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선진 청동기 시대를 구가하며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문명권을 구축한 우리의 최
초 국가인 고조선은 말기에 가면 철기시대로 본격 돌입하면서 각처에서 왕을 자처하는 열
국시대로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그 중심에 북만주의 강자 부여가 있고 이 부여가 흔히 말하는 예맥계 말갈족(후대 여진
족)입니다. 이들은 이후 부여에서 나온 천년사직 고구려(KOREA)에 의해 만주와 한반도
일대가 재통합되고 이후에도 발해 건국의 주도세력이였고 탈출한 고구려 군사와 함께
이후 동만주 일대에 건재했던 여러 고구려인과 합세해서 해동성국 대국 발해를 세움.
고구려 인구를 대략 350만에서 500만 정도로 까지 보는데(저는 고구려 도시형 성곽의
규모나 분포도 그리고 군사 동원력등을 감안하면 500만 정도가 더 타당할 것으로 봄)
그기에 고구려는 평시에는 경제적 지원과 보호를 하면서 유사시 휘하에 군사로
동원할수 있는 부용세력을 주변에 거느린 왕 중의 왕으로 군림하던 태왕으로
말갈이나 실위, 일부 선비족 그리고 요서의 8대 거란족등이 고구려 영향 아래 있
던 북방민족까지 합치면 거의 천만에 달하는 대국의 나라임.(당시 몽골은 거란에도 털리
던 수준)
고구려는 천만명을 아우러는 동북아 최강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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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고구려 말기와 발해와 금나라 사이의 정황을 좀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요.>
서토 고금사상 최대의 물량과 병력 동원 그기에 이전 북조사에서 가미된 선비족의
대규모의 기병 운용까지 그리고 몇년간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 훈련까지 마친
서토에서 가장 피크 시절의 통일왕조 수나라가 4차례에 달한 고대 세계 최대급의 수백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고구려의 요동성 하나 제대로 깨부수지 못하고 철저히 궤멸되면서 결
국 멸망해 버리자 이후 일어난 당나라 이세민은 조공을 바치면서 내실을 회복하면서 전
술을 바꿔 다시금 북방 민족과 요서의 거란부족을 먹으면서 화려한 전적으로 고구려를 압
박해 옵니다.
그러나 이런 이세민도 결국 고구려 정벌을 하다 깨져서는 쫓기면서 돌아와 병사하고 ( 다
시 거란 부족이 고구려 휘하에 들어옴)2차례의 정벌이 모두 실패하면서 포기 모드로
있던 가운데 희소식이 날아들죠. 다름 아닌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이 거란 부족 일부를
데리고 당나라로 투항하는 고구려 내부의 분열이 나타납니다. 그기에 백제의 압박에 시달
리던 신라는 결국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압박해오는데.
당시에도 당나라는 요동을 따라 일부 성만을 파고 들고 중요한 신라의 식량 보급과
군사 협력 그리고 루트 제공으로 남쪽에서 평양성을 털었던게 주요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 동만주나 한반도 동북부의 여러 고구려성들은 건재했다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이후 3여년이 안되어 고구려 부흥 세력에 의해 평양에 있던 당나라
병사들이 도륙당하면서 요동 요서로 밀려나 버립니다.
결국 당나라는 직접 통치력을 상실하고 보장왕을 대리인으로 무마하는 식의 통치
방식을 구가 하던중 대조영이 요서일대에 끌려간 수만의 고구려 유민과 병사를 규합
탈출을 감행하여 천문령 전투에서 쫓아오던 당나라 대군을 대패시키면서 이후
동만주 일대에서 고구려 세력과 규합해서 대발해를 세웁니다.
이후 발해 무왕은 당나라 산둥 등주의 해군 시설을 박살내어 버리고 요서일대로
당나라를 밀어 버립니다. 이렇게 발해는 고구려 시절의 영토 이상으로 실질적 지배 면적
을 넓혀 현재 한러 고고학 발굴을 보면 남시베리아에 맞닿은 아무르 일대까지 확인되는
상황임.(이미 고구려 시절에 흑수말갈에 연해주와 요서 일때까지 영향력하에 두지만
발해시절에 가면 기온이 상승하면서 더 북쪽까지 직접 지배가 가능했던 이유입니다)
발해의 대다수는 고구려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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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황한 뒷 얘기를 하는 이유는
<br/>
남한에 북한 실향민들이 대거 내려왔다고 현재 북한이 공동으로 빈 공간이 아니듯
발해 건국 역시도 천년여을 이어온 고구려의 곤고한 문명속에서 여전히 건재하게
살고 있던 고구려인들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고 이는 이후 발해가 요나라에 멸망
했을때도 요나라는 발해의 군사력을 그대로 유지 활용하면서 거센 저항에 거의
반독립적으로 관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요동이나 만주일대에는 고구려 발해후예를 자처하던 수만 대군을
운용하던 나라들이 들어섰고 요나라 행정이나 병권등에도 주요 고구려인들이 활약하다
마침내 신라계 황제가 이끈 금나라에 의해 통합되면서 당시 대국의 운용과 행정 도시문
명 병권등 다방면의 토착 세력으로 여전히 영향력을 과시하던 이름만 동란국으로 바뀐
반요사상의 고구려인들을 대거 포섭하지 않을수 없었다는 말이죠.>
이때문에 10대의 금황제 기간에 무려 4명이나 발해인 황후가 황실의 외척으로 군림했고
국무총리부터 도시개발 행정 병권등에 고구려인들이 중축역할을 하면서 심지어
금황제의 즉위와 폐위까지 좌지하게 되는 등 실로 금나라의 내부는 신라황제계의
본국 성씨를 국호로 했지만 여전히 고구려인들이 지배적으로 활동하는 등
남북국 시대의 발해 신라의 연장선의 금 고려와 다르지 않는 내용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중세 고려 말기 만주 심양에도 실질적 고려인과 여진족이 혼재하는데
이때의 여진족도 단순히 고려인과 명확히 구분되는 세력보다는
한반도 일대에서 넘어온 고려인과
금나라 당시 만주일대에 살던 금나라 연합 고려인 세력으로
따로 이질적 계통은 아닌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런 가운데
이성계같은 여진족을 휘하에 둔 군벌 세력이 고려 조정의 한축으로 담당하게 된 것이고.