 옮겨 적으면 영어로는 "died" 일본어로는 "死んだ"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 말이 모국어인 사람이라면 이 "죽었어."라는 말이 누가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겁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 말은 쓴다면 "너는 이제 죽었어."가 정확하고 완성된 문장일 겁니다. 즉, 내가 많이 화가 나서 당신을 보면 그 화를 풀겠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 문장도 문법적으로는 맞지 않는 문장입니다.
왜나면 상대에게 화를 푸는 것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문장에 사용된 동사가 과거형으로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을 "너는 이제 죽을 것이다."라고 미래형으로 쓴다면 어떨까요. 오히려 더 어색한 표현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왜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에서는 '죽다.'라는 동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기서의 '죽다.'는 생명이 끊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에게 화자가 위협을 가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나는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의지를 표명한다.'라는 의미이며, 이런 의미라면 '죽다.'라는 말이 과거형으로 쓰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너는 이제 죽었어." 이 문장의 의미는 '나는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의지를 표명했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풀어보니 "죽었어."라는 세 음절에 담긴 의미가 참으로 복잡, 미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에 쓰는 말 중에는 이런 말들이 아주 많습니다. 한글이 모국어인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이해되는 말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이런 표현들이 아주 혼란스럽고 금방 이해도 되지 않는 말입니다.
사람이 걸을 때 왼발 내딛고 다시 오른발 내딛고 하는 동작들을 머릿속에서 일일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언어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몸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 미묘한 한글이 우리들의 몸속에 배어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큰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큼 대단한 국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